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되는 승자의 용서와 화해에 관하여
영화는 한 여인(로자 머드 파이크)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영화 도입부에서 그녀의 가족은 인디언들에게 몰살당한다. 이후 장면이 전환된다. 한 남자(크리스천 베일)가 인디언들을 사냥하고 있다. 그의 절친들은 또 다른 남자인 인디언 추장(웨스 스투디)에게 죽임을 당했다. 이들 모두가 몬태나를 향하는 1,000 마일의 여정을 함께한다. 여정 중 서로가 적 앞에 협력하면서도 동시에 사슬을 채우고 총을 겨눈다.
하지만 미국의 군인들 또한 그들끼리, 인디언들 또한 그들끼리 서로가 서로를 죽인다. 이전까지도 이와 유사한 이야기를 한 문학과 영화는 많이 있었다. 이런 이야기가 모순적으로 느껴지는가. 그러나 나는 여태껏 어떤 영화나 서사도 과거 미국인들과 인디언들의 역사와 그들에 대한 정책 그리고 현재 상반된 처지보다 모순적이라 느껴본 적 없다. 모순에 대한 자기모순(self-contradiction)을 통감했다면 이제 영화를 그리는 행위 자체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영화에서 과거의 이야기를 이야기하는 방법은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과거 있었던 일을 세밀화를 그리듯 찬찬히 그러나 명확하게 그려나가는 묘사가 하나요. 방향성은 둘째 치더라도 과거를 묘사하며 이용하려는 묘사가 둘이다. 전자의 방법을 택한 감독은 과거를 똑바로 목도하며 참혹하더라도 어떠한 것을 말하겠노라 이야기한다. 후자의 방법을 택한 감독은 내가 과거를 통해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보겠다고 관객들에게 이야기한다.
전자의 방법은 윤리의 문제가 후자에 비해 일차원적으로 발생한다. '그가 그럴 자격이 되며 올바르게 보았는가' 또한 '이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가 문제가 된다. 하지만 두 번째 방법의 문제는 단순하지 않다. 그는 위와 같은 자격요건을 충분히 상회하면서도 그가 만들어낸 세계와 세계관 또한 윤리적이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다수는 정답을 끊임없이 재생산하지만 그 정답이 옳은 답은 아니다. 그가 학습한 사회의 정답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다수의 영화는 정답을 관객에게 모범답안으로 제시한다. 마땅히 이렇게 사고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호평이 이어진다. 오히려 문제작이란 불순한 오답으로 여겨지는 명제를 던지곤 필사적으로 방어하여 옳았음을 증명하는 작품이다. 이런 맥락에서 몬태나는 또 다른 정답의 반복이었다.
이러한 정답 아래서 관객이 어느 한 편을 확고히 지지할 수 있는 영화는 편안하다. 관객은 상영시간 동안 편안함이라는 객석에 앉아서 한 편을 지지하며 그 반대편을 마음껏 힐난하면 된다. 그러나 그뿐이다. 편안함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닐 때에는 관객에게 그 이외것을 안겨다 주진 못한다. 그러니 무엇을 말하고자 할 때는 더욱이 그들을 설득코자 한다면 어느 정도 불편함을 담고 있는 서사여야 한다. 앞서 영화 도입부와 같은 서사 속에서 관객은 불편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이 불편함은 어느 한쪽의 편도 들 수 없기 때문이다. 인디언의 편에 서고자 하는 도덕적 자아는 영화 도입부 초반 잔인하게 한 가정을 몰살시키는 인디언들을 목도하며 설 자리를 잃는다. 그 반대편의 편에서 미국인들을 연민하려는 자아는 인디언을 사냥하는 장면과 피로 쓰인 미국의 초기 역사를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자리에 쉽사리 서지 못한다. 이제 문제는 이 고조시킨 불편함으로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가'다.
그러한 측면에서 이 영화는 한 껏 쌓아 올린 불편함을 허무하게 소실시키고 말았다. 이를 위해 영화의 엔딩에 관하여 이야기하고자 한다. 영화의 엔딩 장면에서 떠나는 기차 앞에서 인디언 추장 옐로우 호크(웨스 스투디)의 손녀와 로잘리를 조셉 대위(크리스천 베일)는 배웅한다. 떠나는 그들을 보다 결국 그가 뒤늦게 기차를 올라타는 장면을 감독은 천천히 그리고 오래도록 비춘다. 결국 이 영화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와 화해'라는 결말을 택한 것이다.
신선한 불편함의 서사에서 기인한 내 기대감은 익숙한 편안한 결말로 인해 좌절되었다. 영화관을 나오며 다음과 같은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어릴 적 동화에서 읽은 '갖은 역경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를 비롯해서 우리는 여태껏 수많은 용서와 화해의 결말을 봤었다. 하지만 당신과 나는 동화책을 닫아버린 이후로는 그러한 이야기를 듣지도 겪지도 못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이 서사를 인디언과 미국에 대입시키다니. 오히려 나는 솔직히 영화 중간중간 용서와 화해 장면 바로 다음 살육의 장면이 나오는 것이 더 마음에 들었다. 그것이 오히려 그 역사의 본질에 가깝지 않은가. 그리고 묻는다. '그 용서와 화해의 주체는 누구인가?'
그 주체는 바로 승자들 아닌가. 그들은 승리 후 용서와 화해를 그들이 짓밟고 무언가를 빼앗은 대상에게 보상으로 건넨다. 자유의 나라이자 어느 방면에서도 세계 최고의 나라라고 자부하는 미국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늘 그렇듯 진실은 반대쪽에 있다. 그들의 현재의 부와 영광은 과거 인디언들의 눈물과 피로 얼룩져있다. 혹자들은 이런 내게 언제까지 과거의 이야기만 거듭할 것이냐고 물을 것이다. 이어서 그들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할 것이다. "이제 화합과 공존을 향해 함께 나아가야 한다." 위와 같은 이야기를 정치인이 아닌 영화가 했기 때문에 나는 이렇게 비판적으로 말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화합과 공존을 이야기하시는 분들은 다음 인디언 보호구역 지도를 보시라.
그러나 지금 현재 승자와 패자가 뒤바뀔 수는 없는 형국이다. 용서와 화해를 하는 주체가 달라질 수는 없을 테니 관객이 달라져야 한다. 문학을 보는 일이 본래 이러해야 할 것이며 수많은 매스컴과 매체를 통해 접하는 소식들이 이러해야 한다. 이를 포기했을 때 세상의 모든 서사는 천편일률적인 승자의 서사일 수밖에 없다. 그와 동시의 이들의 존재가치 또한 소멸할 것이다. 과거의 당신들의 상처를 뚜렷하게 보고 이해하는 일, 결코 자신하지 않으며 오늘날 당신들의 상처 위에 선 그들의 허위와 모순을 지적하는 일이 나와 당신이 해야 할 일이라 믿는다. '몬태나'를 모든 증오가 끝나는 곳이라 영화는 소개한다. 좋다. 그곳에서 모든 비이성적 증오는 끝나고 합리적인 비판은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혹자들은 아름답다 평하지만 나는 결코 그곳을 아름답다 칭하지 않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