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탈정치(脫政治)학

어순(Word order)을 중심으로

by 변민욱
불가피하게 오늘은 내가 너를 사랑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없으니 오늘은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 눈이 너로 인해 번식하고 있으니 불가피하게 오늘은 너를 사랑한다 오늘은 불가피하게 너를 사랑해서 내 뒤편엔 무시무시한 침묵이 놓일 테지만 너를 사랑해서 오늘은 불가피하다

불가피하게 오늘은 내가 너를 사랑해서 이 영혼에 처벌 받을지 모르지만 시체를 사랑해서 묻지 못하는 사제처럼 불가능한 영혼을 꿈꾼다 환영에 습격받은 자로서 나는 사랑하는 사람이 없으니 불가피하게 오늘은 너를 사랑한다 오늘은 몇천 년 전부터 살았던 바람이 내 머리칼을 멀리 데리고 날아갈 것이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없으니 불가피하게 오늘은 내가 너를 사랑한다

김경주, 연두색 담배의 마지막 한 모금,「몽상가」中




우리는 종종 단어들의 순서(Word order)의 중요성을 간과하며 살아간다. A, B, C를 나열해본다고 가정하자. 그렇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파벳 순서대로 위와 같이 A, B, C를 나열할 것이다. 소수의 사람들은 BAC(blood alcohol concentration)를 연상하며 BAC를 나열하기도 하겠지만 이와 같은 경우는 소수일 것이며 억측(臆測) 일 것이다. CAB나 여타의 경우의 수도 그러할 것이다. 어순의 문제는 위와 같은 명확히 제도가 확립되어 있을 때보다 가치가 개입해야 할 때 더욱 중요해진다.


간단한 예시로는 하나의 고유명사가 되어버린 '한일전(韓日戰)'이 있다. 보통의 한국인이라면 '일한전(日戰)'이라 표현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북미 정상 회담'과 '미북 정상회담' 은 어떤가. 우선적으로 오는 단어로 북한이 올 것인가. 혹은 미국이 올 것인가. 여기에 이제 중국과 일본 그리고 러시아까지 순서(Order)를 배열해야 한다면 이는 꽤나 골치 아픈 문제가 된다. 제도화되어있지 않은 어순을 나타낼 때 사람은 개인적 가치를 반영하면서도 동시에 이를 볼 사회의 인식을 동시에 반영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 이용해서 외교나 국제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더 해 봐도 재밌겠지만 나는 문득 스친 생각을 잡아 글을 써보려고 한다. 쉰 번째 글이니 만큼 사랑의 어순(Word order)에 관해서다. 3월에 캠퍼스를 산책하다 보면 벚꽃의 색감이 어울리는 남녀들이 손을 잡고 걸어다는 것을 종종 볼 수 있었다. 앞선 나의 문장은 과거형이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길 바란다.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 중 한 명으로서 나는 그들이 써 내려갔을 고백의 말이 궁금해진다.


그들의 우주 속에서 그 문장은 내가 읽은 어떤 시구(詩句)나 소설의 문장보다도 위대한 문장이기 때문이다. 사실 떠올려보면 고백의 문장들은 꾸밈없이 진실됨으로써 아름다웠다. 문장으로 옮겨보자면 다음과 같다. '나는 철수를 사랑한다.' 사실 네이버에 어순을 검색했을 때 다음과 같은 예시 문장이 사전에 나와서 깜짝 놀랐다. 이 글에서 이야기하고 싶었던 바를 모두 담고 있는 문장이기 때문이다.


위 문장이 위대하더라도 정확한 문장인지에 관한 의구심을 지울 수가 없다. 원래 위대한 문장일수록 많은 검증을 거쳐야 하는 법이다. 우리는 위와 같은 중요한 문장을 너무 무의식적으로 써왔다. 위에서 나는 어순의 중요성에 관한 이야기로 글을 열었다. 혹자가 내가 예시로 든 간단한 예시들에 대한 사유의 흐름이 참신하다고 생각했다면 이는 구태여 많은 생각을 하지 않고 어순을 사용하고 있음에 대한 반증이다.


언어의 사회성에 따라서 사람들이 사용하는 단어를 수용하고 그 제도 속에 갇혀있었던 것이다. 사랑에 관한 한 그에 따른 결과로 우리는 제도(制度) 속에서 사유했고 고백했으며 사랑해왔다. 이 문장에서 우리는 아래(마음)를 보면서도 위(문법)를 고려해야 하며 옆(너)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 문장은 도대체 어디를 봐야 하는가. 이글에서 만큼이라도 문법을 잠시 과감하게 벗어나서 이 문장의 중요성만큼의 사유를 기꺼이 바쳐보려 한다. '무엇을 말하는 가'를 부디 묻지 마시고 오히려 '이 글이 어디로 가려하는가'를 묻는 것이 훨씬 생산적일 듯하다.


일단 '사랑'이란 단어의 우주에서 '나'의 행성은 '너'의 것보다 우선하는가? 아니다. 당신과 내가 경험한 바에 따르면 시기적으로 적어도 위와 같은 고백의 순간까지는 아니다. 그렇다면 애초에 이 우주의 빅뱅이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빅뱅을 초래한 것일까. 비록 나의 자아 속에 국한된 이야기더라도 나와 너 사이 유의미한 순서상 전복(顚覆)이 일어났기 때문에 그 우주가 탄생한 것이다. 굳이 '너'나 '철수'가 아니어도 된다. 세상에는 수많은 불가해(不可解)한 너와 철수가 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불특정 다수를 나타내는 목적어를 나타내는 명사가 아니다. 그 목적어를 사랑하는 나의 동사이며 태도를 나타낼 부사다.


그렇다면 '철수를 나는 사랑한다'가 문법적으로는 오류가 있더라도 상황에 더 적절한 문장이 아닐까. 이 문장은 오히려 내가 사랑하는 대상을 나보다 우선적으로 배열함으로써 문장 속에서 주어화시킨다. 이를 통해 사실 이 사랑이라는 우주 속에서 숨 쉬는 주체는 나일지라도 주인은 당신임을 표한다. 그러나 여기서 끝내기에는 너무 간단하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까지 나아가야 한다. 하지만 분명히 길을 잃을 것이다. '너'가 먼저인가 '사랑'이 먼저인가. '너'는 사랑으로 인한 불가피한 대상인가 아니면 '사랑'이 너로 인한 불가피한 피조물인가.


결론으로 삼으려 앞의 두 개의 질문을 만들어 봤다. 이와 같은 질문에 맞닥뜨리는 나는 이 문장을 쓰는 주체인 동시에 대상에 의해 쓰이는 주체이다. 이런 나는 당신의 답이 궁금하기도 하다. 이러한 고뇌의 흔적으로 수많은 서정시와 소설이 타자 윤리학과 회의주의 사이에서도 끊임없이 나오는 듯하다. 코기토가 삶의 모든 것이기도 하지만 그 경계를 벗어난 부분을 삶이 아니라고 부를 수도 없지 않은가. 길을 잃었으니 그 핑계로 한 동안 방황을 즐겨보려 한다. 그러고 나서 내가 가려했던 길을 잊어버렸을 때 다시 여기서 길을 시작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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