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미 오브 스테이트'와 '스노든' 통한 국가 감시의 범위에 대한 논의
수업시간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와 이후에 ‘스노든’을 보면서 위 제목이 떠올랐다. 2008년 알렉산더 국장은 영국의 정보기관인 GCHQ(Government Communications Headquarters)를 방문했을 때 “왜 모든 정보를 수집할 수 없습니까”라는 질문을 했다. 이 발언에 논란이 일자 NSA의 대변인은 일부 극단적인 발언이 맥락 없이 나온 농담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위 두 영화는 그의 발언이 단순한 농담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과거 벤담은 ‘파놉티콘’의 핵심이 ‘자신은 노출시키지 않은 채 감시를 하는 매우 효과적인 장치와 더불어 감시자의 상황이 지닌 중심성에 있다고 말했다. 현대 사회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가 정보화 시대에 파놉티콘에 갇혀 있다고 비유하면 비약인가. 우리도 모르는 사이 우리를 감시하는 그들을 ‘빅브라더’라 부르면 과장인가. 그러나 문제는 위 두 영화가 단순히 영화로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영화는 막을 내렸지만 감시를 은폐하는 막은 내려가지 않고 있으며 감시는 지금 이 순간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위와 같은 사고의 흐름을 따라가 보면 다음과 같은 문제가 필연적으로 도출된다. ‘국가에 의한 감시가 국민의 자유를 지키는 정당한 수단인가?’라는 문제다. 이 문제와 마주설 때 가장 먼저 던져야 할 질문은 감시의 범위에 대한 질문이다. ‘어디까지가 정당한 국가 감시인가?’ 국가 감시의 영역이 자국과 타국의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국내외 테러 음모를 계획하고 실행에 옮기는 것을 예방하는 데 국한되었더라면 ‘스노든 효과’는 이처럼 큰 파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을 것이다. 후술 하겠지만 문제는 그 범위가 과도하게 넓다는 데 있다. 첫째 해외 정보에 비해 국내 정보가 과도할 정도로, 몇몇 대상이 아니라 무차별적으로 수집되고 있다는 데 있다. 감시의 바깥은 없다. 더욱이 감시가 이루어지는 환경도 과거와 완전히 다르다. 과거에서부터 이 같은 감시는 지속되어왔다. 하지만 기술 및 법적 한계로 인해 직접 감시에 그쳤다. 두 번째 문제가 이와 연관된다. 오늘날엔 기술의 독주를 제도와 문화가 따라잡지 못한다. 이러한 사회적 환경 속에서 정보기관은 소프트웨어와 프로그램을 끊임없이 발전시키며 정보를 수집하고 있다. 과거와 달리 이 같은 감시에 놓인 사람들은 파놉티콘의 무서운 속성처럼 감시받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다는 점이다. 그들은 오히려 자유롭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더 빈번하고 은밀하게 그리고 예외 없이 무차별적으로 ‘그들’은 ‘우리’를 보고 있다.
위와 같은 두 가지 문제점을 폭로한 스노든의 행위는 방법의 합법성에는 문제가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민주사회 시민으로서는 정의로운 행위였다. 그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컴퓨터와 핸드폰이 실상 텔레스크린이었음을 폭로했다. 또한 그 속에서 주고받는 문자, 전화 심지어 별생각 없이 올린 SNS 포스팅도 감시의 범위 안에 속함을 대중들에게 알렸다. 이 폭로를 통해서 대중들에게 실상을 전달하고 현재까지도 그 여파가 이어지며 긍정적인 선순환을 이끌어 낼 수 있는 논의의 장을 설득력 있게 제시했다는 점에서 그가 정의로운 시민임을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스노든의 행위도 정의롭지만 이를 처벌하겠다는 정부의 방침 또한 정당하다. 그는 동기에 상관없이 폭로의 과정 속에서 현행법을 어겼다.
정의로움과 위법성은 별개다.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이 시사하듯 그는 국가와 배심원이 내리는 판결을 기꺼이 받아야 한다. 하지만 내가 집중하고자 하는 바는 그 판결의 결과보다도 그에 이르는 과정이다. 그가 자발적으로 시민 불복종적 태도를 취했다면 그는 그 불복종을 끝까지 그리고 필사적으로 고수해야 한다. 그가 했던 폭로가 이제 그를 위한 변호가 될 것이다. 폭로 이전과는 상황이 많이 다르다. 그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다. 그의 폭로로 깨어난 사람들이 법정 밖에서 그를 위해 변호할 것이다. 더욱이 그가 무죄 선고를 받지 못할지라도 그와 같은 정보기관의 내부고발자에 대한 인식의 변화와 함께 법, 제도적 검토를 촉발시킬 것이다. 또한 어떤 사회가 지닌 자유의 진정한 잣대는 충실한 지지자를 어떻게 다루는지가 아니라, 반대자와 사회적 약자를 어떻게 다루는 가다. 그가 일신의 안위를 위해서가 아니라 진정으로 사람들을 위해서 폭로를 했다면 그는 자신이 폭로한 사회로 돌아와 판결을 받고 그가 일으킨 폭풍의 눈 중심에 서야 한다.
하지만 위에서도 언급했던 바와 같이 테러를 막기 위한 정보 수집의 필요성 자체에 반대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에 대해 애런 더쇼비츠 전 하버드 로스쿨 교수는 다음과 같이 그 필요성은 피력한다. “목욕물을 버리다 아기까지 버려선 안됩니다.” 타당하다. 하지만 나는 아기가 들어갈 목욕물의 수온이 적절한지 유해하진 않은지에 대해 논의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논란이 불거질 때마다 정보기관과 그 옹호자들이 주장했던 “그러지 말고 우리의 동기를 보며 그냥 믿어주세요”라는 방식의 변론은 이제 변명이므로 기각된다. 우리는 그들의 동기와 행위 사이의 모순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내의 ‘국정원 폐지’와 같은 논의에서 난색을 표했던 것처럼 무턱대고 이들을 내일 당장 폐지할 수도 없다. 정보수집의 행위는 필수적인 데 국한되어야 한다. 대규모 수술이 필요한 시점이다.
첫째 그들은 더 이상 무소불위의 대통령 직속기구여서는 안된다. 견제 없는 권력은 예외 없이 타락하기 마련임을 우리는 역사 속에서 목도해왔다. 많은 문제점이 제기되고 있지만 구조적으로는 캐나다 정보기관의 형식이 좋은 모델이 될 수 있다. 캐나다의 OCSEC(office of the communications security establishment commissioner)라는 조직이다. 이 위원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CSE(Communications Security Establishment)라는 기구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이 CSE는 국외 통신에 대하여 별도로 운영되는 감청기관이다. 이 조직을 통제하기 위해 설립한 조직이 OCSEC다. 이 조직은 소개에서부터 독립된 외부 조직이라는 특성을 강조한다. 또한 캐나다에는 우리나라의 국가정보원에 해당하는 정보기관이 따로 있다. CSIS(Canadian Security Intelligence Service)가 이에 대응되는데 이 기관에도 SIRC(Security Intelligence Review Committee)라는 통제를 위한 위원회가 별도로 존재한다.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정보기관과 통신 부문만을 전담하는 기구를 분리하고 각각의 기구만을 통제하기 위해 별도의 조직을 갖추고 있다는 점, 그리고 그 조직은 독립적인 외부의 조직이다. 또한 CSE의 내부를 제대로 파헤치기 위해 심지어 영장 발부 권한도 가진다는 점 등은 실질적인 구조 개혁에 관한 방안으로 볼 수 있다.
둘째로 구조적인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독립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비극은 정보기관의 무소불위적 특성에 정치권력이 개입하고 입맛에 맞게 사용될 때 발생했다. 정보기관과 그에 대한 감찰기관의 독립성은 그 존재의의를 떠받치는 기둥과도 같다. 그 기둥이 무너져 부서지게 되면 피해는 고스란히 그 감시 아래 있던 국민에게 가해질 것이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언론의 역할이 중요해진다. 언론은 국민과 사회문제를 연결한다. 그렇기 때문에 언론은 사회의 문제점을 파악하는 리트머스 종이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이 기능으로 인해서 언론은 현대사회에서 '제 4의 권력'이라 불리기까지 한다. 이에 걸맞게 언론이 정부의 투명성을 보장하고 힘의 남용을 견제해야 한다. 언론은 원칙적으로 국가 권력의 남용을 감시하고 견제하는 주요 기구다. 하지만 현실은 어떠한가. 주요 언론은 대개 이런 역할을 포기했다. 정부의 이해관계에 영합하거나 심지어 확대한다. 정부의 메시지를 비판적으로 조사하기보다는 정부가 하기 힘든 일은 대변해준다.
결론을 맺자. 위협적인 감시의 실재 위협은 다음과 같다. 우리를 감시하는 대상이 NSA이든 CIA든 국정원이든. 내가 그것을 빅브라더나 파놉티콘에 비유하듯 나와 당신은 그러한 권위체에 의해서 지금 이 순간 또한 감시당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단순하게 정부의 구조개혁만을 통해서 판옵티콘으로부터의 탈출을 기대하기에는 우리에겐 더 이상 빌어올 미래가 없다. 깨어있는 언론과 시민사회의 끊임없는 노력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그리고 우리가 개선하고자 노력하지 않는 한 그들은 언제가 그랬듯 우리를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故 노무현 대통령님이 생전에 자주 언급하셨으며 또한 묘비에 새겨진 한 문구가 떠오른다. '민주주의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 이 문장을 통한 나의 결론이 우리가 살아갈 파놉티콘에 균열을 가하는 서론이 되기를 바라며 무거운 마침표를 찍는다.
참고문헌
<서적>
글렌 그린왈드, “더 이상 숨을 곳이 없다”, 모던타임스, 2014
글렌 그린왈드, “감시 국사:국가 감시에 관한 우리 시대 정상급 라이브 토론 배틀”, 모던타임스, 2015
홍성욱, “파놉티콘 정보사회 정보감옥”, 책세상, 2002
<논문>
허진성, “데이터 국지화(Data localization) 정책의 세계적 흐름과 그 법제적 함의”, 한국 언론 법학회 언론과 법, 2014, PP. 289-309
송영배 김형식, “에드워드 스노든에 의하여 폭로된 NSA와 GCHQ의 정부 감시 프로그램 사례 연구” 한국정보과학회 학술발표논문집. 2013, PP. 817-819
오길영,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본 국가 정보원 통제방안” 민주법학 제66호. 2018 PP.152-1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