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렌타인 데이, 초콜릿을사신 당신께
그리고 사랑은 너에게 어떻게 왔던가
사랑은 너에게 어떻게 왔던가,
빛나는 햇살처럼,
아니면 우수수 지는 꽃잎처럼 아니면 기도처럼 왔던가,
말해다오
R.M 릴케, 「사랑이 어떻게 너에게로 왔던가」 中
지인에게 기프티콘을 하나 받아 초콜릿을 산다 1+1 이여서 하나를 더 준다. 포장지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사랑하는 연인에게 선물하세요.' '발렌타인 데이는 내 사랑을 증명하는 날' 여기도 사랑 저기도 사랑이다. 언제부터 내가 이렇게 사랑이 넘쳐흐르는 지경인 세상에 살았는가. 그럼에도 왜 나와 당신은 사랑을 떠올리면 동시에 해갈되지 못하는 갈증을 느끼고야 마는가. 그래 그런 세상에 속에 살고 있다고 치자. 그 세상에서 사랑을 증명하는 행위는 이렇게도 쉬운가. 이 초콜릿이 사랑의 증언이자 증인이라면 피고인 내가 먹어버린다면 사랑은 시작하는가 끝나고야 마는가. 자문은 고문이 된다.
갖은 생각에 빠져 있다가 직원의 목소리가 나를 흔들어 깨운다. "저기 다음 손님도 기다리고 계셔서요." 그 말에 나는 도망치듯 편의점에서 뛰쳐나온다. 내 다음 손님에게도 한 손에는 카드가 또 다른 손에는 사랑이 들려있었겠지. 직원의 말이 "저기 다음 손님도 그 사랑을 계산하려 기다리고 계셔서요"가 아니었을까. 먹을 생각을 관둔 초콜릿을 책상 위에 올려둔 채로 나는 펜을 든다. 가방 속 어떠한 책이라도 상관없지만 나는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를 꺼내 든다.
"저기 가는 저 신사 양반들 말이에요." 플라이크가 조용히 말했다.
"저들도 이 아이가 이 지경이 되도록 부추긴 셈입니다."
"뭐라고요?" 기벤라트가 의심과 놀라움의 눈으로 플라이크를 쳐다보았다.
"세상에 그게 무슨 소립니까?"
(중략)
"어휴 그만 합시다. 당신이나 나나, 어쩌면 우리 모두 저 아이를 너무 소홀히 대했던 것 같지 않습니까?" (P.176)
소설 속 한스는 죽었다. 위 대화는 한스와 친하게 지냈던 플라이크 아저씨와 아버지 기벤라트의 대화다. 소설의 결말을 서두에 적는다. 죽음까지 이르렀던 과정을 더 자세히 보기 위함이다. 또한 죽음 이후의 태도를 논해보고자 함이다. 그래서 이 글은 고유명사였던 당신과 나의 사랑이 죽어버리고 어느덧 진부한 보통 명사화된 세상을 향해 바치는 진혼곡(requiem)이다. '수래 바퀴 아래서'는 그 고전의 위대함을 알면서도 목적이 아닌 수단이요. 사랑은 도구가 아닌 주제요 목적임을 미리 밝힌다.
- "나는 보랏빛이 좋아"(황순원, 소나기 中)
그래, 지금과는 달랐어. 여기서 누가 그런 걸 알겠어? 전부 지루한 녀석들, 위선자들 뿐이야! 그저 지칠 때까지 공부하고 자신을 혹사시키지. 히브리어 알파벳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 있다는 것도 모르고 말이야. 너도 똑같아 (p.91)
행복했던 때를 떠올린다. 흔히 전쟁에 비견되는 입시전쟁 속에서도 떠올려 보면 분명 순간순간 아름다운 휴전의 순간들이 존재했다. 유일하게 결과보다도 이르기까지 과정을 진심으로 행복해했던 때. 그리고 그 행복을 후회 없이 아름다웠더라고 분명하게 노래할 수 있었을 때. 지원 가능한 대학에 소위 말하는 SKY 대학이 나왔을 때는 분명 아니었다. 더 솔직하게 적어보자면 그때 또한 빛나던 순간이긴 하다. 하지만 그 빛은 세월이 흐를수록 자꾸만 퇴색되어 간다. 이와 대비되면서 점점 귀중하게 밝아지고 있는 빛을 따라가 본다.
나와 당신이 비록 서우에 가지 못하더라도 희망을 고대(苦待)하며 함께 역경을 극복하며 연대(連帶)하던 순간이다. 이 기억이 등대처럼 나의 과거를 환하게 비춘다. 그때 우린 쉽게 말을 꾸며내며 고백하기도 했다. 그럴 재간이 없으면 고민하며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다 생각해 낸 말을 어렵사리 내뱉으며 고백했다. 지금 돌아보면 모두 애오라지 진실됨으로 아름다웠다. 우리는 한결같았지만 멈춰있지는 않았다. 그렇게 전장에서도, 시체 사이사이로 꽃은 기어이 피었더랬다.
그렇게 사랑은 빠름과 경쟁에 취해있던 우리에게 "그렇게 악착같이 할 필요는 없잖아요."(p.176)라 말하며 다가왔다. 그러나 이 시기 사랑은 내포한 생명성만큼이나 태생적으로 불안하다. 이 불안함은 보디 이중적인 사랑의 속성으로부터 기인한다. 헤르만 헤세는 작중 '에마'라는 한스가 사랑에 빠졌던 동명이인을 통해서 이 이중성을 논한다. 두 사랑이 있다. 두 사랑 모두 '난 널 원해, 하지만 널 가질 순 없어'라고 말한다. 감정의 본성은 배반이다. 아름다웠던 사랑이 욕망으로 구체화되고 끝내 치환되는 순간이다. 사랑을 느끼는 데서 헤어 나와 우리는 욕망을 분석해야 한다.
'일 더하기 일은 이야'
삼 년 전 한스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던 에마 게슬러가 집에 돌아와 있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 한스는 호기심에 몇 번 에마를 쳐다봤지만 그녀는 더 이상 예전처럼 그의 마음을 끌지 못했다. 한 때 가냘픈 청순한 소녀였던 에마는 이제 덩치가 커서 투박하게 행동했으며 유행에 따른 어른스러운 머리를 하고 있어서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중략) 한스는 에마가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하는 한편, 예전에 그녀를 볼 때마다 얼마나 달콤하고 몽롱하고 뜨거운 느낌이었는지 떠올리고는 우울해했다. 정말 그랬다. 전에는 모든 것이 전혀 달랐다. (P.156)
첫 번째 사랑은 짝사랑이다. 이중적인 사랑 중에서도 이중적인 사랑이다. 나라는 x축과 너라는 y축도 버거운데 여기에 환상이라는 z 축까지 가세한다. 고로 3차원적이다. 욕망의 주체나 그 대상이나 모두 환장할 노릇이다. 더불어 짝사랑하면 전 국민이 암기하고 있는 가설이 있다.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랑에 관한 한 내가 여타까지 증명한 유일한 가설이다. 우린 이 가설을 증명하며 대개 '처음이니깐 서툴러서'라는 정리를 이용한다. 하지만 증명이 명확하지 않다. 두리뭉실한 단어의 나열이기 때문이다. 솔직해져야 하고 더 명쾌해야 한다. 가끔 저 가설에 반례를 들고 오는 사랑꾼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을 응원하면서 반박한다.
인간은 환상을 깨고 싶어 하지 않는 동물이다. 짝사랑에만 국한된 논리는 아니지만 짝사랑은 병적이기까지 하다. 이 증상에 내재한 미학은 차치하고 말이다. 우리는 사랑했던 사람이 그 모습 그대로 남아있길 바라며 동시에 그리워한다. 여기까지는 모순적이지 않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그들을 만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거울 속 그 시절과 달라진 내 모습을 보며 다만 우연히 당신 모르게 한 번 마주치고 싶어 할 뿐이다. 당신의 환상 속에서 실존하는 거울은 항상 과거의 그녀를 비춘다. 환상이며 착시다. 이 거울은 현실의 냉혹함과 맞부딪히는 순간 여지없이 산산조각 난다. 이 충격은 3차원의 상실에 비견된다. 깨진 유릿조각은 말한다. 현재 당신과 나를 비추며. '일 더하기 일은 이야'
'일 더하기 일은 영이야'
한스는 갑자기 근심에 사였다. 에마가 그냥 가버렸으면 하고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에마는 계속 머무르며 웃고 떠들고 어떤 농담도 노련하게 받아넘겼다. 한스는 부끄러워 아무 말도 못 하였다. (중략) 그렇게 한스는 자기 몫으로 주어진 사랑의 비밀은 어쩌면 너무 빨리 맛보았다. 그것은 그리 달콤하지 않았으며 지독한 쓴 맛이었다. 부지럾는 한탄과 애타는 그리움과 절망적인 날들이 이어지고, 두근거림과 가슴 죄이는 불안감에 잠 못 이루고 어지러운 꿈에 시달리는 밤들이 계속됐다. (P.174-175)
또 다른 사랑이 있다. 이번엔 성과주의에 젖은 당신에게 0이라는 개념을 알려줄 차례다.'일 더하기 일은 영이야'의 서사다. 등장인물 역시 또 다른 에마다. 이번 욕망은 이전과 상이하다. 이 시절 욕망의 변화는 주체가 변했다기보단 대상이 달라진 데서 비롯된다. 위의 사랑에서 나는 한 없이 환상 속에서 당신을 그리기만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대상이 환상이라는 z 축을 부시며 다가온다. 2차원적 사랑이다. 대상이 주체적으로 변모하며 '날 가져봐'라고 적극적으로 유혹한다. 이 에마는 "너 나랑 키스하고 싶구나"라 묻고 키스하고는 "내일 밤에도 또 와"라고 말한다. 덜 성숙한 욕망은 더 성숙한 욕망 앞에서 움찔한다. 자신만만했던 욕망이 주저하고 주춤한다. 욕망은 내 안의 또 다른 타자임을 깨닫는다.
그는 아직 그런 불안감과 달콤한 고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지 못했다. 그저 예감만 할 뿐이며, 고통과 기쁨 중 어느 쪽들을 더 크게 느끼는지도 가늠하지 못했다. 기쁨은 사랑에 대한 젊은 한승의 욕망이 승리한 것이었고, 또한 강렬한 생명에 대한 첫 느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고통은 새벽의 평화가 깨지고 그의 영혼이 유년 세계를 떠나 다시느 그곳으로 되돌아 갈 수 없음을 의미했다. (P.178-179)
욕망이 실패하는 순간 도덕적 자아가 구원의 손을 내민다. '위험하니까 도망쳐' 도덕적 자아는 두려움을 통해 욕망을 멈추려 든다. 두려움을 분석해본다면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자기분석의 두려움이 공존한다. 그 강도는 흔히 말하는 '모범생'일 수록 강력하다. 도덕적 좌표만을 충실히 따라 삶의 나침반을 따라 걷고 있었는데 사랑이 나타나 이를 교란시킨다. 그들은 잃은 것이 없으며 허위가 없는 윤리적 인간이기보다는 잃을 것이 많은 도덕적 인간이다. 그렇다고 이들에게 도피가 가능할까.
아니다. 그들은 보통 이도 저도 아닌 결단에 그런 결말을 맞이한다. 처음 느껴보는 강한 끌림과 두려움 속에서 이 증상의 치유 역시 원치 않기 때문이다. 다분히 파우스트적인 거래다. 소설 속에서도 한스는 두려워 집으로 도망친다. 그러나 다시 그녀를 찾았을 때 그녀는 집으로 가버린 뒤다. 비극의 끝에서 울고 있는 나에게 메피스토펠레스는 말한다. "일 더하기 일은 영(0)이었소. 파우스트 박사"
사랑이 사라지는 것인가. 사라지는 것을 우리는 사랑하는가. 두 사랑 모두 고통의 노선 속에서 지칠 줄 모르는 욕망의 열차는 행복이란 간이역을 지나치며 이별이란 종착역에 치닫는다. 거창한 담론에 빠지지 말자. 그래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전장 속에서 꽃이든 네 잎 클로버든 피워냈던 사람은 행복했던 사람이다. 그리고 행복한 사람이다. 시들어버렸더라도 다시 틔워낼 가능성이라도 있기 때문이다. 부디 그 꽃과 가능성을 잃지 마시길. 왜냐하면 이제 그 꽃을 조화(弔花) 삼아 사랑이 흘러넘치다 못해 죽어버린 세계로 가야 한다. 이곳에선 사랑의 범신론(汎神論)을 주창하던 사람들도 지쳐버려 이신론자(理神論)들이 자리를 대신했다. 그 또한 오래가지 못하고 '사랑은 사치일 뿐이야'라고 말하는 무신론자들이 들끓었다. 그렇게 사랑은 질식사했다.
'1+1=2'라고 정의하는 교과서를 집어던지고 '1+1=1이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를 자기 몸을 다 바쳐 증명코자 하는 실험주의적 행태 예술가들은 여기서 추방당했다. 남은 이들은 배치표를 거쳐 사회에 맞춰 살도록 놀랍도록 진화를 마쳤다. 보통 명사화되어버린 무수한 N과 M만이 러브호텔에서 셋방살이 중이다. 그래서 이곳의 서사는 N+M=0이다. 증명해야 하는 가설은 절망적이고 이에 대항하는 문학은 필사적이다. 아젠다 세팅(Agenda setting)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이제 도처에 즐비한 사랑을 회복하고 '사랑을 사랑하는 법'을 고민해봐야 한다. 고로 이제 문제는 타자도 과잉도 아닌 결핍과 빈곤이다.
우리는 결국 사랑을 탕진하고야 말았다. 이 결말은 다음 글의 서글픈 서론이다.
다음 글에서 이어집니다.(https://brunch.co.kr/@qusalsdnr123/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