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역습

우리는 '언어를 사용하는가' 혹은 '그 안에 갇혀 있는가'

by 변민욱


0. 글을 열며


눈 앞에서 얼음이 녹아내린다. 당신에게 묻는다. 그것은 얼음인가 물인가. 그것은 얼음이다.라는 대답은 얼음이란 구조 속에서 물이란 유기체를 간과한 답이다. 이와 반대로 그것은 물이다.라고 답한다면 이는 구조 속 유기체를 과대평가한 답이다. 그래서 우린 적당히 언어와 타협한다. '얼음이 녹는 중이다'라는 모호한 말로. 이렇게 말은 종종 과녁을 명중시키지 못한 체 미끄러지고 녹아내린다. 나는 지난 글에서 통역을 해본 적이 있다고 말했었다. 통역의 사전적 의미는 다음과 같다. '말이 통하지 아니하는 사람 사이에서 뜻이 통하도록 말을 옮겨 줌.'이다.


네가 말하면 나는 듣고 제3자에게 전달한다. 그렇게 너는 나 이외의 또 다른 타자와 대화한다. 그러나 이것은 과연 소통인가? 통역의 과정에서 종종 나의 말은 다른 의미로 둔갑한다. 혹자는 내게 당신이 능력이 부족한 탓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타당하다. 그러나 이 문제가 나와 당신, 그리고 우리의 문제가 된다면 그들 또한 반문해봐야 한다. 일상의 사소한 표현조차, 당신을 가장 잘 이해한다고 믿는 사람에게 마저 당신은 통역을 필요로 하고 있지 않은가?


물고기는 물속에 산다. 인간은 언어 속에 산다. 이 말속에는 흔히 간과하는 오묘한 주종관계가 은폐되어 있다. 이 문장 구조는 마치 '물고기'(인간)이 '물'(언어)을(를) 사용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실상 물고기는 물이 없으면 생존하지 못하고 인간 또한 그러하다. 그러나 그 역은 성립하는가? 물고기와 인간이 없으면 물과 언어는 살아남지 못하는가? 그러므로 이렇게 생각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물고기는 물속에 갇혀있고 우리는 언어 속에 갇혀있다.




1. 표백사회와 진공상태


인간은 기이한 존재다. 착취당하면서까지 헛된 낙관론과 우둔한 우월감을 결코 버리지 못한다. 그러나 위와 같은 사고 속에서 권력의 주종관계는 전환된다. 말(言) 앞에서 인간은 말(馬)이요. 말(言)이 인간(人間)이다. 우리는 말이란 기수가 보여주는 세상만 볼 수 있는 말이다. 그 너머는 아득한 무의미다. 나름의 사유로 짐작은 할 수 있더라도 구체화엔 매번 실패한다.


이런 비참한 현실을 벗어나고자 사회라는 마구간을 벗어나려 해도 소용이 없다. 남들에게는 그저 미쳐 날뛰는 것처럼 보인다. 공허한 거리에서 이제 무슨 노래를 할 수 있겠는가. 당신은 울부짖다 마구간으로 돌아간다. 이곳은 당신을 위한 보편적 무덤이다. 1984는 흔히 전체주의에 대한 디스토피아(dystopia) 소설로 읽힌다. 이 디스토피아에서 나는 언어에 대한 맹신((盲信))과 망상(delusion)을 희망과 교환해보려 한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입밖에 내는 소리는 죄다 들리고, 캄캄한 때를 제외하고는 일거수일투족 빠짐없이 탐지된다는 전제 아래 살아야 했고, 또한 그것이 본능이 되어버릴 만큼 습관이 되어 있었다. (p.9)


한 남자가 당에 맞서 싸운다. 그는 최후의 이간이다. 외로이 투쟁하는 상대는 빅브라더. 다음과 같은 슬로건을 내세운다. '과거를 지배하는 자는 미래를 지배한다. 현재를 지배하는 자는 과거를 지배한다.'당은 권력유지를 우해 사회를 진공상태 화한다. 대기 중에서 사고, 우정, 자유는 지워진 지 오래다. 이 결핍은 또 다른 결핍을 낳는다. 차례로 사상, 사랑, 혁명이 자연스레 멸종한다.


말끔하게 표백된 이사회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영사(영국식 사회주의)가 망령처럼 떠다닌다. 그리고 이 바깥은 없다. 이것이 당의 목표다. 진공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텔레스크린이 보고 마이크로폰이 듣는다. 거리에는 사상경찰이 활보한다. 집으로 들어가니 끔찍하게 귀여운 아이들이 있다. 그들이 부모를 감시한다.


저 애새끼들 때문에 그 비참한 부인은 평생을 공포 속에서 지내야 할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1,2년이 지나고 나면 아이들은 이단의 낌새를 채고 밤낮으로 저희 어머니를 감시하게 될 것이다. 오늘날에는 아이들 거의가 무서운 존재였다.(p.35)


다시 한번 '어디에도 있음'으로서 바깥을 없앤다. 또한 사유의 여지를 지워나간다. 우리는 '생각'이란 것을 너무 과신한다. 아무리 말살시키고 진공상태여도 개인의 사유만큼은 어쩌지 못할 것이라 믿는다. 모든 회의의 끝에서도 '생각하는 나'는 부인할 수 없었던 것처럼. 패배한 최후의 인간도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 또한 자신에게만큼은 진리와 정의, 아름다운 사랑은 인화성도 휘발성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놈들한테 유일하게 불가능한 게 그 일이에요. 당신에게 무엇이고 자백하게 할 순 있어요. 무엇이든지요. 그렇지만 당신이 그 말을 믿게 할 수는 없어요. 당신 속까지 파고들 수는 없다고요." (p.361)

윈스턴 역시 처절하게 실패하고 만다. 이제 순결을 버린 그에게 이중사고가 스며든다. 개인 스스로가 과거와 진실을 부인한다. 그 대신 그 빈 공간을 날조된 사실로 채운다. 제 자신이 위와 같은 사고를 했다는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이중사고의 끝이자 시작이다. 이 뫼비우스의 띠 속에서 당은 투쟁해야 할 어떤 것에서 사랑하는 절대적으로 연인의 모습으로 변모한다. 소설 말미에 마지막 인간 윈스턴 또한 증오했던 빅브라더를 사랑하며 죽을 날을 기다린다.



2. 고로 너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당은 어떻게 사람들의 생각까지도 말살시키는가. 인간을 가두는 언어를 통제한다. 그들은 신어를 만들면서 구어를 없애나 간다. 이제 큐브가 인간들을 향해 좁혀져 온다. 신어의 특수한 기능은 창조보다는 파괴에 있다. 전체적인 어휘의 수는 감소하면서 수많은 단어를 대체한다. 내포된 단어는 고유의 의미를 상실한다. 신어의 파괴는 정확성보다는 포괄성에 집중한다.


이를 통해 언어의 경제성은 통제의 경제성으로 에너지가 전환된다. 점점 이단적인 것은 지각할 수 없는 영역으로, 추구할 수는 있지만 구체화는 불가능한 어떤 것이 된다. 통제를 넘어서는 단어가 엇기 때문이다. 그렇게 언어도 정권도 교묘하게 수정되면서 영속한다. 신어는 말한다. "너는 존재하지 않는다"


공기처럼 느껴지고 자주 언급되는 '자유'마저도 이 단어가 존재하기 때문에 떠올릴 수 있다. 종이와 펜 같은 단순한 명사에서부터 '옳다', '그르다'와 같은 가치판단의 영역까지 언어는 우리의 사고를 지배한다. 개인에게 허락된 여지는 그저 그 단어를 가져다 쓰는 자율 정도다.그보다 조금 나은 사람은 문장을 구성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지 모른다. 여기까지 고개를 끄덕였다면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사고와 가치판단에 이르기까지의 행위가 '주체에 의해 행해지긴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언어 구조에 갇혀 있다는 결론이다.


이는 곧 도한 우리가 사유 및 판단을 하기 위해선 이 구조를 불가피하게 따라야 한다와 동치다. 우리는 언어의 사회성을 지키라는 그와의 근로계약을 충실히 이행한다. 때문에 '나는 내가 존재하지 않은 곳에서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가 성립한다. 무력할 뿌만 아니라 사유, 의심조차 하지 못하는 개인은 거대한 당에 대항할 수 없다. 다음 문장 자체에서 느껴지듯. '당의 언어로 당을 비판해봤자다.' 문장에서도, 시스템 속에서도 개인은 당을 이기지 못한다. 자신이 부쉈다고 믿는 그 벽돌에 개인은 함몰되고 말 것이다.



3. 글을 마치며


결론을 맺자. 이런 사고와 사회 속 언어는 태어나며 오이디푸스와 같은 신탁을 받았다. 아버지(구어)를 죽이 어머니(사용자)와 결혼한다. 언어는 웃으며 외치고 있을지도 모른다. "오오 불행한 분이여, 그대가 누구인지 결코 알게 되지 않기를" (오이디푸스 왕 1068행) 오이디푸스의 비극은 그 자신의 움여을 보지 못한 체, 말을 너무 많이 해버렸기 때문에 시작된다.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하지 않은 체 말이다. 우리는 언어 속에서 사유하며 동시에 갇혀있다. 덫에 걸려있다고 비유하면 비약이 되어버릴까. 그 덫에서 우리를 언어가 유혹한다. 그래서 우리는 불안해한다. 그 불안 속에서도 수많은 발화를 생산해낸다. 이 두 서사는 어딘가 비슷하다.


언어의 비극을 끝내기 위해선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을 우선 구분해야 한다." 그러니 애오라지 '우린 할 수 있고 세상은 아름답다'라 말하는 것은 거짓이며 위선이다. 오히려 위악이란는 비판을 받으면서까지 '모순만이 유일한 진리다'라고 비명을 지르는 것이 진실이다. 그 자는 말을 하면서도 절망하며 의심을 계속한다.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주종관계의 비참함을 알고 조심스럽게 삶의 의미와 무의미, 비참함과 아름다움을 써 내려간다. 그러므로 편안함에 속아선 안된다.


흔들리지 않는 편안한 것은 당신 침대 하나로 족하다. 편안함은 대체로 무언가를 은폐하기 때문이다. 언어를 의심하는 시들이 있다. 실험적이라고 보통 평가되는 이들은 최지우 시인이 말했던 "나는 말할 수 없음으로 양식을 파괴한다. 아니 파괴를 양식화한다"라는 언명을 따르는 신도(信徒)들이다. 그들은 무신론자다. 믿지 않음으로서 믿는다. 그들을 따라 이제 언어를 성좌((星座))에서 끌어내리고 그 옛날 한 철학자처럼 의심을 시작할 때다. 모더니즘을 써 내려갔던 이상이 노래했듯 "갔다 와야 한다. 갔다 비록 못 돌아오는 한이 있더라도 가야 한다." 자칫 허무한 결론에 이를 수도 있다. 이 또한 구조 내부에서의 투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허무로부터 우린 종종 가장 충실하게 삶의 지혜를 배운다. 또한 허무를 배웠으니 우리는 어디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사족이지만 저번 글에도 오이디푸스를 썼는데, 사실 이 글이 먼저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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