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에 대한 사유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속 김경주 시에 대한 단상 <上>

by 변민욱

0. 그들은 미래파인가


개별적 주체들을 하나의 집단으로 명명하려는 시도는 오류를 불가피하게 수반한다. 예컨대 '미래파'라는 시도도 그러하다. 그들은 미래에서 왔다고 부르기보다는 랭보의 후손들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또한 과거 시가 탄생했을 시점에 시는 분명 인간이 희로애락과 같은 감정과 이에 대한 감각을 다양하게 노래했었다. 사유에 앞서 태초에 감각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철학과 이성이 감정과 감각을 압도해나가기 시작했다. 근대 철학이 태동하면서부터이다. 이후 개인의 감각은 감정과 함께 설 자리를 잃었다. 이성과 계몽에 밀려났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 투신해야 했다. 그래서 이들은 오히려 미래를 노래한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보다는 사유의 무게에 눌려있던 감각을 다시 발굴해 노래하려는 '소리꾼'들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양팔이 없이 태어난 그는 바람만을 그리는 화가(畵家)였다
입에 붓을 물고 아무도 모르는 바람들을
그는 종이에 그려 넣었다
사람들은 그가 그린 그림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붓은 아이의 부드러운 숨소리를 내며
아주 먼 곳까지 흘러갔다 오곤 했다
그림이 되지 않으면
절벽으로 기어올라가 그는 몇 달씩 입을 벌렸다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색(色) 하나를 찾기 위해
눈 속 깊은 곳으로 어두운 화산을 내려보내곤 하였다
그는, 자궁 안에 두고 온
자신의 두 손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김경주 「외계(外界)」 전문


1. 외계에서 온 시인

그는 그의 첫 시집을 위와 같은 시로 시작한다. 첫 문장부터 상당히 충격적인 선언이다. "그는 양팔이 없이 태어"났다. 그래서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선 기형에 대한 이야기다. 시집 전체를 보면 알 수 있겠지만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기형으로서 기형에 대한 이야기다. 그가 이미 기형인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그의 첫 문장이 충격적이었던 사람들에게 "사람들은 그가 그린 그림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는 매우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부재를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그로 인한 기형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그는 기형을 말하고자 하는가.


아도르노는 이를 잘 표현한다. "합리적 인식은 고통과 거리가 멀다. 그것은 고통을 총괄하여 규정하고 그것을 완화하는 수단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러나 고통을 체험으로써 나타낼 수는 없다. 합리적 인식이 볼 때 고통은 비합리적인 것이다. 고통이 개념화되면 그것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게 되고 일관성도 없어질 것이다. (테오도르 아도르노, 미학 이론, 홍승용 옮김, 문학과 지성사, 1997, 39쪽) 기형으로부터 오는 고통을 통해서 합리성을 넘고자 함이다.


이 부재를 감각하려는 노력이 이어지지만 그 과정은 고통스럽다. 이는 당연하면서도 모순적인 과정이다. 모든 사람은 어느 정도 기형적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본능은 이를 필사적으로 은폐한다. 그리고 분석 주체인 자아조차 속이려 들뿐 아니라 합리화를 통해 분석을 막으려 든다. 그래서 그 노력은 본능보다 더 필사적이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나온다. "절벽으로 기어올라가 그는 몇 달씩 입을 벌렸다"다. 일단 그가 마치 "절벽으로 기어올라가"는 노력으로 글을 썼다는 것은 이해가 된다. 그렇다면 왜 몇 달 씩이나 "입을 벌렸"던 것일까


이는 마치 명상 때 심호흡을 하듯, 자기 자신과의 소통을 하려는 노력의 소산이다. 입을 벌리고 호흡을 하면 코로 호흡을 하는 것과는 '감각'이 다르다. 들숨에는 세상과 자신의 내면이 연결된다. 이윽고 날숨에서는 자신의 깊은 바닥에까지 돌고 온 호흡이 내뱉어진다. 이 과정을 통해서 화자는 소통을 전개한다. 더욱이 그는 바람의 '질감'을 느껴야 한다. 이는 분명히 감각의 영역이다. 시 속에서 감각의 주요 수단 중 하나인 양팔이 없는 상태인 그는 그렇기 때문에 바람의 질감을 느끼기 위해서 입을 벌린 것이다.



2.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색


그렇게 끈질긴 인내의 시간을 통해 그는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색"을 찾으려 한다. 이는 앞으로 마주할 그의 감각이 통사적인 감각과는 다르다는 명시적 표현이다. 그렇다면 그는 이 '색'으로 그리려는 대상은 무엇인가. 바로 "자궁 안에 두고 온/ 자신의 두 손"이다. 우선 이 시도 자체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자. 이 시도는 양팔 없이 기형으로 태어났지만 두고 온 두 손을 그리는 노력을 통해 궁극적으로는 기형을 극복하려는 시도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 시도는 불가능하다. 태초부터 손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감각이 태동한 이후 자신의 두 손을 그조차 본 적이 없다.


그렇다면 이 시도는 무의미하다고 보아야 할까? 그렇진 않다. 이성복 시인은 현대문학상 수상소감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전했다. "문학에 대한 사랑은 불가능한 사랑이면서 동시에 불가능에 대한 사랑이기 도 합니다."그의 시도는 이와 유사한 맥락의 사랑이다. 즉 '손'은 그려야 할 대상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그려나가야 할 지향점이다. 지향점을 분명하게 했다면 이제 문제는 그 지향점을 향하는 방향이다. 이 문장의 두 번째 해석이 이와 관련된다.


그는 "자궁에 두고 온"이라 표현했다. 자궁이란 무엇인가. 감각과 이성의 출발점이다. 또한 우리 삶에서 가장 내적인 부분이다. 이를 통해서 그는 방향 설정을 한다. 기형과 부재의 이유를 찾기 위해서 굳이 바깥이나 철학적 사유로 나아가지 않겠다는 의지다. 그보다는 자신의 감각의 시작점이었던 곳으로 회귀하여 그의 삶을 찾아내고 감각에 대한 사유를 써 내려가겠다는 것이다.


사유가 감각에게 자리를 양보할 때 이는 작자의 독자에 대한 양보로도 이어진다. 독자는 사유가 떠난 벤치에 앉아서 충분한 사유를 할 '여지'를 갖게 된다. 그리고 이 사유는 불가피하다. 이후의 시들에서도 보면 알겠지만 김경주 시인은 이제 그의 시를 통해 우리에게 사유를 강제할 것이다.



下편에서 이어집니다.

https://brunch.co.kr/@qusalsdnr123/62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