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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변민욱 May 05. 2018

[라이크 크레이지] Crazy에서 Patience까지

욕망의 서사

 0. 글을 열며


    보통의 연인들처럼 영화 속 애나는 제이콥과 사랑에 빠진다. 영화 속 서사 또한 유사하다. 하지만 영화의 결말을 보고 나서 당신은 충격에 휩싸여서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라는 결말에 익숙한 당신에게 이 영화의 결말은 '이게 끝이야?'라는 낯섦을 선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환상(Fantasy)이 아닌 실제(Real) 사랑의 결말은 여타의 로맨스 영화보다는 이 영화에 가깝다.


     당신은 결말이 낯설지만 또 익숙함을 이 모순적 감정이 불러일으킨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 이 글에서는 영화 속 몇 가지 소재로 이 영화 속 주인공들의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중심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떻게 사랑의 감정이 Crazy(선글라스)로 시작했다가 lack(비자와 의자)를 통해서 patience(그험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헤어짐)으로 나아가는가'다. 






1. Crazy(선글라스)



    사랑은 '너와 함께라면 나는 어떠한 운명도 이겨낼 수 있어'라는 용기를 심어준다. 이 용기는 광자(crazy)의 용기이다. 사랑에 빠진 이들은 모두 어느 정도 미쳐 있는 상태다. 환상이라는 환각제 덕분이다. 그러나 환상이라는 환각제로 인해서 종종 현실을 지각하지 못한다. 이는 사랑을 지속시키는 힘인 동시에 이를 파멸로 이끄는 도화선이다. 사랑의 서사 속에서 이들에게 때때로 도저히 이겨낼 수 없는 운명의 파도가 덮칠 때가 있다. 그러나 그들은 이 파도가 오고 있음을 지각하지 못한다. 사랑의 운명이 비극으로 향하는 급류에 휩쓸리기 시작하는 때는 바로 이 시점부터다. 

    

     사랑을 나누는 장면 이후 장면이 전환된다. 애나의 비자가 만료되기 전 날이다. 그렇기 때문에 잠시 그들은 헤어져야 한다. 아쉬움 속에서 대화를 하고 있다. 대화의 장면 중 우리는 제이콥은 선글라스를 끼고 있지 않지만 애나는 끼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이 은유적 상태로 인해서 애나는 제이콥과 헤어지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반면 제이콥은 그녀와 대화를 하는 장면에서 선글라스를 끼고 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아쉬워하면서도 그녀에게 떠나는 것을 권유한다. 하지만 그녀를 설득하는 데는 실패한다. 그녀가 아직 선글라스(환상)를 끼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녀'만' 선글라스를 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와 같은 상태로 인해서 그녀는 현실을 바라보지 못환다.


 이 헤어짐으로부터 일시적 도피가 이 둘을 헤어짐으로 이끌게 될 것이다. 







2. Lack(비자와 의자)



    이후 일주일 간 미국을 떠났던 애나는 미국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체류기간을 지키지 않았던 전과가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영국으로 돌아간다. 그 둘의 세상에서 감각과 감정은 모든 문제의 마스터키와 같은 역할을 한다. 하지만 이성과 제도라는 자물쇠로 닫힌 현실의 문을 그들은 열지 못한다. 비자 문제로 인해서 영화의 끝부분까지 애나는 미국으로 돌아오지 못하는데 이런 비극적 서사를 위해 감독이 이 '비자' 문제를 소재로 사용한 까닭은 무엇일까. 


    흔히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도 어느 정도 거리가 있어야 한다'는 말을 한다. 위와 유사한 맥락을 공유한다. 이러한 말의 논리는 무엇인가. 사람은 누구에게나 본디 결핍이 내재돼 있기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주체는 사랑을 자신의 결핍(lack)을 충족시키기 위해 시작한다. 결국 이 결핍을 충족시켜줄 타자를 마주하게 되고 이 타자와 사랑을 함으로써 이 결핍은 어느 정도 충족된다. 그러나 주체는 끊임없이 불안하다. 이 충족이 주체적인 충족이 아닌 타인으로부터 기인한 충족이기 때문이다. 이 불안이 충족을 넘어서게 되면 주체는 차라리 이전의 결핍 상태로 회귀하고 싶어 한다. 이러한 감정의 서사를 잘 나타내 주는 소재가 바로 비자다. 


    불안과 이로 인한 편집증적 증세를 보여주는 소재가 바로 의자다. 이 의자가 영화에서 선물로 쓰인 까닭은 무엇일까. 이 선물은 꽤나 로맨틱하게 보이기도 한다. 당신에게 꼭 들어맞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선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종 로맨스 영화에서 선물의 소재로 사용된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의자는 내가 있어야 할 자리, 즉 위치를 지정하곤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의자를 선물하는 행위는 곧 상대방에게 존재해야 할 위치 혹은 관계에서의 위치를 규정하는 선물로도 볼 수 있다. 내 의자로 인해서 너는 '그곳'에 있어야 한다는 논리이다. 이 논리를 통해서 사랑의 주체는 자신의 결핍이 충족되리라는 어렴풋한 확신을 얻게 된다. 






3. Patience(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므로 헤어짐)




    애나에게 제이콥이 선물한 팔찌를 떠올려 보자. 그 팔찌의 문구는 Patience 즉 인내다. 물리적 거리로 인해서 그 둘은 인내의 기간 동안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한다. 중간중간 다른 연인이 생기기도 한다. 이렇듯 그 둘의 사랑은 불안한 상태로 지속된다. 이 불안함 속에서 헤어짐을 짓게 하는 것은 헤어짐보다는 만남이다. 불안함 속에서 떨어져 있는 상태는 그 불안을 증폭시킨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들의 사랑 초기에 가졌던 환상을 그리움으로 하여금 복구시키기도 한다. 주체로 하여금 다시 한번 결핍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이 결핍이 주제초 하여금 다시금 타자를 욕망하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이 욕망을 대표하는 접속사다. 그렇기 때문에 물리적 거리는 오히려 관계의 연장에 도움이 된다. 하지만 이 욕망은 충동보다도 건강하지 못한 속성을 갖고이다. 주체와 타자의 서사가 Crazy에서 Patience로 전환된 순간 접속사는 한 두 문장을 바꿀 수 있을 뿐 크게 위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고로 이 '물리적 거리'는 인공호흡기 정도의 역할을 수행할 뿐이다.  


    이 인공호흡기가 제거되는 순간이 바로 만남의 순간이다. 영화 결말 부분에서 그들은 부부가 맞나 싶을 정도로 어색함을 느낀다. 그와 그녀가 그렸던 만큼의 감정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결핍이 채워지기보다는 오히려 '비어있음'이 명확해진다. 이제 더 이상 그 결핍은 너로 인해서 채워질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를 쉽사리 받아들일 수 없다. 당황스러움으로 인해서 그들은 필사적으로 결핍의 충족을 가져와보고자 한다. 그래서 둘은 같이 샤워를 하는 선택을 한다. 좀 더 확실하게 상대방을 지각하고자 하는 필사적인 몸부림이다.


     하지만 샤워를 하면서 그 둘은 키스를 하다가 도중에 그만둔다. 그들의 사랑은 환상으로부터 탄생했으며, 결핍과 물리적 거리로 인해서 힘겹게 삶을 살다가, 오히려 그 환상의 실현이 다가오자 죽음을 맞이한 것이었다. 결혼 또한 이를 유지하려는 이성과 제도적 노력이었다. 또한 이를 유지시켜줄지 모른다. 영화의 결말은 결혼이라는 관계는 어떻게 되었는지 보여주지 않는다. 하지만 서로에 대한 감정이 비극적 결말에 도달했을 때 결혼이 그와 호흡을 같이 하지 않으면 이는 또 다른 비극이자 구속의 서론이 아닌가. 또한 운명으로부터 일시적 도피는 이렇게 헤어짐을 짓는다. 그러나 욕망의 서사는 또 다른 곳에서 어김없이 펜을 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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