밸런타인데이에 덧붙여 '일 더하기 일은?'의 두 번째 이야기
“사람들은 사랑이 없는 욕망만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단 한 사람도 남을 위해 눈물을 흘릴 줄 모릅니다. 이런 사람들만 사는 땅은 죽은 땅입니다.” (조세희,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中)
사 년 동안의 수도원 생황에서 매 학년마다 한 명 이상의 학생이 중퇴를 했다. 때로 누군가 죽음을 맞아 애도의 노래 속에 땅에 묻히거나 친구들 손에 들러 고향으로 옮겨지기도 했다. (중략) 또 드문 일이지만 한 번 씩 고학년에서 청춘의 고민으로 혼란에 빠진 젊은이가 자신에게 방아쇠를 당기거나 물에 뛰어들어 어둡고 신속한 생의 탈출구를 선택하기도 했다. (p.98)
유년 시절 사랑은 개인 차원에서는 가장 큰 혁명이었다. 하지만 그 혁명도 결국 끝이 난다. 혁명이 끝나자 우리는 각자의 생존 방식에 따라 뭉치고 흩어졌다. 나름의 공통분모를 찾아보자면 혁명 직후 생존비 마련을 위해 가지고 있던 얼마 안 되는 사랑을 급히 공매도(空賣渡) 했다는 과거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나와 타자가 뱉는 말의 나열을 대화라고 심지어 소통이라고 부른다. 이 대화도 소통도 아닌 끝말잇기는 매번 나와 너는 다르다는 진리를 상기시킨다. 잦은 복습에 지친 우리는 이제 2라는 무게조차 버거워한다. 그래서 기어이 그 자리에 0을 집어넣는다. 이제 사랑의 서사는 제로섬(Zero-sum) 게임을 향해 나간다.
'0+0=0' 영 더하기 영은 영.
발렌타인 데이와 같은 '기념일'은 이러한 사랑을 처연(悽然)하게 증명하는 날이다. '상술에 걸려들어' 쉽게 사랑을 사는 사람들을 보며 냉소를 짓는 사람도 저 식의 증명에 일조한다. 그 사람은 승리를 자신했을지 모르지만 어느 순간부터 패자였음을 기필코 깨닫고야 만다. 그 어느 순간이란 언제부터였을까. 냉소를 던지던 순간일까. 아니다 그 이전이다. 보다 확실한 건 사랑을 공매도하고 냉소와 자조를 매수하던 그때부터 무언가 조금씩 잘못되어갔다는 사실이다. 소나기를 맞으며 그토록 꿈꿔 왔던 어른이 되었지만 달라진 것은 없다. 여전히 나는 전장 한가운데에 있고 계속 무언가를 잃는다. 자의로든, 타의로든 잃어버린 것들 중에는 분명 사랑도 있다.
교사라면 자신의 교실에 한 명의 천재보다 여러 명의 둔재가 있는 것을 더 좋아한다. 그도 그럴 것이 사실 교사의 의무는 특출한 인물을 키워내는 것이 아니라 라틴어와 수학을 잘하는 성실한 인간을 길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쪽이 더 심하게 고통받는가? 교사인가, 천재인가? 어느 쪽이 더 상대에게 폭군 행세를 하며 더 성가시게 구는가? 어느 쪽이 더 상대의 영혼과 삶을 더럽히고 파괴하는가? 이런 질문에는 누구나 분노와 수치심을 느끼면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돌아보아야만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p.121)
지금 이 순간도 우리는 곁을 떠나는 수많은 한스의 선생(先生) 임을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더 이상 OECD 중 자살률 1위라는 통계를 보고서도 경각심을 느끼지 못한다. 익숙한 통증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통증을 유발하는 기억을 떠올리지 않으려 한다. 하루에도 수많은 한스가 '수레바퀴 아래서'와 소재는 다르지만 비슷한 서사로 동일한 결말로 생애를 매듭짓는다. 그러나 우리는 눈물에 젖은 눈을 보면서도 손수건을 건넬 줄은 모른다. 또한 남을 위해 눈물을 흘리는 법조차 잊었다. 사랑을 잊어버린 그 체온으로 인간은 항온 동물이 되었다.
분명 초등학교 때 알림장에 소지품으로 손수건을 적었던 것을 나와 당신은 기억한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나를 포함한 사람들은 손수건을 갖고 다니지 않는다. 언제부터였을까. 그 손수건을 이제 몇몇 힐링 에세이가 대체한다. 사랑을 잃어버린 이들이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 절박하게 글과 몸을 부빈다. 그렇게 부재는 또 다른 부재가 보완하고 또 다른 부재를 낳는다. 처참하게 일상화되어버린 0+0=0의 서사다. 이 냉혹한 서사에는 감히 환상조차 발을 디디지 못한다. 늘상 꾸던 악몽이 현실이 되어버린 세계다.
이 세계에선 어떤 행복한 사랑의 행위도 상대방을 담지 못한 슬픈 자위가 되고 만다. 그렇게 사랑을 잃었지만 사랑을 생산해야 처지에서 우리는 모두 사랑 기계가 되어버렸다. 기계끼리는 서로 감정을 공유하거나 위로하지 못한다. 꺼억꺼억 쇳소리만 날 뿐이다. 외로워진 사랑 기계는 수많은 부속품들을 쳐다보다 지쳐 자꾸만 별을 쳐다보며 과거를 그린다. 하지만 볼 때마다 처절하게 느끼는 사실은 이 세계의 바깥은 없다는 점이다.
이 세계의 바깥은 없으므로 사랑 기계는 이 세계에서 다시 한번 사랑이란 혁명을 이룩해야 한다.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혁명 이후, 흩어지기 전 느꼈던 감각들을 다시 한번 노래해야 한다. 너무 급진적인가. 하지만 나는 자신의 사랑 앞에서 만큼은 그 어떤 보수주의자도 누구보다 급진주의자가 되는 기적을 수없이 목도해왔다. 그러니 사랑과 그 감각에 한 번 더 기대어 본다. 아니 마지막으로 희망을 걸어본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사회에 너무 쉽게 매도해버린 사랑을 환불받아야 한다. 그럴 권리는 아직 남아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는 사랑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영수증은 챙겼는가?
연애 시, 연애 시라는 걸 쓰는 사람들이 있지
그런 걸 뭘까
없어지지 않는데
없어지지 않는데
이 더러운 자식 이 더럽고 지겨운 자식
-황병승, 「조금만 더」中
영수증을 갖고 있더라도 문제다. 하도 많은 곳에서 비슷한 짝퉁을 사는 바람에 당신만의 사랑을 어디서 팔아치웠는지 헷갈린다. 하지만 그 모든 곳을 가보는 한이 있더라도 그 여정 속에서, 진부한 사랑의 더미 속에서 고유명사 하나를 꼭 찾아내야 한다. 더듬더듬 거리면서라도 한 걸음씩 내디뎌야 한다. 그 여정은 어떤 여정인가. 우리는 그동안 "먹고살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일이야"라고 말하며 쉬이 짝퉁을 구매하고 탕진해왔다.
그러면서도 위대한 성직자처럼 "사랑만이 사람을 살게 하는 유일한 가치야"라며 위선적인 말들을 해왔다. 그래서 사랑에게 진 빚을 청산한다는 기분으로 욕망의 방향마저 자신에게 돌려 찾아 나서는 여정이다. 길을 떠났는데 뒤편에서 무언가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린다면 방향은 정확하다. 이 서사는 0을 서로 더하는 것이 아닌 이어 붙이려는 서사다.
0+0=∞은 단순한 서사를 뛰어넘어 몸부림이다.
사랑을 찾아서도 문제는 끝나지 않는다. 찾아가 보니 떡하니 '고객님의 단순 변심에 의한 교환 및 환불은 불가함을 알려드립니다'라고 적혀있다. 당황할 필요 없이 오히려 잘됐다. 이제 점원에게 순례자의 길에서 느낀 감정을 솔직하게 토로하면 된다. 사랑을 그 여정 속에서 얼마나 당신이 사랑하게 되었는지 증언할 차례다. 단순한 변심이 아닌 자처하는 순교임을 보일 차례다. 그 과정에서 잃어버렸던 사랑은 개인적 차원에서 혁명적 층위를 회복한다. 투쟁으로 고통스럽게 남긴 나의 재산이자 유산이다. 네가 죽어도 내가 죽어도 이 사랑만큼은 남는다. 영속적인 사랑이다. 이 과정을 거치면 반드시 사랑은 부활하는가. 아쉽지만 답은 '모른다'이다. 그럼에도 시작해야 할 이유는 뚜렷하다.
그렇지만 한 가지 사실은 분명해 보이기 때문이다. 사랑에 대한 비평과 비판은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사랑을 다시 이야기할 권리를 찾기 위해서라도 이 여정을 반복해야 한다. 최근 난해 해지는 연애소설과 연애 시는 이 여정에서 만나자는 굳건한 맹세다. 최근 만난 지인분들에게 현대 문학이 왜 이렇게 어려워졌느냐고 묻곤 한다. 나 또한 항상 작품을 보며 묻곤 하는 질문이다. 하지만 작가의 탓은 아니라는 결론에 항상 도달한다. 이내 늘 능력 부족이지만 나는 그 지인들의 편이 아니라 문학의 시점에서 서보려고 노력한다. 우리는 작가가 그 작품을 어렵고 난해하게 만들 수밖에 없게 하는 글과 세태에 대해 봐야 한다.
글을 쓰는 사람은 자주 깨닫는다. 사람이라는 존재는 생각보다 더 자주 그리고 깊이 나르시시즘에 자주 빠진다. 이러한 상태에서 쓰는 비평과 비판은 온전하기 힘들다. 그러므로 사람은 비평이나 비판하고자 하는 대상을 최소한 나보다 더 사랑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사랑을 배워야 한다. 그래야 능력이 되지 않을지라도 최소한의 자격요건이 구비될 뿐만 아니라 적어도 위증죄는 피할 수 있다.
글을 쓰는 분들께 함께 이 제로섬 게임을 끝내자 이야기하고 싶다. 0 끼리 만나서 뭐 어쩌자는 당신에게 답한다. 0과 0을 이산적으로 더하면 무수한 0의 합도 지루한 0일뿐이지만 이를 이을 수만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이는 무한이요. 끝나지 않을 뫼비우스의 순환이 될 것임을 믿는다고. 그렇게 사랑은 진부함을 벗어던지고 다시 한 번 혁명의 동사가 될 것이다.
설날을 맞아 한 새해인사가 길어졌습니다. 다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