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들지 않는 남도

글을 마치며가 아니라, 아직 못다 한 이야기가 남아있다고 적었어야 했다.

by 변민욱
슬퍼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


"제주도에 두 달 남짓 머문 적이 있는데, 그때 묵었던 민박집주인이 팔순 할머니였어요. 자식들은 장성해 육지로 나가고 혼자 민박을 치면서 살고 계셨어요. 하루는 할머니하고 막걸리를 마시다가 불쑥 4·3 사건에 대해 여쭈어 보았어요. 4·3 사건을 실제로 겪은 분으로부터 생생한 증언을 듣고 싶었거든요. 처음에는 말도 꺼내지 말라고 손사래를 치시더니, 술기운이 어느 정도 오르자 4·3 사건 때 당신의 친정마을에서 벌어졌던 해괴한 일에 대해 들려주셨어요. 운동장 같은 곳에 마을 사람들을 죄다 모아 놓고는 이둥분하는 선을 하나 긋더니, 그 선을 중심으로 이쪽이든 저쪽이든 서고 싶은 곳으로 가서 서라고요. 마을 사람들은 영문을 몰라하면서도 시키는 대로 일부는 선 이쪽으로, 일부는 저쪽으로 가서 섰대요. 그런데 선 이쪽으로 가서 선 사람들은 살고, 저쪽으로 가서 선 사람들은 적었다네요. 그 선이 말하자면, 생과 사를 가르는 선이었던 거예요. 할머니의 숙모 되는 분은 처음에는 선 이쪽으로 가서 섰다가, 친정 언니가 손짓을 해 저쪽으로 건너갔대요. 친정 언니가 오라니까 멋모르고 건너갔다가요. 친정 언니의 손짓이 저승에 함께 가자고 부르는 손짓인 줄도 모르고 건너갔다가요."

김숨,『l의 운동화』, p.253


솔직히 적어야 한다. 나는 글에서 '사랑' '희망'이라는 단어를 적을 때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김숨의 책은 자꾸 그 이유를 마주 보게 만든다. 다행이었을까. 유년시절 가장 힘겹게 읽은 책은 '순이 삼촌'과 '다랑쉬 오름의 슬픈 노래'이었다. 내 글의 시작점도 아마 4·3 사건 관련 교내 글짓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더 이상 읽어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당시 나는 더 큰 세계를 만나고 오겠다며 다랑쉬 오름에 이별 아닌 작별인사를 하고 떠났다. 한창 꿈을 키울 나이였기 때문에 나는 책이란 '성공담'이거나 적어도 '해피엔딩'이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 사이에 위치한 모호한 회색지대에 있는 글들을, 더욱이 검은 담즘이 흐르는 글들을 나는 기피했다.


내 인생이 꼭 그렇게 될 것만 같아서였다. 삶은 나아질 것이며 역사는 진보할 것이라고 인식했던 때였다. 한 평 남짓한 자습실 책상에서 잠을 깨우며 공부할지언정 그리 꿈꿔왔었다. 정치적 감정 없이 고백하건대, 학창 시절 마지막 글은 지난 정부 보훈처장으로부터 상을 받은 '나라사랑 글짓기'였다. 시작과는 정반대의 결말로 매듭지은 셈이다. 시상식엔 좀처럼 오지 않으셨던 아버지가 따라오시며 삶에서 자랑스러웠던 순간 중 하나였다고 하니 다행스럽게도 효도라는 명목으로 그 글은 위안을 삼는다.


그로부터 2년 뒤 매주 글을 쓴다. 가끔은 뿌리를 잊고 글에서 희희낙락 거리기도 한다. 그러다 '뿌리 이야기'를 읽었고 'l의 운동화'를 읽었다. 거창한 비 유일수도 있겠지만 언제까지 아킬레우스가 파리스의 화살을 피할 순 없는 법이다. 지난해 잠시 집에 내려갔을 때 도서관에 들러 순이 삼촌을 다시 읽었다.


"아, 떼죽음 당한 마을이 어디 우리 마을 뿐이던가. 이 섬 출신이거든 아무라도 붙잡고 물어보라. 필시 그의 가족 중에 한 사람이, 아니면 적어도 사촌까지 중에 누구 한 사람이 그 북새통에 죽었다고 말하리라. 군경 전사자 몇백과 무장공비 몇백을 빼고도 5만 명에 이르는 그 막대한 주검은 도대체 무엇인가?"
현기영, 『순이삼촌』, p.85


붙들고 어떻게든 써봐야지 생각했다. 하지만 때때로 읽으면서부터 '도저히 쓸 수 없겠다'라고 느껴지는 책들이 있다. 대게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책들이 그러했다. 글을 쓴다고 폼은 잡아놓고 어디선가 긁어모은 사실의 나열만을 늘여 놓았다. 초등학교 시절보다 오히려 더 진솔하지도 못했다. 전에 썼던 글 중 '나는 어린 시절보다 조금 더 지혜로워지지 못했다'는 이때의 감상이자 자조다.


그러다 펜을 놓았다. 뿌리를 외면한 채 살다가 다시 그 뿌리의 표정을 살피러 갔지만 아직 나는 내 뿌리를 들춰낼 자신이 없다. 더욱이 작가부들이 써 내려간 생생한 아픔의 증명에 사족을 붙일 재간도 자신도 없다. 여태껏 모든 작품이 그래 왔지만 유독 더 그랬다. 초안에 겨우 날려쓴 그 글씨체가 내가 겁을 내고 있고 무지함을 증명하였다. 그래서 오히려 돌아와선 몸에 맞지 않는 옷을 구태여 몸에 집어넣으려 했다. 스스로도 낯설었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뿌리도 모른 체 꽃을 노래했다.


종종 사람들에게 내 글을 보여주거나, 지인 분들이 내 앞에서 읽을 때가 있다. 이럴 때면 심사받는 기분을 너머 벌거벗은 것처럼 부끄럽다. 읽다가 이내 스크롤을 그저 슥슥 내리면 부끄럼의 방향이 바뀐다. 글이 편안하다는 반증이기 때문이다. 아직 글에 굴곡을 새겨 넣진 못한다. 그래서 다행이다. 또 한 번 어떻게든 쓰려했다가 내린 결론은 '아직은 4·3에 대해서 쓸 수 없다'다. 무능하고 무책임하기 때문이다.


책을 놓지 못하고 며칠 간의 고민 끝에 이런 결론에라도 닿으니 맘이 조금 놓인다.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셈이다. 사람들은 보통 어떤 사건에 대해 말하곤 곧잘 잊어버린다. 본인은 윤리적 책무를 다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글을 사람들 중에서도 그러한 사람이 없다곤 이야기할 수 없다. 그렇게 직무를 유기한다. 그러므로 남은 형기 동안 희망을 이야기하더라도 또다시 잊지는 말아야겠다. 또한 앞으로 써야 할 글을 한 걸음 앞에 두고 걸어가 보는 것도 괜찮을 듯싶다. 그 무게가 내 글의 경솔함을 눌러줄 것이다.


사족이 되려나. 글을 쓰다 신문을 보니 문재인 대통령님도 4.3 70주년 추념식에서 '잠들지 않는 남도'를 부른다고 한다. 바라건대 돌아올 4월의 그 날은 양 진영 이념의 각축장이 아닌, 선거 유세가 애도사 대신 말하여지는 곳이 아닌, 그렇게 공허한 말들이 오가는 대신 대립과 갈등을 초월한 숭고한 애도의 장이길, 수동적으로 겪은 비참한 아픔이 능동적으로 고백되고 회복될 수 있길 바라본다.


(······)
슬퍼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永遠)히 슬플 것이오.

팔복 - 윤동주 『마태복음 5장 3~12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