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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변민욱 Mar 05. 2018

<로건럭키> 그러나 이것은 케이퍼 무비가 아니다

<브런치 무비 패스#1> 스스로를 넘은 또 다른 스티븐 소더버그의 영화다

 

0. 글을 열며


 케이퍼 무비는 범죄 영화의 하위 장르 중 하나로서 절도 및 강탈 행위를 하는 과정을 주로 다룬다. 어떻게 도덕적인 사람들이 이런 범죄영화에 열광하는가. 우선 이것이 영화 즉 픽션(fiction)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범죄행위 장면을 보더라도 우리의 도덕 감정이 과잉으로 발산하진 않는다. 더욱이 이러한 난점을 넘어서기 위해 요즘 난해하거나 잔인한 장면에 종종 감독들은 상황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클래식이나 신나는 노래를 곁들이기도 한다. 이러한 장치로 인해서 우리의 감정의 스코프는 이런 도덕보다 다른 것에 집중하게 된다. 우리는 수천억을 훔치는 도둑들을 보면서 통쾌함을 느끼다가도 수 억을 뇌물로 주고받는 행위에는 분노한다. 범죄라는 하나의 파동이자만 전자는 영화 속 여러 장치들과 현실에서 일어나기 힘들다는 점에서, 후자는 평소에 우리가 느꼈던 분노의 감정을 그려낸다는 점에서 각각 통쾌함과 분노의 감정의 파동으로 나뉘어 마음을 흔든다.  


 그러나 이러한 이차원적인 요소들이 전부가 아니다. 우리가 사는 삼차원으로 의미를 넓혀보자. 현대인들은 도시 속에, 자본 속에, 도덕 속에, 사회적 시선 속에 살고 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갇혀있다. 여기에 이런 영화가 흥행하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케이퍼(caper)란 단어에서 우리는 '벗어나다, 탈출하다(escape)'를 찾을 수 있다. 현대인들은 이 속박에서 벗어나고(escape) 싶어 하면서도 동시에 떠나지 못하는 노동자이자 수용자다. 케이퍼 무비는 적어도 100분 동안이나마 이 케이퍼(caper)적 욕구를 충족시켜준다. 우리는 이 충족이 들어오는 과정을 '시원하다'라고 표현하며 소화되는 과정을 '통쾌'라고 부른다. 그렇게 현대 영화의 지류는 순식간에 주류가 됐다. 이러한 흐름을 창시한 스티븐 소더버그는 이 영화를 통해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돌아왔을까.






1. 로건 징크스 깨부수기

 지미 로건(채닝 테이텀)은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회사에서 해고를 통보받는다. 한쪽 다리를 절기 때문이다. 물론 업무엔 지장이 없지만 윗분들이 보시기 불편하다는 것이 해고 사유다. 격분해 동생이 운영하는 술집으로 향한다. 그의 동생 클라이드 로건 (아담 드라이버)가 소개된다. 그는 바텐더다. 하지만 한 손이 없다. 그를 '외팔이'(one-armed person)이라고 부르는 손님의 말을 그는 정정한다. 그는 팔꿈치 아래가 없을 뿐이지 외팔은 아니라고 말한다. 로건 형제에게 손상 입은 것은 신체뿐만이 아니다. 가정 또한 정상적이지 않다. 모두 조금씩 상처를 입는 이들의 공범이 된다.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함을 알기 위해선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여태껏 케이퍼 무비에는 항상 환상(fantasy)에 가까운 가히 환상적인(fantastic)한 인물들이 등장해왔었다. 외모나 몸매 같은 외형적인 부분에서부터 천재적인 두뇌의 해커 스파이와 같은 캐릭터들의 전유물이었다. 이러한 전형성을 벗어난 인물을 통해 감독은 스스로 세운 전형성을 무너뜨리며 이야기하고자 한다. '선입견을 버려라'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자'다.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범죄자들이라 하면 흔히 어떤 생각이 드는가. 보통 그들은 비도덕적이고, 불순하고, 어울리면 안 되는 인생의 패배자요 사회악으로 간주된다. 물론 범죄 자체는 객관적이고 공평하게 심판되고 처벌되어야 한다. 그러나 한 번도 우리는 이들을 정확하게 보려 한 적이 없다. 우리 또한 이들처럼 선입견이란 감옥 (frame) 안에 갇힌 체 감옥(prison)에 갇힌 이들을 보았다. 조금은 부족해 보이는 인물들을 통해서 친숙함을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이들에게도 돌아갈 가정이, 나눌 사랑이 있음을 우리에게 보인다.

 

 정확히 본다는 행위의 충격은 다음과 같은 다이너마이트를 실현시킨다. 곰돌이 젤리와 펜, 진공관을 이용해 조 뱅(다니엘 크레이그)은 다이너마이트를 만들어낸다. 화학식으로까지 써내려가며 그의 믿으라는 필사적인 몸부림을 보면서도 한편으론 계속해서 의심했었다. 로건 형제와 같이 그를 제외한 모든 극장 속 사람들이 그를 의심한다. '논리적으로 어떻게 저게 가능해?'라는 합리적 의심이었다. 그러나 방금 나는 화학식으로 그가 이미 관객에게 가능함을 (영화 속이지만) 보였다고 말했었다. 그리고 그들은 결국에 성공한다. 이제 아까와 같은 의구심을 가졌던 사람들이 반문을 당할 차례다. 당신의 선입견은 위와 같은 명쾌한 화학식으로 증명이 가능한가. 증명할 수 없다면 이 다이너마이트에 같이 폭파시킬 차례다.


 또한 이들이 원래 범죄자이기 때문에 한 탕 털고 나서 우리는 흔히 이들이 자기 잇속을 채울 것이라 생각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들이 영화 속에선 비도덕적일 순 있어도 비윤리적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들은 '비도덕적=비윤리적'이라는 부등호를 오히려 범죄를 성공시킴으로써 보여준다. 때로는 비도덕적인 인간이 윤리적일 수도 있다. 그들은 한 탕 턴 돈을 밤죄를 시작하며 파손시킨 슈퍼 앞에 고스란히 둔다. 또 파상풍 주사를 놔주었던 비영리 단체에 기부하기도 한다. 오히려 이 과정에서 의도치 않게 동네 익명의 바보이자 영웅이 되고 레이싱장의 횡령을 고발한 격이 된다.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2. Take Me Home, Country Road


Almost heaven West Virginia
Blue Ridge Mountains Shenandoah River
Life is old there older than the trees
Younger than the mountains
Growing like breeze

Country road take me home
To the place I belong
West Virginia mountain mama
Take me home country road

All my memories gather round her Miner's lady
stranger to blue water
Dark and dusty painted on the sky
Misty taste of moon shine
Teardrop in my eye

(John Denver, Take Me Home Country Road 中)


 이들의 바보스런 범죄행각을 보도하는 뉴스를 보며 미용실 손님이 묻는다. "왜 (돈을) 가져가지도 않았대?" 멜리 로건(로건 형제의 여동생, 라일리 코프)이 답한다. "쫄았나보죠." 영화를 보던 중에는 스쳐가듯 지나갔던 장면이자 대사였다. 하지만 리뷰를 쓰며 생각해보니 이 대답은 단순한 농담이나 유머가 아닌 통찰력 있는 대답이었다. 사람은 언제 소위 말하는 '쫄(졸)'게 되는가? 분명한 것은 혼자 허름한 옷차림에 땡전 한 푼 없을 때는 아니다. 그보다는 필사적으로 지켜야 하는 사람 혹은 물체가 있을 때이다. 이러한 감정은 비겁하다고 생각될 수 있지만 진실되므로 아름답다. 그러므로 쿨하게 인정하자. 지미 로건은 쫀 것이 맞다. 그의 딸을 만나러 가야 하기 때문이다.


 초조하게 공연 순서를 기다리며 그의 딸(파라 매켄지, 극 중 새디 로건)은 자꾸 묻는다. 아빠가 왔냐고 말이다. 공연 순서가 돼서 올라가지만 아빠는 (아직) 오지 않았다. 침울하게 노래를 준비하던 딸은 이내 아빠를 발견하곤 노래를 바꾼다. '리한나'의 <umbrella>를 부를 예정이었지만 곧장 우산을 내려놓고 아빠를 보며 노래를 바꾼다. 아빠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인 동시에 가장 필요한 노래인 '존 덴버'의 <Take Me Home, Country Road>이다. 그래서 딸은 짙은 화장이 이 노래에 어울리진 않지만, 연습하지 못해 음정이 다소 불안하긴 하지만 노래를 이어나간다.


 이제 화려한 레이싱 트랙을 달릴 때도, V9 스틱의 스포츠카를 탈 때도 아니다. 무법자(desperado)였던 그의 아버지는 이제 집으로, 딸의 품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시골길을 따라, 실패작으로 치부되는 오래된 포드 차를 타고 말이다. 한 탕 끝내고 남주로 내려간 아버지는 딸과 재회한다. 이와 더불어 마지막 장면에서는 범죄자들에게는 흔히 사랑이 없을 것이란 선입견까지 부순다. 그들은 각자 그러나 모두 사랑에 빠지고 사랑을 하며 영화의 막이 내린다. 엔딩크레딧이 끝가지 올라가면 이제는 우리가 눈 앞에 놓인 막이자 커튼을 걷을 차례이자,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3. 글을 마치며


 평을 살펴보았다. 케이퍼 무비치곤 약했다는 평이 많았다. 더욱이 배우진(채닝 테이텀, 다니엘 크레이그 등)을 생각해보면 내 생각에도 기대했던 큰 한방이 없었다. 더욱이 감독이 이러한 장르를 개척한 <오션스>의 '스티븐 소더버그'아닌가. 그러나 화려한 스케일의 액션과 케이퍼 무비 특유의 유머를 기대한다면 이 영화는 조금 실망스러울는지도 모른다. 포스터와 예고편과 달리 그런 장면이 영화 속에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비판이 나올 수밖에 없음에 나는 동의한다. 그러나 평을 하는 입장에서는 그러한 것들이 빠진 결핍에 무엇을 보충했는지를 봐야 한다.


 감사하게도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은 그 결핍을 너무나 충실하고 바람직하게 감독은 채워 넣었다. 사실 케이퍼 무비라는 영화의 문법이 흔해지며 동시에 진부해졌다. 너무나 많은 변주곡이 나왔고 원형(prototype)은 전형(typical)적인 것을 형성하면서 생명력을 차츰 잃어갔다. 전형성 안에 예술이 갇히게 되면 이는 안전한 예술이 되어버린다. 예술의 아름다움은 본디 내면의 위험성으로부터 기인한다. 안전한 예술은 그 전형성이란 울타리 안에서 보호받거나 어느 정도의 성공은 거둘 수 있겠으나 결코 그 울타리 밖으로 나가자는 이야기를 하진 못한 채 스스로 그 안에 갇히고 만다. 이러한 예술은 이제 더 이상 특별하지 않으며 예술이라 부를 수 없게 된다.


 이러한 입장에서 감독의 편에서 생각해본다. 창시자는 비판과 비난을 미리 예상하면서도 조금은 이 피조물에 새로운 지평을 넓히려 시도한 작품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새로운 장르를 위해 저런 결핍은 불가피하다. 그는 전형성이라는 스스로의 로건 징크스를 부신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굳이 장르를 따져본다면 그의 케이퍼 무비가 아니다. 스스로 만든 장르를 스스로 넘어선 또 다른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의 영화다. 그러므로 비판은 잠시 거둬두고 힘찬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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