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트맛 아이스크림과 동성애

박상영의 소설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

by 변민욱


youngwriter.jpg 앞으로 그들의 글에 기대를 갖게 하는 소설집


내가 대학교에 입학했을 무렵 유행처럼 떠돌았던 한 마디가 있었다. 바로 “취향입니다. 존중해주시죠”였다. 이 말과 관련해 다음과 같은 사건이 있었다. 어느 날 친구와 함께 베스킨라벤스에 갔었다. 이 곳은 정말 다양한 맛이 진열되어 있어 올 때마다 무슨 맛을 먹어야 할지 고민이 된다. 무슨 맛을 먹어야지 같이 고민하고 있는데 한 친구가 덥석 '민트 맛'을 골랐다.


나 또한 민트맛 아이스크림을 정말 좋아하긴 하지만 워낙에 호불호가 갈리는 맛이라 선뜻 말하지 못하고 있었다. 일순간 분위기가 아이스크림 냉장고 안 마냥 냉랭해지자 그 친구가 입을 열었고 상황은 평화롭게 종결되었다. "제 취향입니다. 존중해주시죠"였다. 모두 그래 "취존. 취존 해야지 시대가 어느 땐데"이라 말하곤 고개를 끄덕이며 나머지 두 개의 맛을 더 골랐다.


박상영의 소설을 읽고 나는 문득 민트맛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었다. 소설 속, 영화를 전공하는 '나'는 자이툰부대에 파병을 갔을 때 현대무용을 하는 부대원 '왕샤'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흔히 퀴어 문학에서 주요 소재로 다뤄지는 정체성의 혼란과 이에 따른 고통과 방황은 없다. 왕샤가 약간의 혼란을 겪긴 하지만 잠시 뿐이다. 소설 속 그들은 지극히 평범한 인물이다. 평소에는 격 없이 친근하게 지내다 몰래 빼돌린 술을 나눠 마시고 막사에 둘 만 남게 되면 사랑을 나누는 인물들이다. 이들의 사랑에 대한 특별한 반전이나 메타포(metaphor) 또한 없다.


박상영은 우리가 섹스(Sex)가 아닌 젠더(Gender)가 사회를 변혁해 나가고 있는 사회 속에 살면서 평등을 이야기하면서도, 편견에 갇혀 연민과 동정의 시선으로 성소수자들을 바라보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소설을 통해 이야기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동성애와 민트맛 아이스크림을 좋아하는 게 뭐가 다르냐고. 너희 정말 민트맛 아이스크림을 먹어보기는 하고 이야기를 하는 거냐고. 나의 문장을 박상영의 그것으로 옮기면 다음과 같이 된다. "성적 소수자가 뭔지 알기는 하냐. 알리가 없지. 특별하고 이상한 섹스를 하는 애들 같겠지(p.287)"


처음 강렬한 키스를 둘이 나눈 후 왕샤는 나에게 말한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나'가 답한다. "그런 사람이 뭔뎨."(p.272) 이 물음에 왕샤는 자신이 과거에 여자 친구도 있었으며 원래는 그러는 사람이 아니고 그럴 생각도 없었으며 실수였다고 말을 뭉개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런 사람'은 누구이며 '그런 사랑'이란 어떤 사랑일까. 우리는 앞선 상황에서 왕샤보다 더 나은 대답을 '나'에게 할 수 있었을까? 그동안 우리는 묵비권을 행사하지 않았었다. '이성애자'인 우리는 '그들'에 관한 퀴어 문학이나 영화에 대해서 무수한 찬사와 혹독한 비난 혹은 '아름답다'와 '역겹다' 사이를 오가는 변호와 비평을 쏟아 냈지 않은가. 어쩌면 우리는 비트겐슈타인이 말했던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라는 금기를 어기고 너무 많을 말을 했는지도 모른다.


또한 모호한 명명은 모종의 편견을 수반한다. '그런 사람'이라니 너무 모호하지 않은가. 심지어 이런 명명은 소설 속에서만 등장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성소수자들을 지칭하며 일상 속에서도 "왜 그런 사람들 있잖아"라고 운을 뗀다. 심지어 "나는 그런 사람들도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해"라고 말하면서조차도 그 대상을 구체화하진 않는다. 대상과 매개할 수 없는 존중을 우리는 진정한 존중이라 부를 수 있을까.


물론 그들이 소외되거나 상처받지 않게 존중해야 했던 건 맞지만 어쩌면 이 조심스러움과 모호성이 그들의 다양하고 일상적인 모습을 바라보는 것마저 흐려버리지는 않았을까. 이러한 맥락에서 모호성이 개인에 국한한 문제였을 때 이는 개인의 도덕에 관한 문제 정도다. 하지만 그들을 타자가 예술의 대상으로 소비할 때, 이 문제는 예술과 윤리에 결부된 문제로 심화된다. 작가는 이에 대한 뿌리 깊은 거부감을 표명한다. 이런 거부감은 작품 속에서 다음과 같은 대화로 승화된다.


그러는 오 감독님이야말로 동성애가 뭔지는 알고 하는 소리예요?

있다마다요. 저는 이번 영화 만들려고 게이바에서 일도 하고, 자료 조사도 철저히 했어요. 그러다 보니 알겠더군요. 그들이 얼마나 공허하고 고통스럽게 살고 있는지. 매일 술을 마시고 약에 취해 익명의 남자들과 섹스를 하고. 성병에 걸려 고통받고. 당신이 그런 속사정을 안다면 그렇게 쉽게 웃고 떠드는 영화를 만들지는 않았겠죠

닥치세요. 제발.
지금 뭐라고 했어.
닥치라고 씨발

(p.247)

오 감독은 소설 속 '나'가 "가짜 게이 새끼"라고 부르는 인물이다. 이성애자로서 게이바에서 그들과 함께 한다고, 자료 속에서 그들을 본다고 과연 그들을 진정 '제대로 보았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더군다나 이러한 일련의 과정만으로 타자의 고통을 그려낼 수 있을까. 이는 안타깝게도 그러나 엄연하게 불가능에 속하는 영역이다. 물론 그 또한 개인의 도덕적 기준에 맞춰서는 최선을 다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윤리의 측면에서 그는 완벽하게 실패했다. 자신의 땅을 두 발로 디디며 타자의 영역을 그리고자 할 때는 신중해야 한다. 특히 이 미지의 영역이 사회적 소수와 결부되어 있을 때는 더더욱 신중하고 겸손해야 한다. 왜냐하면 붓에 그들이라는 물감을 묻히기도 전에 이미 연민과 동정이라는 당신의 색이 묻어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 '나'가 자신의 일기와도 같은 "동성애 영화 찍은 거 아니고 그냥 연애하는 영화"에 대한 한 평론가의 평을 살펴보자. "박 감독 너무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말고 잘 들어봐. 박 감독의 영화는 사실 특별한 지점이 부족해. 퀴어 영화다운 그런 지점. 동성애자들에 대한 감독의 성찰이 부족하달까? 그냥 일반인들 연애 얘기랑 다른 지점이 없잖아. 젊은이들이 나와서 술 먹고 춤추고 성관계하는 게 전부인데." 실제 그러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주체보다 관찰자가 더 우월한 지점에서 말을 할 수 있을 수 있을까. 그러한 '지점(地點)'은 어느 '지점(支店)'에서 찾을 수 있을까.



모호성과 조심스러움이 흐려놓았던 '그런 사랑'을 하는 '그런 사람'에 대해서도 작가는 이야기한다. 그 사람이 '그런 사랑'을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때 '그런 사람'을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당신도 그런 사람이 되어 보라는 직접적인 방법이며, 두 번째 방법으로는 그런 사람이 당신과 다르지 않음을 인식시키는 방법이 있다. 민트맛 아이스크림 문제로 돌아가 보자.


우리는 '취존'을 말하며 고른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도 우리는 끊임없이 그 취향에 대해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이 친구가 우리와 다음에도 민트맛 아이스크림을 함께 먹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이와 결부해 위 두 가지 방법을 생각해보면 첫 번째 방법은 리스크가 크다. 물론 그들이 먹고 생각이 바뀐다면 가장 이상적인 전략이다. 하지만 설득이 잘못되었을 때는 우리에게도 부담일뿐더러 '치약 맛'이 났던 과거를 떠올리게 해 '다름'을 또다시 상기시킬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리스크를 덜면서 우리에게도 불편함을 주지 않는 방법은 다르지 않음을 보여주는 방법이다. 즉 내가 먹는 '민트 초코'나 네가 먹는 '엄마는 외계인'이나 '베리베리 스트로베리' 모두 다 아이스크림이다. 나도 그런 아이스크림을 먹지만 민트가 후천적으로든 선척적으로 그저 내 최애 아이스크림일 뿐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전략이다.


박상영은 서사의 전략으로 이 전략을 택한다. 이 전략을 통해 '왕샤'와 '나' 두 청년이 21세기 한국을 살아가는 여느 청년들과 다르지 않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소설 말미에 이르러 동질감을 주창하면서 결국 '그런 사람'은 한국 사회라는 거울에 비친 당신임을 보여준다.


먼저 '나'에 대해서 간략하게 서술해보자. 그 또한 고등학교 순수예술과 영화를 동경하는 여느 소년처럼 부푼 꿈을 안고 영화과에 진학한다. 그가 자이툰 부대까지 간 이유 또한 순전히, 세상에 없는 퀴어영화를 만들기 위한 예산 때문이었다. 그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에는 한국의 독립영화계에 소소하게 퀴어영화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그 또한 퀴어 된 도리를 다하기 위해 한국에서 개봉하는 영화를 모두 챙겨봤으나 번번이 큰 실망에 사로 잡히고 만다. 그가 본 퀴어영화들은 "하나 같이 과잉된 감정에 사로잡힌 신파"이거나 "투명할 정도로 정치적인 목적을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정도가 "영화를 보다 없던 혐오감이 생겨날 지경"이었다.


그래서 '나'는 혐오를 창작의 모티브로 삼아서 태초의 선지자가 되겠다고 결심한다. "대상화해 신파로 소모해버리지도 않는 순도 백 퍼센트의 퀴어 영화를 만드리라." 이후 돈을 조금 더 보태 졸업영화를 찍지만 보기 좋게 실패한다. 이후에도 끊임없이 실패하며 위에서도 언급했었던 오 감독의 성공을 정확히 한 걸음이 부족해 목도하기만 해야 했다. 이후엔 종로 조그마한 퀴어 영화사 사무실에 앉아서 곰팡내를 맡으며 저작권을 침해하는 파일을 찾아내는 일이 주 업무가 되었다. 한 때는 "내가 이러려고 죽도록 공부하고 돈 벌어서 영화과를 나왔나, 자괴감이 들었던"적도 있었다. 하지만 옛날이야기고, 지금은 제 때 월급 나오는 일이 감사한 서른이 넘은 직장인이었다.


왕샤는 또 어떤 인물인가. 그가 예술을 하게 된 것은 아버지의 뜻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가난한 집에서 예술에 대한 동경을 품고 자란 전형적인 자수성가형 인간이었다. 아버지는 성공에 저당 잡혀버린 자신의 인생이 아들의 인생과 동일하지 않기를 바랐다. 예체능 영재교육을 받았지만 신통치 않은 하루하루를 보내다 그는 문득 현대무용과 마주하게 된다. 이후 현대무용에 전념하며 그는 고등학교 때부터 지구 상 거의 모든 콩쿠를 출전했다. 물론 번번이 예선에서 탈락했다. 그때부터 자신의 몸에서 냄새가 나는 것 같다는 강박에 시달리게 되었고 향수와 양치에 강박증적인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입대하기 직전, 그는 그리스와 독일의 저명한 현대 무용 콩쿠르의 본선에 진출하는 데 성공했다. 눈 앞에 있는 꿈을 잡기 위해 그는 자신의 칼인 성실성을 최대한으로 갈아 휘둘러 봤지만 헛스윙에 그쳤다. 그가 혼신을 다한 작품 「나는 세상의 아주 작은 점이다」는 그 노력의 결과가 '나는 고작 세상의 아주 작은 점도 아니다'를 왕샤에게 뼈저리게 느끼게 했을 뿐이다. 결국 입상에 실패하고 돈은 돈대로 다 쓰고, 다 늦은 나이에 군대에 끌려오다시피 오게 됐다. 이후 서른이 넘은 나이에 외항사에 취직하기 위해 전전하지만 결국 다 실패하고 어느 한 은행에 겨우 취직하게 된다.


김애란 작가의 「서른」 중"'너는 자라서 내가 되겠지. 겨우 내가 되겠지"를 읽고서 눈물을 흘리지 않은 대학생들이 있을까. 그리고 작가들이 있을까. 갑작스럽게 도입된 입학사정관 제도에 걸맞은 인재가 되기 위해 정외과를 지망하기 위해서는 외교관, 경영학과를 위해서는 CEO 아니면 사회적 기업가, 국문학과에 가기 위해서는 작가 등 수많은 거창한 꿈들이 요구되었다. 대학 입학 후 이 제도가 꽤나 잔인한 제도였음을 나는 대학에 입학하고 머지않아 깨달았다.


그들 중 과연 몇이나 그 꿈을 이뤘을까. 외교관은 지망하던 B는 대학별 합격자를 보며 절망하며 취직을 결심하며 경영학과를 복수 전공하고, 젊은 CEO가 되겠다던 L은 요즘 회사들은 글을 잘 쓰고 인문학적 소양을 요구한다면서 국문학을 복수 전공하고, 국문학과에 간 K는 이들의 세태를 비난하며 등단만이 살 길이라면서 매일 쓰고 찢은 글을 매트릭스 삼아 잠을 겨우 청한다. 아 최근에 K는 코딩 수업을 듣는다고 했다. 이것도 글이 아니냐고 하면서. 이들이 소설 속 '나'와 왕샤를 현실에 고통스럽게 영사한 버전이 아닐까.


"재능이 없는 건 알고 있었어. 여기까지 끌고 온 건 그냥 오기였는지도 모르지." 작가는 그렇게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가 흘리는 눈물을 써내려 간다. 왕샤가 실패를 겪은 후 향수와 양치에 집착하는 일 또한 조금은 편집증적이고 또한 도착 증적인 행태이다. 소설 마지막에 이르러 그들은 술에 취한 체 노래방에 갔을 때 도우미를 부르지 않자 시간을 빼버린 주인에게 분노하고 마이크를 훔치지만 실패한다. "우리는 이성애자들로부터 마이크조차 훔치치 못했어"


이 처연한 이야기의 결론은 결국 앞서서 말한 바와 같이 '그런 사람'또한 당신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제 이 글의 결론을 맺자. 우리는 이 젊은 작가를 통해서 드디어 어감 자체도 모호한 '그런 사람'과 '그런 사랑'에 대해 직시할 수 있게 되었다. 독자들이 지구 상 존재하는 거의 모든 퀴어 작품을 들고 와서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 묻더라도 그는 "알 게 뭐람"이라 말하며 펜을 들 것이다. 그는 이미 옳음과 그름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간 곳에서 소설을 쓰고 있다. 그렇게 그의 손을 거친 퀴어 문학은 '게이 소설'이라는 보다 정확한 명명을 통해서 그려질 것이다. 이 단어가 주는 강렬함을 통해 눈에 고인 동정과 연민이라는 눈물과 모호함이라는 눈곱을 제거하며, 발랄한 "진짜 순도 백 퍼센트"의 게이 문학을 써 내려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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