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 번째 시에 부쳐
요즘 학교에서 '문예창작 이론과 실제'라는 수업을 수강하고 있습니다. 사실 글을 쓰면서도 한 번도 'ㅇㅇㅇ의 글쓰기' 'ㅇㅇㅇ의 문장'과 같은 책을 펴본 적이 없습니다. 그 정도는 이미 지났기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내 글을 써보고 싶다는 제 특유의 고집이자 아집 때문입니다. 그래도 한 번 어떻게 쓰는 것인지 공부해보고 싶어서 수업을 들으며 배워가고 있습니다. 또한 용기를 내서 제 글을 교수님께 보여드리면서 많은 가르침을 받고 있습니다.
이전의 글 '어항 속의 붕'은 사실 이번 주에 제출할 과제물입니다. 제게 시는 늘 동경의 대상이었습니다. 뛰어나지 않은 사람에게 글은 그 길이만큼의 변명의 여지를 허용해줍니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방식입니다. '이 단어는 별로지만 다음 단어에서...', '이 문장은 부족하지만 다음 문장은...' 그러나 시는 그와 같은 변명의 기회를 주지 않습니다. 모든 단어와 조사들이 빈틈없이, 혹은 그 빈틈조차 의도적으로, 그림을 그려내야 합니다. 그래서 '시를 써보고 싶다'는 언젠가의 소망은 그 정도로 언어를 조각할 능력이 없는 제게는 늘 동경이었습니다. 그래도 용기를 내서 한 번 써봤습니다.
엄마! 양팔을 자른 난 그림을 그리기 위해
검은 담즙을 토해내 먹으로 삼고
입에 붓을 물고 자화상을 그리며 사는 무능한 환쟁이랍니다.
나는 매번 눈을 그리는 데는 실패하지요.
엄마! 세상이 비와 입을 맞추는 날엔
저는. 새장 속에서 연어와 새를 그려
보아요. 날개가 지느러미까지 찢겨버린
연어를 봐요. 새였다는 기억을 잊어버린
사람들을 봐요. 탄생조차 스스로 결정하지 못한
엄마! 비가 그치면 이제 나는 가야 해요.
바다를 잊으러 가야 해요. 새가 될 때까지 헤엄쳐야 해요.
허리가 절로 굽는 이 춤이 난 마음에 들어
요. 모두가 하나씩 고무밴드를 허리에 묶어
요. 훌쩍훌쩍 모래성 속을 헤엄치다 보면
숨이 차요. 어머니! 내 아가미에 모레가 서걱거려요.
다시 어항 속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날개가 되진 못할 이 저주받은 지느러미를
나의 죽음이 태어난 당신의 물속으로 파닥거리며,
늦기 전에 무(無)로 기꺼이 돌아가는 비의 달콤한 향수와 함께
'어항 속의 붕(鵬)' 전문
'양팔을 자른'은 이 시에서 가장 오랜 시간 고민했던 표현입니다. '잘린' '자른' '닳은' '잘라버린' '잘려버린' 등 수많은 선택지 사이에서 고민하다 어렵사리 하나를 골랐습니다. 난해하지만 너무 난해하진 않고 또 행위의 주체성을 어느 정도 담고 있는 표현이라 마음에 들었습니다. 글을 써오는 동안 많은 고민이 훼방을 놓고 갑니다. '내가 이렇게 낭만적인(글을 쓰는 과정은 전혀 낭만적이지 않지만) 생활을 할 때인가' '그럴 수 있는 세상인가'와 같은 고민입니다. 그러한 고민을 덜기 위해서 저는 팔을 자르고 직무에서 벗어나 글을 씁니다
그러나 아직 '쓴다'는 표현을 쓸 수 있을 만큼의 깊이는 아닌 것 같아 그 표현을 거둡니다. 그래서 붓을 입으로 그림을 그리는 환쟁이입니다. 현대 멜랑콜리(Melancholy)의 어원이 된 몸에 흐르는 검음 담즙을 토해내 수묵화를 그립니다. 남을 그리는 것이 힘들어 다만 저를 그립니다. 그러나 이조차도 아직 눈을 그려 넣기에는 힘에 부칩니다. 눈을 그리는 순간 저는 그와 눈을 마주쳐야 하지만 아직 그럴 용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연어와 새를 떠올려봅니다. 우리네 삶과 흔히 비교하는 이 둘을요. 물론 강가에 직접 가서 보는 것이 아닌 창 밖으로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그려봅니다. 이 비를 맞으면서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들을 볼 때면, 알을 낳기 위해 날아가는 철새들을 보면 다음과 같은 생각에 이릅니다. '저 연어도 언젠가 새였던 적이 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입니다.
퍽 슬픈 상상입니다. 그렇다면 저 힘찬 날개가 지느러미까지 찢긴 것이며 그래서 날 수 없는 것일 테니까요. 이런 생각을 가지고 2연을 썼습니다. 그래서 '날개가 지느러미까지 찢겨버린/ 연어를 봐요. 새였다는 기억을 잊어버린/사람들을 봐요. 탄생조차 스스로 결정하지 못한' 보는 대상은 그 이전과 그다음 시구의 주체가 돼도 자연스럽고 맥락을 공유할 수 있도록 써봤습니다. 그리고 어느새 생각은 사람에게까지 닿습니다.
'비가 그치면 이제 나는 가야 해요.'는 '언어의 정원'을 떠올리며 적었습니다. 또한 출근 혹은 통학길에 갑작스레 비가 오면 잠시 비를 피했다가 다시 일상 속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을 떠올리며 썼습니다. 그래서 비가 그치면 저 또한 위와 같은 사색에서 빠져나와야 합니다. 어릴 적 꿈꿨던 아니면 언젠가 되어 본 적 있는 새가 되기 위해서 뭍으로 올라온 망둥어라는 사실을 잊을 때까지 헤엄을 쳐야 합니다.
'허리가 절로 굽는 이 춤이 난 마음에 들어/요. 모두가 하나씩 고무밴드를 허리에 묶어/요. 훌쩍훌쩍 모래성 속을 헤엄치다 보면' 꿈을 이뤄나가는 것 같으면서도 쳇바퀴를 도는 것 같은 일상을. 그 어쩔 수 없는 회귀성과 그 안의 비애를 '고무밴드를 허리에 묶어'라는 표현으로 그려보려 했습니다. 그래도 부족한 듯해서 끝을 보려면 다시 행의 처음으로 회귀할 수밖에 없게끔 효과를 어설프게 넣어봤습니다. 또한 헤엄쳐 가야 할 곳 그리고 헤엄쳐가는 나 또한 사상누각(砂上樓閣)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저는 바다가 아니라 모래성 헤엄치고 있던 것입니다.
'숨이 차요. 어머니!' 위에서도 잠시 저를 망둥어라고 표현했지만 '따뜻한 남쪽나라'에서 '육지'로 올라온 저는 가끔은 이 서울살이가 힘겹습니다. 그러나 그런 어리광을 그려내고자 마지막 행에 어머니를 부른 것은 아닙니다. 그보다는 '사람들을 봐요. 탄생조차 스스로 결정하지 못한'과 질감이 비슷한 고민입니다.
'수많은 생명체를 보면서, 그중에 가장 고등하다고 자부하는 인간들조차 삶의 시작과 끝을 스스로 정할 수 없다면 이 모든 담론과 이야기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생각이 듭니다. 이 모든 생각이 합쳐져 나의 죽음이 태어납니다. 날개가 되진 못할 이 지느러미를 그래서 비가 그치고 비가 하늘로 되돌아 가는 것을 각각 부끄럽고 부럽게 쳐다보면서, 어항 속에 있는 붕(鵬)은 태초의 어항 속으로 돌아가고 싶어 합니다. 향수(鄕愁)를 느끼면서요.
비를 보고 '움직이는 비애'라 표현한 시인이 있었다. 그 시를 읽은 후론 갑작스레 비가 오는 날이면, 비를 피하면서 함께 비를 피하는 사람들의 표정을 본다. 사람들은 이 움직이는 비애를 보며 무슨 생각에 잠겨 있었을까. 짜증을 내는 사람도 있지만 모두가 그런 표정을 짓고 있진 않다. 오히려 누군가는 짜증도 잠시 오랜만의 비가 반가운 듯 누군가를 떠올리며 미소를 짓는다. 번듯한 정장을 입은 체 한숨을 내뱉는 직장인은 어떤 꿈을 갖고 있었을까. 과잠을 입고 핸드폰만을 보고 있는 저 신입생처럼 보이는 사람은 어떤 꿈을 안고 대학에 왔을까. 비가 오는 동안의 짧은 사색이 그들 하루에, 삶에 어떤 영향을 줄까. 그리고 생각대로 삶이 진행될까. 그 생각들을 헤아리기보다 늘 비가 먼저 그친다.
비가 그치면 멈추던 생각을 시를 적기 위해서 연장해본다. 하늘로 되돌아가는 비를 보며 사람의 삶의 태도를 나타내는 비유에서 종종 언급하는 연어와 새를 떠올려본다. 이 비를 맞으면서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와 알을 낳기 위해 날아가는 철새들이 내 머릿속에서 겹칠 때 다음과 같은 생각에 이른다.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도 언젠가 새였던 적이 있지 않았을까'와 같은 생각이다. 이 생각을 붙잡아 시를 썼다. 비애와 허무함을 어설프게 노래했다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 둘을 노래하기엔 아직 삶의 깊이가 너무나 얕다. 내가 살고 바라보는 곳은 비가 오는 날보다 맑은 날이 많지만 내가 생각하는 곳에선 장마가 끝날 줄 모른다. 세상을 아름답게 그려내는 데는 매번 실패하며 이는 내 능력 밖의 일임을 깨달았다. 그래서 어설프게나마 가능한 글을 써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