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의 운동화'를 읽고, 운동화가 있어야 집에 갈 텐데...
김숨이 책 속에 내린 뿌리는 깊고도 넓었다. 뿌리를 타고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한국 현대사의 질감을 읽어내듯 아름답게 참혹했다. 그녀는 L의 운동화를 복원한다. 하지만 동시에 L의 운동화를 탈역사화한다. 반감이 들지도 모른다. 그의 운동화는 단순한 유품이 아닌 시대를 표방하는 유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시대의 오브제로서가 아니라 2018년 6월의 L의 운동화를 지각한 적이 있는가?
그러나 이르는 길이 쉽지는 않다. 복원가의 시점으로 요셉 보이스의 '죽은 토끼에게 어떻게 그림을 설명할 것인가', 아버지의 구두, 나치 SS단원의 재판, 렘브란트 자화상을 계속해서 그리는 여대생과 마주해야 한다. 그 심연에는 1987년 6월뿐만 아니라 효순이와 미선이, 위안부 할머니 그리고 4·3 사건이 있다. 작가는 구태여 설명을 보태지 않는다. 사족을 포기하고 여남은 여백은 당신이 겪어온 시간과 경험의 질감이 느낄 수 있도록 자리를 양보한다.
작업하는 시간보다 지켜보는 시간이, 기다리는 시간이 여전히 더 길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P.209)
먼저 요셉 보이스의 '죽은 토끼에게 어떻게 그림을 설명할 것인가'다. 사람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사물을 지각할 때 항상 사고를 견지한다. 그렇게 사물 앞에 의미의 벽돌로 벽이 쌓인다. 감상과 해석은 엄연히 다르다. 감상이 죽은 토끼의 능력이라면 해석은 완고한 이성주의자의 덕목이다.
그들의 감상은 감상이 아니라 해석이며 종종 왜곡을 낳는다. 충분한 감상은 역설적으로 결핍된 훑어보기로 가능하다. 작가는 요셉 보이스를 통해 말한다. 작품 속에서만이라도 좋으니 그저 L의 운동화를 오롯이 훑어보자고.
복원의 논리가 기저에 정립된 후에 논의할 논제는 '어떻게 복원할 것인가'다. 복원해야 하는 운동화는 30년 전 그 운동화가 아니다. L이 세상을 떠난 지 30년이 지나도록 남아있는 현시점의 운동화다. 1987년 6월이 아닌 2015년 6월의 그것이다. 그러나 '어떻게'는 모호하다. 적어도 세 갈래의 세부 질문을 내포한다. 어떤 논리로, 어떤 관점으로 그리고 이를 통해 어떤 의미를 낳게 할 것인가.
L의 운동화가, L을 넘어서서는 안 된다.
L을 집어삼켜서는
작가는 L의 운동화의 우상화를 경계한다. L의 운동화에게 역사는 기억이 투쟁하며 이어낸 서사다. 이러한 서사에서 L의 운동화는 당시 6월과 현재 6월을 잇는 매개물이다. 그러나 신격화해선 안 된다. 카버의 '대성당'에서도 보았듯이 우리는 눈을 뜨며 대부분의 감각을 닫아버린다.
신격화는 시각 이외에 모든 감각을 제물로 성상에 바칠 것을 요구한다. 맹목적 인간에게 이는 참기 힘든 유혹이다. 그러나 L은 L로서, L의 운동화는 L의 운동화로서 남고 존재해야 한다. 이것이 깨지는 순간 오히려 사람은 그 프레임에 갇혀 L을 L로서 보지 못하고, L의 운동화를 통해 L을 지각할 위험을 낳는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런 방식을 통해 쉽게 해석될 여지가 있다.
이는 소설의 서술 방식과도 맥락을 공유한다. 이 책을 처음 읽고 난해하다 생각했다. 두 번째 읽었을 땐 가닥이 잡히는 듯했고 세 번째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난해한 까닭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난해함을 위한 난해함은 단호히 아니었다. 그 난해함은 독자들에게 그동안 써왔던 메커니즘을 포기시키고 사유를 강제한다.
이를 통해 난해 함이라면 그렇게 부를 수 있는 비유와 상징으로 획일적인 시선을 거둔고 새로운 지평을 연다. 그리고 단절의 틈을 이용해 시점을 여러 곳으로 굴절시킨다. L이 지니는 위대함과 운동화가 가지는 사소함이 빚어낸 '위한 사소성'은 그렇게 거대한 담론과 작별하며 우리와 만나야 한다.
아버지의 구두였다. 사별한 아버지를 기다리며 집안을 향해 뉘어있는 구두다. 제사를 지낼 때 분명히 구두의 방향이 바뀌었다고 말하는 어머니는 아버지의 구두를 버리지 못한다. 온 가족이 잠든 밤 모르는 사내가 집에 침입한다. 이내 그 구두를 보고 욕지거리만 뱉어낸 체 황급히 도망친다. 그날 밤 만약 아버지의 구두가 없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가정이 붕괴할 뻔했다는 가정을 과장 섞인 섣부른 짐작일까. L의 운동화도 그런 역할을 해내 왔다고 묘사한다면 비약일까.
타자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지만 이를 인지하는 자아에게는 '어떤 것'인. 볼 때마다 세상에 존재하는 형용사론 표현할 수 없는 아픔과 비애가 나를 누르면서도 차마 버릴 수는 없었던. 운동화와 구두의 그늘이 닿는 곳에서 추억하는 이들을 지켜주던 유품이자 유물.
현대 민주주의를 흔히 피를 먹고 자라난 나무에 빗대어 표현한다. L과 함께 늘 거론되는 P, 그리고 광주, 그 시대를 살아간 무수한 사람들을 떠올리자면 이보다 가슴에 닿는 비유도 찾기 힘들다. 현대사에서 슬픔은 기약 없이 영원했고 구원의 가능성은 가차 없이 기각되었다. 민주주의 앞에 붙었던 수많은 수식어 중 진실한 것은 아마 '피로 이뤄낸' 혹은 '피의' 일지도 모른다. 이를 대체할 수 없는 모호한 수식어는 함부로 붙여선 안된다.
이 나무는 참혹하게 아름답다. 이미 울창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크기 위해 몸부림치기 때문이다. 아직은 연약해 보일지도 모르는 나무지만, 언제나 부릅뜬 채로 세상을 보고 또 보고야 말 것이다. 다만 이 나무가 이미 꽃을 틔웠다고 만족하고 찬양하는 말은 허위다. 오히려 '그러나 아직은 아니다'라고 말하는 끝없는 노력의 반성과 회의만이 항상 진실이다.
운동화 가격이 만만치 않아서 지출이 컸는데, 서운하지 않았어요. L 대신 익명의 누군가가 그 운동화를 신겠지요. L과 발 치수가 같은 누군가 가요. 누군지, 부디 오래 그 운동화를 신어주었으면 좋겠어요. 그 운동화를 신고 L이 살아생전 가보지 못한 지상의 많은 곳들을 부지런히 누비고 다녀 주었으면요. (P.260)
"절반의 성공이라는 말을 인이 박이도록 들었어요."
그 말이 자조적으로 들려 나는 그녀를 바라본다.
"6월 항쟁이요."
(P.252)
그러나 현실은 늘 꿈보다 참혹했다. 선거는 잉태했던 6월의 뜨거웠던 함성만큼의 실망과 허탈을 낳았다. 쟁취한 직선제로 군부 독재의 중심인물이 뽑혔기 때문이다. 감성들은 진영의 분열과 결부해 수많은 사람들을 질식시켰다. 이성의 자살이었을까. 유시민 작가 또한 TV 한 프로그램에서 "하늘이 무너져내리는 기분이었다."라 표현했다. 그러나 하늘이 무너진다 해도 그들의 허망한 가슴을 메울 순 없었으리라.
여기에 이성적인 분석가들은 매스를 뽑아 들곤 이렇게 평했다. "반쪽짜리 성공이었다." 그 누구도 이 냉철한 분석을 부인할 순 없다. 그들은 항상 옳은 말을 해낸다. 영화 1987을 보고 나도 이처럼 생각했다. 이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그러나 이에 더해 이 책을 덮는 순간 나는 묻는다. L의 운동화 앞에서 이와 같은 말은 윤리적인가. 윤리적일 수 있는가.
합리성은 고통을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 아르도노는 그의 책 '미학 이론'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합리적 인식은 고통과 멀다. 그것은 고통을 총괄하여 규정하고 그것을 완화하는 수단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러나 고통을 체험으로써 나타낼 수는 없다. 합리적 인식이 볼 때 고통은 비합리적인 것이다. 고통이 개념화되면 그것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게 되고 일관성도 없어질 것이다."
고통과 합리성은 개별적으로 실존한다. 다만 합리성은 때론 모호할 수 있지만 고통은 늘 생생하다. L의 이야기를 할 땐 유난히 수식어구를 아꼈던 작가가 기어이 6월을 표현할 때는 '인이 박이도록'이라는 표현을 더한다. 이를 통해 작가는 말하려는 게 아닐까. L이 원했듯 원치 않았든. 그것의 반쪽이 실패이더라도 6월의 기폭제가 된 것은 맞지 않냐고. 더불어 당신도 그때 L과 같은 운동화를 신고 있진 않았냐고. 담담하면서도 처절하게 묻는 듯했다.
김숨의 비유와 상징은 '뿌리 이야기'에 이어 이번에도 기어이 아팠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는 아파야 했다. 합리적인 인간이 건강해지기 위해선 합리성으로 무장해 병을 부정하기보단 그 반대에 실존하는 고통을 껴안아야 한다. 분서과 치유는 그 포옹 이후여야 한다. 영화 1987을 보면서도 우린 그것을 추억하는 데, 정치적으로 사용할 것에 그칠 게 아니라 그때의 감각들을 다시 한번 상기하며 노래해야 한다. 이렇게 어설프게 나는 내 복원을 끝낸다.
그 운동화가 유행이던 시절이 있었으니까요. 제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제 친구 M도, J도, K도 그 운동화를 신고 다녔습니다. 그러니까 L의 운동화는 저의 운동화이기도 하면서 M과 J와 K과 K의 운동화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운동화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p.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