벚꽃 무한(無限)
- 이영광
벚꽃 그늘에 서면, 신 벗고 건너야 할 것 같아
그늘 그늘 한 그늘,
이 세상은 원래 어두운 곳이었네
어두워지는 마음, 안에 엎드려
오래 제 고통의 비린내에 황홀한 뒤면
아니야, 이 세상은 이렇게 밝은 곳이었네
벚꽃 그늘이 작년의 절정을 캄캄해 찾아
다시 세상의 때를 밀어놓았네
저 희디흰 멍자국들,
이 세상에 아름다움 바치러 무릅써 나오는 것들 앞에
읍하고 싶다, 그러나
아름다움보다 무시무시한 고독이 다시 있으랴
다 알아버려서 더 이상 안고 싶지 않은
사랑을 외면하듯
벚꽃잎들, 벌써 벚꽃잎들을 어딘가에 버리고 있네
미풍도 그들을 상하게 하네
그러니 유고(有故)한 세월 지나는 이여
온몸 버팅겨 간신히 홈리스를 면한 자여
느닷없이 잠실 야구장을 탈출해오는 파울 볼처럼
그대 인생을 한 번쯤 빗나갔다 생각, 생각한다면
저 하얗게 끓고 있는 벚꽃 동산의 화독(花毒)에
잠시 취하는 두려움은 어떠신지?
어쩌다 이 세상에 나와 형언할 길 없는
딴 세상을 만나는 복락이, 다시 있으랴
앞과 뒤 숫자가 같아지는 글에선 괜히 글을 돌아봅니다. 그동안 크게 잘했다 혹은 잘 썼다 자부할 것도 없지만 그래서 더 뒤돌아 보렵니다.
유난히 일찍 피는 벚꽃을 본 적 있으신지요? 제가 보통 '따뜻한 남쪽 나라'라고 부르는 제 고향에는 며칠 동안 날이 따뜻해지면 봄이 온 줄 알고 피어나던 벚꽃이 있습니다. 추위가 아직 다 가시지도 않았는데도 말이죠. 어렸을 때는 그 꽃이 참 바보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곧 다시 동장군이 위세를 떨치면 덧없이 얼어버릴 테니까요. 철 모르고 핀 철이 덜 든 벚꽃이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제가 철이 들고 이제 봄을 기다리는 입장이 돼보니 어리석었던 건 저였습니다. 그 벚꽃은 사람들이 저어하는 추위 속에서도, 옷깃을 여미는 추위를 이겨내고 꽃망울 틔어냈습니다. 봄이 오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려주기 위해서 말이죠. 얼마나 서운했으려나.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하며 저와 같은 말을 한마디씩 보태고 가시던 어리신들 마음 한 켠에도 '봄이 이젠 오려나부다' 생각이 들었을 겁니다. 영화 1987을 보면서도 왠지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저는 이르게 핀 벚꽃 앞에 '너무', '철 모르고'와 같은 어리석은 수식어를 나열하지 않으렵니다. 그 대신 서운했을 그 벚꽃에게 뒤늦게 감사 인사를 전하며 '고맙게도'라는 수식어를 붙이렵니다. 그 꽃은 그래도 흐드러지며 봄이 온다는 희망을 피웠고, 스러지면서 봄이 태동했기 때문입니다.
유난히 스물두 번째 글부터 서른세 번째 글까지 열한 개의 글에는 '소통'과 '사랑'이 많았습니다. 말과 글이 쌓이며 줄기가 그쪽으로 향했나 봅니다. 앞으로도 감사한 마음으로 그러렵니다. 봄이 오길 기다리며, 마냥 기다리지보다 이르게 피는 벚꽃과 같은 글을 한 번 써보려고 합니다.
'근묵자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검은 먹을 가까이하면 검어진다는 뜻의 한자성어입니다. 보통 나쁜 사람과 어울리면 그 버릇에 들기 쉽다는 부정적인 사자성어로 쓰입니다. 하지만 글을 쓰는 저로서는 의미가 조금 달라 보입니다. 먹을 쓰는 사람 곁에 있으면 그 먹이 서서히 스며들면 언젠가 그 사람과 비슷한 농도의 글을 쓸 수 있다는 긍정적인 사자성어로 생각합니다.
이제 글 숫자가 제 나이보다도 나이테를 열 개나 더 둘렀습니다. 써나 갈 글보다 써온 글들이 더 무겁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종종 예전 글을 보면서 아쉬움 마음에 고치기도 합니다. 절로 한숨이 나오는 글이지만 한숨이 나오려는 찰나에 주위에서 보내주셨던 충고와 마음들이 떠올라 이내 한숨을 거둡니다. 그분들을 떠올리며 앞으로도 많이 배워나가야겠습니다. 부끄러움이 많은 성격은 글에도 배어나오나 봅니다. 감사의 인사를 푸념으로 대신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서른세 번 째글을 핑계 삼아 글에 조심스레 적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