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더 나은 Me Too를 꿈 꿀순 없을까

이윤택 연출가의 사과와 오이디푸스의 비극 그리고 작은 바람

by 변민욱
“4년 만에 나타나 고소를 한 게 아니라 고소 한 번 하는 데 4년이나 걸린 겁니다.”
(2013년 김기덕 감독에게 성폭력을 당한 A 씨의 기자회견 中)


진부한 수수께끼로 글을 열어보려 합니다. 그러나 다른 대답을 기대합니다. 스핑크스가 질문을 던집니다. '21세기 한국에서 아침에는 네 발, 점심에는 두 발, 저녁에는 세 발인 것은 무엇인가?' 바로 한국 사회의 여성이 아닐까. 삶뿐만 아니라 하루에도 수 십 번씩 이와 같은 수수께끼가 반복된다. 우리는 이 수수께끼의 결론은 비극이다. 이 비극 속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오이디푸스 이야기에서 비극이란 결말과'인간'이라는 정답만 외우는 바람에 지나친 것들이 많았다. 질문자와 답변자의 관계와 질문 속 철학을 간과하고 있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다시 한번 인간이란 정답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스핑크스가 '인간'을 정답으로 인정한 까닭은 지금까지 제가 갖고 있던 생각보다 조금 더 깊은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오이디푸스는 두리뭉실한 답을 했다. 스핑크스는 이 인간이란 대답을 "그것은 인간(그중에서도 특히 나 오이디푸스이고, 나 역시 운명적으로는 스핑크스 너와 같은 괴물이다)이다"라고 여겼기 때문에 패배를 인정한다. 사실 스핑크스의 질문에 대한 정답은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와 비슷하다. 하지만 이후 스핑크스를 이긴 오이디푸스의 비극은 위와 같은 인식(나=괴물) 하지 못했기 때문에 시작된다. 이 이야기를 사회적 비유로 소비해보고자 한다. 극단이란 시스템 속에서 괴물이 되어버린 21세기 한 남성에 대한 이야기다.



연출가 이윤택 전 연희단 거리패 예술감독이 기자회견을 열고 공개 사과했다. 그는 기자회견에서 "피해자 분들에게 진심으로 사죄드린다. 부끄럽고 참담하다. 법적 책임을 포함해 어떤 벌도 받겠다"라고 밝혔다. 여기까지는 전형적인 사죄의 서두 형식을 따른다. 하지만 문제가 생기는 지점은 그다음이다. 그는 뒤이어 "극단 내에서 18년 가까이 관습적으로 한 나쁜 행태라고 생각한다." "어떤 때는 나쁜 죄인지 모르고 저질렀고 어떤 때는 더러운 욕망을 억제하지 못했다"라고 말을 이었다. 들으며 '아름답지 못하다'라는 생각이 바로 들었다.



그의 말은 아름답지 못했다. 진솔한 말인지는 모호하며 확실하게 윤리적이진 못했다. 어떤 사건에 대해 '관습적'이라 표현하는 것은 가해자와 피해자를 동일선 상에 올려놓고 바라보는 데 실패한 발언이기 때문이다. 폐쇄적인 집단에서 악폐습은 이렇게 유산이 되어 대를 잇는다. 이 논리의 기저에는 '나와 너의 차이는 자명하다'라는 논리가 깔려있다. 수식어구를 제하면 자아의 방어기제의 소산일 뿐이다. 이 방어기제에 대한 원리를 조금 더 자세하게 알아볼 필요가 있다.



미투 운동과 같은 거대한 사회의 바람이 일어날 때 과거 치부를 숨기고 있는 개인은 불안해한다. 자신의 치부가 드러날까 우려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결국 우려가 현실로 교환된다. 치부가 드러나면 개인은 두려워한다. '어디까지 밝혀질까?'다. 하지만 이내 이 두려움은 억울함으로 변모한다. 그에게 억울함을 느끼게 하는 현실은 인과관계의 불가해성이다. '하필 왜 나에게만?'과 같은 의문이다. 이럴 때면 자아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방어 기제를 필사적으로 만들어낸다. 이런 방어 기제는 보통 합리화의 논리를 빌려온다. 자아는 필연성에 대한 논리구조를 절박하게 수립하고 결사적으로 정당화해야 한다.



문제는 이 정당화는 상당히 주관적이라는 점이다. 이 깊이가 깊을수록 문제 해결과는 낙차가 커진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주관적 정당화가 상대에게는 폭력이 된다. 왜냐하면 자아는 생존을 위해 정의로운 길을 택하기보단 연약해진 주체를 다수 속에 숨기려 하기 때문이다. 해결을 위한 방책이기보다는 페르소나를 쓰고 도피하는 도피책에 가깝다. 위와 같은 관습적인 성의식이 바로 그 예다. 이런 문제에서 소수적인 것과 다수적인 것은 꼭 수량에 좌지우지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성질로서는 폭력적인 개인이 횡포를 부리며 다수적인 성질을 띠게 되고 그동안 수적으로 다수였던 피해자들은 점점 수수적인 것이 되어버린다. 비단 이 사태뿐만 아니라 학교폭력과 같이 이 사건과 맥락을 공유하는 대부분 사회문제에까지 적용 가능한 민주 사회 속 눈물겨운 다수결의 원칙이다.



그의 말은 '극단의 현실이 이랬다'라 들린다. 그 또한 오이디푸스가 그러했듯 자신의 영민함과 권력을 향유하다 눈이 멀었고 괴물이 되어버렸다. 슬라보예 지젝의 표현을 빌려 그가 말한 현실과 봐야 했던 실재를 구분코자 한다. "현실(reality)은 상호작용과 생산과정 연루된 현실적 사람들 사회적 현실이다. 반면 실재(the real)는 사회적 현실 속에서 진행되는 것을 결정하는 자본 냉혹하고 '추상적인' 유령적 논리이다."(슬라보예 지젝, 「까다로운 주체中 ) 그는 '관습적이었다'라는 말속에 그릇된 성의식을 숨긴다. 커튼을 걷어라. 사죄는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돼야 하며 이것이 실패했기 때문에 그의 사죄는 아버지를 죽일 운명을 안고 태어났다. 그가 보여줘야 했던 윤리는 현실이란 커튼 뒤에 가려진 그의 실재를 인식했을 때 가능한 것이었다.



그가 말하는 현실은 또 어떠했는가. 관행이란 미명 하에 숨겨진 시스템은 공평하지도 안정적이지도 않다. 가끔 토크쇼에 나오는 극단 출신 배우들의 말을 들어보면 연출자의 권력이 상당함을 알 수 있다. 자신의 생존에 직결된 연출자에게 찍히면 그 배우의 출연뿐 만이 아니라 배우로서의 인생도 생존을 장담하기 어렵다. 더욱이 위와 같이 유명해진 배우가 아니라 신인이나 무명배우라면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이러한 시스템 속에서 겨우 연기를 해나가더라도 비극은 그녀를 놓아주지 않는다. 연기는 기본적으로 육체적인 활동이다. 그 때문에 신체접촉이 빈번하고 일상적이어서 성추행과 같은 위험성이 크다. 더욱이 극단은 대형 뮤지컬에 비해 폐쇄적이기 때문에 피해마저 은폐되기 십상이다.



미투 운동이 전 세계적인 운동이 된 것은 어제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사유의 공유는 전 세계적으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고 참여도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그 흐름을 바라보고 해결책마저 전 세계적으로 자연히 이뤄질 거라 기대해선 안된다. 40대, 50대 이미 높은 사회적 지위가 있는 그녀들이 뛰어들어 지류를 받아들였다. 흐름이 단순한 지류를 너머 주류가 되기 위해선 동참을 이끌어내야 한다. 또한 세계적 흐름에 탐닉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흐름에 놓인 허들을 넘어서기 위한 시도 자체는 국지적으로 철저하게 시도되야한다.'미래에 혹은 누군가가 해결해주겠지? '라는 믿음은 버려야 한다. 적어도 내가 살아오고 겪어온 한국에선 이 흐름이 더 이상 빌어올 미래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윤리를 이야기하고 필사적일 수밖에 없다.



나에게도 여성은 절대적 타자다. 김훈의 소설이 내게 알려주었던 타자론처럼 이성적인 측면에서는 이해란 불가능의 영역에 속한다. 그러나 늦었지만 이젠 멀어버린 눈을 찌를 시간이다. 실명하면서 나는 다른 곳을 바라보려 한다. 이해가 불가능하다 포기하거나 더욱이 충분히 이해했다고 자신하지 않아야겠다. 타자에게 이해는 가장 완곡한 오해이기 때문이다. 그 대신 그 가운데서 신중하게 바라보겠다. 현실을 바라보는 두 눈을 과감하게 찔러 실재를 목도하며 그 목소리를 경철 하겠다. 그리고 카버의 '대성당'에서 장님에게 배웠든 눈을 감고 새롭게 보는 법을 배울 것이다.



이윤택 연출가뿐만 아니라 언급되는 인물들 중에 고은 시인뿐 만아니라 여러 작가들이 있다. 가장 윤리적인 말을 담아내야 할 문학마저 타락했다면 나는 누구에게 기대야 하는가. 작가뿐만 아니라 교수를 비롯한 평론가까지 자성의 목소리를 쏟아내지만 고개를 끄덕이기 이전에 충격이 한 걸음 빨리 다가온다. '작품은 별개이다.'라고 말을 하지만 그 작품 또한 그들의 손을 통해 탄생한 것이 아닌가. 진실을 써내려 갈 것인가. 허위를 쌓아나가며 벽을 만들 것인가. 피해자가 SNS를 SOS삼아 상처를 내보이며 증명하기 이전에 가해자들이 먼저 자성하며 진실을 고백하며 사과하는 또 다른 Me Too는 될 수 없는 것인가.


캡처.JPG 출처(http://news.donga.com/View?gid=88744127&date=20180220)



그들이 작품에서 논했던 '윤리적인 것'은 이 쪽에 더 가깝지 않은가. 문학에서 나는 윤리란 도망치는 자는 소유할 수 없으며, 오히려 실재에 대해 비난당하고 패배할 것을 알면서도 진실되게 이를 감내할 때 겨우 지켜질 수 있는 처절한 패배의 전리품이라는 것을 배웠다. 아직 무지하고 부족한 나는 읊조릴 뿐이다. 하지만 '사죄는 당사자에게 자수는 경찰에게'는 자명해 보인다. 이러한 사죄 방식으로 사죄할 시기는 이미 훌쩍 지나왔다. 상흔이 동일하지 않으며 상처의 내용은 같을지언정 방식과 시기는 달랐기 때문이다. 최소한 사죄는 당사자에게 행해져야 한다. 지켜져야 할 최소한의 사죄 윤리다. 이 결론이 앞으로 이뤄질 사죄의 서론이 되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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