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스탠바이 웬디' 리뷰
한 소녀가 있다. 그 소녀는 하루 일과의 전체적인 스케줄을 외우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렇게 하루 일과를 외우고 난 후에 그녀는 집을 나선다. 한 가지 철칙은 ‘절대로 마켓(Market)가는 건너선 안된다.’라는 점이다. 한 번도 어긴 적 없는 그 철칙을 오늘도 지키고 그녀는 아르바이트를 하러 간다. 그녀는 빵집에서 일을 한다. 직장동료들과 담소도 나누고, 선물도 받는다. 그녀의 삶에서 가장 큰 낙은 집으로 돌아와 집안일과 공부를 마치고 ‘스타 트랙’을 보고 글을 쓰는 것이다. 어느 날 TV에서 스타 트랙 시나리오 공모전에 대한 방송을 보게 된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글을 써내려 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우편이 늦을 것 같아 직접 가서 응모하기로 결심한다.
한 소년이 있다. 그 소년의 하루는 수업시간에 맞게 맞췄던 알람에 의해서 시작된다. 다이어리에 써 두었던 하루 일정을 확인하고 집을 나선다. 정신없이 준비를 마치고 그는 수업을 들으러 간다. 전공 수업과 교양 수업이 이어진다. 이후에는 친구들과 놀기도 하고 동아리에 가서 운동을 하기도 한다. 집으로 돌아와 밀렸던 빨래와 과제를 한다. 그의 삶의 가장 큰 행복 중 하나는 집에 돌아와 빅뱅이론과 같은 미드를 보는 것이다. 때때로는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나서 글을 쓴다. 시나 수필 공모전을 보고 잠깐잠깐 멈칫 하지만 ‘저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라고 생각하곤 이내 생각을 접는다.
전자는 영화 초반 묘사되는 웬디의 모습이고 후자는 평상시 나의 모습이다. 웬디의 일상에서 ‘센터’와 ‘자폐증’이란 단어를 빼면 우리와 영락없이 다를 바가 없는 한 소녀이다. 오히려 그녀가 필사적으로 시나리오를 제출하려는 과정이 나는 감명이 깊었다. 내가 막 글을 쓰기 시작할 때의 모습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이글에서 우리는그녀로부터 먼저 '다수와 소수'에 관해서 배운다. 이후 진정한 '소통'의 의미를 배우고 나서 수많은 작가들을 향한 그녀의 외침을 들으며 마침표를 찍어보자 한다.
세상을 끌고 나가는 건 2%의 인간이다.
입버릇처럼 담임은 그런 얘기를 했는데, 역시 나라는 생각이다. 치수를 보면 확실히 그런 인간이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된다. 출마를 하고, 연설을 하고, 사람을 뽑고, 룰을 정하는-좋다, 납득한다. 이 많은 인간들을 누군가는 움직여야 하는 거니까. 수긍한다. 나머지 98%의 인간이 속거나, 고분 하거나, 그저 시키는 데로 움직이거나-그것은 또 그 자체로 세상의 동력이니까
박민규, 「핑퐁」, p. 11
그러나 ‘우리와 다를 바 없다’라는 문장은 ‘그들과 우리는 다르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우리는 이미 그녀를 우리와 다른 존재로 생각한다. 그녀와 같은 사람을 부르기 위해서 많은 호칭이 있고 이에 대한 논란도 많다.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영화를 보고 나서는 다음과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들을 지칭하는 말들이 그들 개개인이 아닌 전체 정의하고 그들과 우리는 엄연히 다르다는 사실을 더 공고화 하는 것은 아닐까? 그녀가 그냥 웬디일 수는 없을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에 대해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고 말한 바 있었다. 비극은 이 문장에서부터 보통 시작된다. 그리고 이 표현은 너무 널리 그리고 많이 쓰이면서 미화되었다. 주로 이 문장은 당신은 이 현대 사회는 수많은 개인과 개인 간의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단독자 개인으로서는 절대로 살아갈 수 없다는 생존법칙을 보편화시키고 합리화하고자 자주 인용된다.
이 문장의 가면을 벗기면 다음과 같은 맨얼굴이 나온다. ‘인간은 평생을 다수 인척 하며 살아간다.’ 앞선 문장에서 방점은 ‘척’에 찍혀야 한다. 인간은 다수로서가 아니라 그저 다수 인척 하며 살 뿐이다. 이와 같은 행태는 개인이 다수에 속함으로써 느끼는 안정감에 기인한다. 어딘가에 속해 있다는 소속감 만으로도 인간은 어느 정도 안정감을 느낀다. 그러나 그 안정감은 다수가 가진 안정감일 뿐 개인의 안정은 보장해주지 않는다. 그리고 때때로 다수는 소수에게 희생을 강요하기도 한다. 그렇게 다수는 폭련적인 성질을 점차 내재하게 되고 소수들을 열등한 존재로 바라보게 된다.
그러한 희생의 제의를 다수는 ‘다수결’을 통해 정당해 나간다. 이때부터 다수는 단순한 수적인 측면의 다수가 아니다. 오히려 다수와 소수를 현대사회에서 규정하는 논리는 바로 힘의 논리다. 건강하지 않은 다수에게 다수결은 그 힘을 정당화시키는 수단에 불과하다. 영화 속 웬디가 센터에 보내지는 것에서부터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것까지 어쩌면 우리 삶의 모든 것이 다수결인 것은 아닐까. 심지어 투표자들이 누구인지도 모른 체 진행되는. 그러나 웬디는 아니었다. 영화 속 웬디의 시나리오 제목은 ‘다수와 소수’다. 영화 속 그녀는 그 시나리오 제목처럼 누구보다도 ‘다수와 소수’를 잘 알고 있는 캐릭터다.
적응이 안돼요
다들 결국엔 자기 할 만하는 거잖아요
얘길 들어보면 누구도 틀렸다고는 할 수 없어요
왜 그럴까요. 왜 아무도 틀리지 않았는데 틀린 곳으로 가는 걸까요
내가 이렇게 사는 건 누구의 책임일까요
무엇보다
그걸 용서할 수 없어요
60억이나 되는 인간들이
자신이 왜 사는지 아무도 모르는 채
살아가는 거잖아요
그걸 용서할 수가 없어요
박민규, 위의 책, p. 117
동시에 그녀는 순수하고 아름다운 소수다. 다수의 사회 속에서 살면서도 소수로서 자신의 색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의 LA를 향하는 여정은 수많은 다수 인척 하는 사람들과 그녀와의 충돌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아파하는 것을 보고 단순히 성장통으로 해석하는 것 또한 ‘다수’의 시선이다. 그녀의 관점에서 그녀의 아이팟을 훔쳐 달아난 강도, 바가지를 씌우려는 점원, 인편은 받아주지 않는 직원을 보며 그녀는 무엇인가를 배웠다기보다는 폭력적인 다수를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 사람들은 왜 이렇게 말이 통하지 않는가 하면서 말이다.
그들과 소통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감독이 제시한 장면이 있었다. 바로 도망치고 숨는 웬디를 위해 ‘클링온어’로 대화하는 경관이다. 처음 듣는 ‘클링온어’로 인해서 웃으시는 분들도 많았지만 그 장면은 단순히 웃긴 장면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오히려 ‘웃픈’ 장면이었으며, 단순히 웃고 지나갈 장면 정도로 생각했다면 ‘정말 슬픈’ 장면이다. 이 장면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시사점을 우리에게 던진다.
첫째로는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다. 경관은 ‘클링온어’으로 웬디에게 말을 한다. 이 클링온어는 일상적인 언어가 아니라 그녀가 좋아하는 스타 트랙에 나오는 언어다. 그래서 일상 속에서는 특별해 보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우스꽝스러워 보이기까지 한다. 그는 다수의 일상 속 다수가 사용하는 언어를 기꺼이 포기한다. 우리에게 일상 속 언어가 익숙한 만큼이나 그녀에게는 이 언어가 아프다. 그녀 또한 살아가기 위해 마지못해 사용하고 있지만 그 삶 속에서 다수의 언어는 사람들의 편견 어린 시선을 전달하는 수단이자 종종 그녀에게 상처를 준 언어였기 때문이다. 반면에 클링온어는 이와 상반된다. 이 언어는 그녀에게 꿈과 희망을 주었던 언어다. 그녀를 편견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지도 않고 상처를 후벼 파지도 않는다.
둘째 그렇다면 이 언어의 경계를 넘나드는 상상력을 무엇이라고 명명해야 하는 가다. 소통의 뜻 중에는 '뜻이 서로 통하여 오해가 없음'이라는 뜻이 있다. 이 장면과 경관은 웬디를 향한 오해가 가장 없었던 장면이자 사람이었다. 비록 동료 경관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할 지라도 서로에게는 자신들의 의도를 가장 잘 전달하고 설득해냈다. 우리는 소통을 너무 거창하게 생각하고 공론장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러나 소통은 거창한 단어가 아니다. 특히 소수를 향한 소통은 거창하게 생각할수록 와전된다. 그러므로 소통은 이와 같이 시작돼야 한다. 조금은 우스꽝스럽다고 여겨질지 몰라도. 이 장면을 연출한 감독의 상상력을 나는 이 상상력을 진정한 의미의 '소통'이라고 부르고 싶다.
정신이 결코 힘을 이길 수 없는 이곳에서
희생하는 인간이
이기적인 인간을 절대 당해낼 수 없는 이곳에서
이곳은 어디일까.
남아있는 우리는 뭘까?
박민규, 위의 책, p.255
우여곡절 끝에 샌프란시스코에서 LA 파라마운트 픽처스까지 600km의 모험을 마치고 시나리오를 접수하려고 하지만 직원이 받아주지를 않는다. 그는 시큰둥하게 말한다. "우편으로 온 것만 받습니다." 뒤돌아 서서 웬디는 다음과 같이 중얼거리다 이내 직원을 향해 소리친다. "글 쓰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아요!" 이 부분부터 글을 써본 사람이라면 웬디에게 감정이입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냥 기회만이라도 달라는 거잖아요"라는 말에서는 가슴이 저릿해지면서 눈물이 났다. 우리는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한 채로 구겨지고 쓰레기 통을 향했던 종이들을 떠올리고 있다.
요즈음에는 정말 작가들이 많다. 과거에는 보통 등단이라는 절차를 통해서만 작가가 되었다. 하지만 요즘은 다양한 채널들이 존재한다. 심지어 나조차도 나름의 작가이지 않은가. 하지만 그만큼 독자들을 확보하기도 힘들다. 정말 좋은 글을 쓰더라도 또 좋은 글들이 쏟아지기 때문이다. 이 브런치에도 수 없이 많은 작가 분들이 계시고 또 되기 위해 노력을 거듭하시는 분들이 있다는 사실을 익히 안다. 또한 최근에 수업을 듣고 시를 쓰며 느꼈던 점은 정말 뛰어나고 색이 분명한 시를 쓰는 분들이 많다는 점이다. 나의 글은 그냥 묻힐 것만 같았다.
웬디의 시나리오가 당선이 됐을까? 그것은 극장에서 확인해보시길 바란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난 후에 나는 감독이 의도하지 않았을 듯한 하나의 위로를 받았다. '수많은 작가가 존재하는 것도 맞고 나의 글보다 뛰어난 글도 많다. 하지만 분명히 내가 글을 쓰게 된 이상 나만이 낼 수 있는 목소리가 있다. 그러므로 내 글만의 질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라는 위로였다.
그러나 이 위로는 앞서 거쳐왔던 '다수와 소수' 문제와 '소통'을 고려해야 한다. 다수와 영합하기 위해 글을 쓰고 소통에 관심조차 없는 독선적인 글은 아무리 뛰어나도 현대사회에서는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 또한 사람들을 그런 글을 굳이 찾아서 읽지 않는다. 그러나 최소한 저 문제를 위해 조사하나까지도 신경 쓰며 마침표의 무게를 아는 작가라면 다음과 같은 웬디의 결론을 들려주고 싶다. 이 결론은 앞으로 우리 모든 글의 서론이 될 것이다.
결국 논리적인 결론은 단 하나, 직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