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다음 실험에도 기대를 걸어 보자
"구글에서 일할 당시 윈도우 창이나 스크린을 통해 사람의 감정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는지를 알게 됐고, 이 같은 작업을 장편 영화로도 표현해보고 싶었다"*
- 아니쉬 차간티 감독
'실험적'이라고 불리는 영화들이 있다. 그러한 영화의 성패는 두 가지 요소에 의해서 결정된다. 하나는 실험의 참신함이다. 실험이 그 자체로만 보더라도 '예술적이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만 이런 영화도 피해갈 수 없는 것은 '실험 이외의 요소들에서도 성공을 거뒀는가'다. 우선 이 영화의 실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자. 서치는 실험적인 영화인가? 맞다. 그 전까지도 PC 화면이나 SNS를 스크린으로 끌어들이려는 시도는 많았다. 하지만 이를 영화 처음에서 끝까지 밀고 나갔던 영화는 보기 드물었다. 그러나 '기법 이외의 요소에서도 성공을 거뒀는가?'라는 질문에는 마지막 의문부호를 남기고 써 내려가 보고자 한다.
서치의 소재는 OS 시스템과 SNS다. 통화 연결음으로 영화가 시작한다. 익숙한 윈도우의 부팅 소리가 영화관에 울려 퍼진다. 이후 관객이 마주한 장면은 컴퓨터의 바탕화면이다. 앞으로도 관객들이 마주하게 될 장면은 PC뿐이다. 영화의 러닝타임 중 우리는 핸드폰의 전원을 끄고 가방에 집어넣더라도 OS 시스템과 SNS 속에서 머무른다. 이 감독에게 그런 제재(題材)는 제재(制裁)가 되지 못한다. 오히려 제재를 훌륭하게 소화해낸다. 영화의 초반부에 엄마가 암에 걸려 입원을 한다. 이때 딸이 컴퓨터 상의 캘린더에 '엄마 집에 오는 날'을 드래그해서 자꾸만 미루다가 이내 삭제한다. 사진이나 옷을 태우는 장면이나 장례식을 치르는 전통적인 죽음의 메타포는 아니다. 하지만 우리에는 오히려 절제된 형식의 슬픔처럼 느껴진다. 이런 장면들을 통해 감독은 과연 'PC 화면을 통해서도 감정을 잘 그려낼 수 있을까?'하는 우려를 종식시킨다.
이 형식을 통해 감독은 일상 속 '관계(關係)'를 그려내려고 했다. 우선은 가족 내에서의 부녀관계다. 감독은 페이스북 메신저를 사용한다. 딸과 대화를 주고받는 장면에서 아버지는 몇 번이나 대화 말을 고친다. 대화를 고치며 스페이스와 백스페이스를 통해 아버지가 한 문장 속에서 오간 거리가 그들의 거리에 대응한다. 아주 멀지도 그렇다고 가깝다고도 할 수 없는 그런 관계다. 또한 딸이 사라진 뒤에도 아버지는 그녀의 친구를 찾기 위해서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을 들어가 보는 장면은 정말 웃픈 장면이다. 경찰관이 던진 "따님이 어떤 사람인지, 주위에 친한 친구는 누구인지 말씀해주시겠어요"에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아버지가 몇이나 계실까. 이 질문은 영화가 우리에게 던지는 슬픈 질문이다.
이어지는 관계는 아버지의 사투 속에서 그려지는 개인과 사회와의 관계다. 아버지가 SNS에서 딸의 지인들에게 연락을 할 때 누구도 그녀의 '친구'라고 선뜻 이야기하지 않는다. 현대 사회에서 관계를 나타내는 단어들은 모두 그 범위가 불분명해지며 모호해지고 있다. 경계가 무너질 때 개인은 어디에도 속해있지만 동시에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존재다. 그래서 한 개인이 타자와의 관계를 표명하는 행위는 모종의 책임을 수반한다. 이런 관계가 극적으로 맺어지느 공간이 바로 SNS다. 이곳에서는 앞서 서술한 배경에서 다음과 같은 문법으로 이야기가 오간다. "나와 너는 마주 본다. 그러나 나는 내가 아니고 너는 네가 아니다." 익명성에 기반한 논리다.
익명성의 논리 속에서 사람은 때때로 인간으로서의 도의적 책임감마저 버린다. 우리는 우리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 쓰이고, 우리를 필요로 하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서만 이해된다. 딸의 실종이 이슈화 되자 주변 지인들은 "정말 가까운 친구였다. 꼭 찾아달라"라는 동영상을 유튜브에 올린다. 또한 인터넷 상에서는 "아빠가 범인인 21가지 이유"나 "대부분 이런 사건은 잘못된 가정교육에 기인한다"와 같은 글들이 돌아다닌다. 언론 또한 딸을 잃고 슬퍼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생중계한다. 이것이 인간인가. 이런 부분은 스크린과 우리가 목도하는 현실이 너무나 흡사해서 씁쓸하다.
씁쓸한 과정 속에서 아버지는 딸과 대화를 나눈 가상의 인물들은 추적하지만 번번이 예상과 다른 사람을 마주한다. 이 영화 속 감독의 '스릴러적'인 요소도 이런 익명성에 기반을 둔다. 그래서 이 영화가 끝나고 핸드폰을 켰을 때 SNS에서 각종 알림이 울리면 소름이 끼친다. 나는 누군가에게 내 일상과 행적을 드러내고 있지만 그 누군가를 나는 모르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SNS는 사건의 단서가 되기도 하지만 우리는 이 모든 사건의 원인이었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 된다. 확실한 것은 이런 사건이 현실에서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없으며, 모든 사건은 해결보다 미연에 방지하는 편이 훨씬 바람직하기 때문이다.
결론을 맺자. 영화의 기법은 '실험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겠지만 영화 속 장면이 난해하거나 실험적이지는 않다. 오히려 매일 벌어지는 일상에 가깝다. 실험은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하나의 실험 속에 너무 많은 것을 보여주려고 하지 않았나?"라는 의문이 가시질 않는다. 감독이 담고자 했던 '가족 간의 사랑', '스릴러적 요소', 'SNS'의 양면성은 하나만 하더라도 플롯을 채울 수 있을 만큼 굵직한 담론이다. 그는 충분한 실험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그러나 충실함은 또 다른 회피일 수 있다. 이 영화의 막이 올라가고 장르를 같이 본 분에게 여쭤봤다. 서로가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앞서 글을 열었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이 영화의 실험은 성공했는가? 실패했는가? 답은 독자분들이 확인해보시길. 이 실험은 또 다른 실험의 촉매제가 될 수 있다. 흥미로운 실험에 초대해준 감독에게 늦었지만 감사의 인사를 보낸다. 나는 실험 자체로는 그에게 박수를 아낄 생각이 없다. 그리고 이 영화를 본 하나의 관객으로서 그 실험에 참여하는 것을 추천드린다. 그렇게 같이 다음 실험을 기다려보고자 하고 싶다. 또 다른 그의 실험과 그 안에 담길 내용에 기대를 걸어본다. 다음 영화는 풍성하고 꽉 찬 실험도 좋지만 목적이 뚜렷하면서도 참신한 실험에 우리를 초대해주시길.
출처: http://www.newdaily.co.kr/site/data/html/2018/08/17/201808170013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