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속 김경주 시에 대한 단상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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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선 시가 관념적이고 추상적으로 비춰질 수 있겠지만 그의 시는 결코 관념적이지 않다. 그가 쓰는 시는 오히려 관념보다는 “외로운 날엔 살을 만진다”(「내 워크맨 속 갠지스」)는 표현에서 드러나듯 살의 논리의 직접성과 확실성에 기댄다. 머리도, 심장도 아닌 살의 논리에 기반한 그의 시는 자신의 살을 만지는 익숙함과 타자의 살을 볼 때의 낯섦이 만들어낸 양날이 제주장을 하며 공존한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시는 관습적인 사유에서 벗어난 낯설고 부담스럽기까지 한 감각의 과잉이 존재한다. 그리고 관습을 탈피한 낯섦과 부담이 우리에게 사유를 강요한다. 바로 다음과 같은 시다.
릴케의 뜨거운 서시(序詩)를 앞에 놓고 자위를 해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사랑은 그대라는 성(城)안으로 들어가 평생 시만 쓰며 살겠다는 것임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다 (중략) 우리는 절박하게 부패해가는 생의 오류만을 시라고 불렀다 칸의 파오를 찾아가지 못한 지 오래다 나는 칸과 자고 일어났을 때 목 졸라 죽이고 싶은 적이 몇 번 있었다 우리에게 생을 증거하는 것은 고통뿐이었지만 우리의 면죄부가 고통 그 자체일 순 없었다 이렇게 말하고 나면 우리는 근사한 기분이었다
「비정성시」 부분
“릴케의 뜨거운 서시를 앞에 놓고 자위를 해본 적 있는 사람”과 같은 표현은 참신하다는 표현을 넘어 부담스럽다. 그러나 이 부담이 우리에게 사유를 강제한다. 릴케는 서시에서 “네가 누구라도, 저녁이면/네 눈에 익은 것들로 들어찬 방에서 나와보라”로 시작한 시를 “네 의지가 그 세계의 뜻을 파악하면/ 너의 두 눈은 그 세계를 살며시 풀어준다”라고 끝을 맺는다. 이러한 시를 보며 그는 자위를 하는 것이다.
자위란 무엇인가. 두 눈을 감아 쾌락이라는 환상적 착란의 형식 속에서 그 대상을 욕망하면서도 내용으로선 두 눈을 뜨면 그 대상의 처절한 부재를 느끼는 것이다. 또한 재확인한 부재의 경험 통해 대상에게 결코 다가갈 수도 나아갈 수도 없음을 주체는 깨닫는다.
삶에서 이런 ‘자위’가 반복된다. 욕망은 실로 내 안의 또 다른 타자다. 이 타자의 고통을 느껴본 적 있는 사람만이 다음과 같은 시인의 사랑을 이해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사람이다. “그대라는 성(城) 안으로 들어가 평생 시만 쓰며 살겠다는 것”의 일반론적 의미는 당신이라는 폐쇄적 세계에 들어가 그곳에서 틀어박힌 체 당신 속에서 시를 쓰겠다는 것이다. 즉 플라톤이 말했던 것처럼 당신을 비유함으로써 멀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김경주에게는 비록 영원히 닿을 수 없는 지향점일지도 모르지만 감각함으로써 당신에게 가까워지는 일이다. 그로 인해 다음과 같은 묵직한 전언이 도출된다. “우리는 절박하게 부패해가는 생의 오류만을 시라고 불렀다.” ‘자위’라는 감각이 ‘시학’이란 사유로 전환되는 순간이다. 반대로 사유가 감각으로 전복되는 순간은 다음의 시에서 드러난다.
이것은 5~6억 년 전부터 살아남은 캄브리아기 생물들의 절대음감에 관한 얘기다. 젖을 먹고 자란 새들이 날개를 펼쳐놓고 고공에서 알 수 없는 바닷속을 내려다보고 있다 새들의 눈은 그런 해저의 동굴 안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몇 백만 킬로미터의 바람을 날아와 새들은 물 안의 시간들만 바라보고 있다 새들은 아무도 모르게 말라간다 사람들은 아무도 새들이 마르는 것에 참여할 수 없다 (중략) 마르고 있다는 건 점점 세계 밖으로 희미해지는 일이란다 아무도 모르게 바닷속 이름 없는 동굴의 벽에 거꾸로 매달려 있다가 다시 우리가 모르는 이국(異國)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파이돈」 부분
“이것은 5~6억 년 전부터 살아남은 캄브리아기 생물”들에 대한 이야기다. 수백만 킬로미터를 날아온 새들이 동굴 속에서 물 안을 바라보고 있다. 새들은 점점 말라간다. 그러다 또 다른 이국으로 돌아간다. 앞선 정도의 감상을 했다면 이 시의 제목을 너무 간과한 해석이다. 왜 그가 파이돈이라는 제목을 굳이 붙였을까 생각해봐야 한다. 「파이돈」은 플라톤이 그의 주요 철학 중 하나인 이데아(idea)를 체계화하기 시작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위 시에서 새 대신에 사람을 넣고 찬찬히 살펴보면 플라톤이 이데아를 말하며 사용했던 동굴의 비유와 맞아떨어진다. 인간이 동굴 속에서 그림자를 바라보며 아무도 모르게 말라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동굴 밖의 이데아란 무엇인가. 그것은 완전한 원형이며 본질이다. 하지만 그는 앞서 플라톤 조차 시인이었다는 사실을 왜 몰랐냐고 이야기하며 그의 시인 추방론을 비판했다. 그래서 그는 파이돈을 차용하면서도 원형이 아니라 기형을 노래한다. 왜 원형을 차용하면서도 기형을 노래하는가. 이 순간 사유가 감각을 이끈다. 삶이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이란 태생적으로 완전하지 못한 존재다. 이와 같은 사유가 김경주라는 공명통을 거치면 “점점 말라가다”로 느껴지며 그 결과 “점점 세계 밖으로 희미해지는 일”로 연주된다. 이러한 사유는 다음 부분에서 확장되어 나타난다.
눈이 없는 물고기들은 어부들이 다시 심해로 돌려보내 준다 처음 그물질을 배울 때 그들은 물고기들이 바닷속에 사는 음악이라는 것을 익혔다 해저에서 백 년에 한 번쯤 눈을 치켜뜨고 물을 떠나 날아가는 새를 바라보는 물고기나 물 밖에서 백 년은 새의 눈을 따라 항해하는 어부들은 고요의 바닥에서 눈을 감는 일이 적요로운 일임을 안다 그들의 몸이 점점 가늘어지는 것은 자신의 눈들이 조금씩 인성의 밖으로 퇴화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나에겐 돌에게 잠시 번진 물고기의 무릎도 없고 물고기의 보일 듯 말 듯한 슬픈 귀들도 없지만 조금씩 가늘어지는 몸이 있으니 아무도 모르게 말라가는 것이 점점 너에게 가까워지는 것인지 모르겠다 몇 달가량 집을 비우고 돌아와 보니 욕조에 말 한 마리가 배를 깔고 앉아 있다 그 말은 또 다리를 어디다 둔 것일까 이것은 기형(畸形)에 관한 또 다른 얘기다.
「파이돈」 부분
이런 그에게 생명체 각각은 하나의 음악으로 존재한다. 어부들은 물고기를 낚아 올리면서 심해에서부터 고독하게 연주해온 하나의 음악을 듣는다. 그러나 그 음악을 누구나 쉽게 청취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무릇 어부란 직업은 “새의 눈을 따라 항해하는”일 이기 때문에 들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어부에게는 “돌에게 잠시 번진 물고기의 무릎”도 존재하지 않고, “보일 듯 말 듯한 슬픈 귀들”도 없다. 그러나 그 어부 또한 다음과 같은 동질감을 느낀다. 이 동질감은 “고요의 바닥에서 눈을 감는 일이 적요로운 일임”을 아는 것에서 비롯된다.
이런 동질감을 느낀 그의 몸은 점점 가늘어진다. 고통은 절대성에는 누구도 의문을 제기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나의 고통이란 타자와 공유할 수 있는 감정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도 모르게 말라가는 것”이다. 적요로 움 속에서 깨달은 이런 고통 속에서 어부는 “너에게 가까워지는 것”이다. 생(生)으로 인해 고독한 존재들은 그 고독으로 인해 그 속에서 가늘어지고 기형이 된다.
그렇게 가늘어진 것들 것 기형에서 부재가 된다. “그 말은 또 다리를 어디다 둔 것일까” 다음과 같은 문장에서 그를 가장 잘 나타내는 단어는 다름 아닌 “또”다. 그에게 기형과 그로 인해 빚어진 부재는 ‘또’ 있는 일이다. 일상적이고 불가피한 일이다. 그래서 시인은 “기형에 관한 또 다른 얘기”를 하려고 다음과 같은 서론이자 결론을 맺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