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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변민욱 May 22. 2018

우리는 여태껏 이런 사랑을 본 적이 없다

영화 '케이크 메이커' 리뷰


우리는 여태껏 이런 종류의 사랑을 본 적이 없다. 




1. 최초의 사랑




  최초의 사랑은 어땠을까? 최초의 사랑에는 종족도 국경도 종교도 민족도 없었지 않을까. 그렇기 때문에 스펙까지 필요하게 된 최근의 사랑과는 전혀 달랐다. 최근 사랑에 관한 한 복잡한 방정식을 풀어내기 위해서는 이에 따른 여러 가지 풀이 방법이 필요하고 해가 나온다. 어느 순간부터 여러 가지 요소들이 결합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부족이 탄생하면서 종족이, 국가가 탄생하면서 국경이, 종교가 탄생하며 종교가 사랑에 개입해 이를 복잡한 수식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는 풍족해졌을지는 모르겠지만 가장 원초적이고도 본질적인 개념인 사랑을 잃어버렸으며 또 완전히 이 사실을 잊어버렸다. 그 과정 속에서도 잃어버린 사랑을 겨냥한 치밀한 마케팅은 거듭되었다. 지금 이 순간도 사랑에 관한 노래를 듣고 드라마를 보면서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고 기뻐한다. 그렇게 사랑은 유실되고 망각되었음에도 흔한 단어가 되었다. 


 하지만 사랑은 여전히 가장 위력적인 단어 중 하나다. 순수하고 본질적인 사랑이 문장의 주어가 될 때 그 앞뒤로 붙은 모든 수식어를 사족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또한 사랑은 단순하면서도 가장 강력한 접속사이기도 하다. 이 단어를 통해 이어지는 대상들은 그 속성을 초월하여 이어질 수 있다. 이처럼 사랑은 위력적이지만  일차원적인 감정이었을 것이다.


 모두 케이크 메이커를 보며 떠오른 생각이다. '이것이 사랑의 본질이다.' 나에게 케이크 메이커는 사랑의 본질을 이야기해 주었다




2. 이것도 사랑인가 


 이 영화의 제작 국가를 유심히 볼 필요가 있다. 독일과 이스라엘이 공동 제작을 했다. 이 두 국가의 관계는 아우슈비츠 이후엔 '앙숙', '갈등', '용서', '화해' 모든 비유가 왜곡이 되어버리는 관계다. 국가 전체적인 입장이 아닌 사람들 내부의 감정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영화 속 그들은 사랑을 한다. 물론 위에서 말했던 것처럼 민족이, 국경이, 종교가 개입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의 사랑은 그 모든 장애물을 건너뛴다. 영화 속 은연중에 풍기는 난해 함이자 관객의 직접적인 난감함이 이에 배경을 둔다. 매번 장애물을 건너뛸 때마다 우리는 앞선 감정을 느낄 것이다.   

좌측 사진이 토마스 우측의 사진이 오렌이다. 맞다 이 사랑은 동성애이다.

 영화 속 첫 번째 사랑은 토마스와 오렌 사이의 사랑이다.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 둘의 사랑은 동성애이다. 그리고 오렌의 입장에서는 불륜이다. 불륜에 관해서는 차치하더라도 동성애에 대해서 영화는 "그래서 뭐?"라고 관객들에게 묻고 있는 듯했다. 그들은 여타의 이성애자처럼 특수하지도 특별하지도 않다. 많은 영화와 문학이 그리고 사람들이 이를 간과하곤 한다. 그 부분에서부터 왜곡이 발생하고 '우리'와 '그들'을 구분 짓게 된다. 하지만 영화에서도 볼 수 있듯 토마스와 오렌 모두 각자의 분야의 일을 하고 일상을 살아간다. 그리고 여느 사람과 같이 퇴근 후의 사랑을 나눈다. 그러나 오렌이 세상을 떠나고 만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남은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영화 속 두 번째 사랑이 이 물음에 관련되어 있다. 여태껏 우리는 이 물음에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정확히 말해서는 조심스럽게 주저하며 답을 피해왔었다. 그래서 그 부분에서 비극적으로 결말을 맺거나, 혹은 영원히 그 혹은 그녀를 그리워하는 모습을 그려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토마스는 또다시 사랑의 대상이 된다. 바로 오렌의 부인 아나트가 그 사랑의 주체이다. 이 관계는 위 관계보다 훨씬 더 난해하다. 또한 민족적 배경까지 고려하면 보는 이들의 머리를 지끈거리게 한다. 

  지금 이렇게 글을 쓰고 있지만 그 둘의 사랑을 영화 속으로 보면서 이성적으로는 그러면 안된다고 중얼거렸다. 주위에서도 나지막이 경악하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그들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조차도 될 수 없는 '이루어져서는 안 되는' 사랑인가. 그것은 분명 도덕성에 기반한 조용한 비명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도덕적인 관객들은 영화의 엔딩 크레디트가 끝나고 이 질문에 사로잡히게 된다. 타자가 그 사랑을 비방할 권리가 있을까. 감독은 이를 아름답게 그려내면서도 날카롭게 질문한다. 둘이 주방에서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롱테이크로 장시간 보여주는 부분이 이를 반증한다. 이 아름다움은 이내 당혹감을 불러들인다. 이 질문에 당신은 어떤 답을 할 것인가.






3. 만나고 싶어도 만나선 안된다. 


  결말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사랑하지만 그 둘은 만나서는 안된다. 그 둘의 사랑은 모든 것을 초월해야 이루어질 수 있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또한 영화가 그때까지 밀고 왔던 긴장감과 서사를 한 순간에 잃어버린 체 흘러 진부한 결말에 다다를 위험성이 있다. 그러나 감독은 그 길을 선택하지 않는다. 비록 영화라고 할지라도.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마지막 장면에 그녀가 독일로 그를 만나러 가서도 그를 부르거나 만나지 않는다. 그저 바라볼 뿐이다. 그래서 이 영화에 대해서는 비현실적인 사랑을 다루면서도 현실적이며, 이상적인 사랑에 대애 이야기하면서도 그 화자는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마무리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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