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 사피엔스를 읽고
인류는 인간과 동의어인가? 유발 하라리는 이 용어의 정의로 책을 시작한다. 그는 '사피엔스'는 종의 일원을 지칭하는 말이며, 인류는 '호모 속에 속하는 모든 종'으로 정의한다. 인류와 인간은 동의어가 아니었다. 그러면 어쩌다가 인류에는 우리 사피엔스만 남게 되었을까.
예컨대 에르가르더가 에렉투스를 낳고 에렉투스가 네안데르탈인을 낳고 네안데르탈인이 진화해 우리 종이 되었다는 식이다. 이런 직선 모델은 오해를 일으킨다. 어느 시기를 보든 당시 지구에 살고 있던 인류는 한 종밖에 없었으며 모든 오래된 종들은 우리 오래된 선조들이라는 오해 말이다. ( 「사피엔스」 p.25)
'자비는 사피엔스의 특징이 아니다.' 사피엔스는 15만 년 전 아프리카에 살고 있었다. 다른 인종이 멸종하기 시작한 것은 7만 년 전이다. 사피엔스가 아프리카를 떠나 유라시아로 향할 때 이미 다른 종들은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형재 살인범'이 될 수 있었을까. 사피엔스가 세상을 정복할 수 있었던 비결은 우리에게만 있는 고유한 언어 덕분이다. 유발 하라리가 말하는 인지 혁명이 발생한 시점이다.
우리 언어는 놀랍도록 유연하며 거의 무한 개에 달하는 문장을 만들 수 있다. 처음에는 단순히 의식주와 같은 간단하고도 직접적인 의미 전달 수단에 불과했을 것이다. 예컨대 "사자가 밖에 있다." "강에 물고기가 많이 있다." 정도였을 것이다. 하지만 사피엔스는 점차 복잡한 차원을 말하기 시작했다. 뒷담화와 허구가 등장한다. 현대사회에서는 뒷담화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인식이 많다. 하지만 과거 뒷담화는 무리의 생존과 관련된 문제였다. 뒷담화를 통해 무리 중에서 누구를 믿을 수 있고 없는지가 판명되었다. '허구'의 등장은 인류의 역사상 가장 커다란 사건이었다. 허구를 통해서 우리는 '집단적 상상'이 가능해졌다. 거짓말과 달리 가상의 실재는 대다수의 많은 사람들이 믿는다. 이렇게 고차원 적인 것을 말할 수 있는 능력을 통해 사회구조를 급격하게 변화시킬 수도, 경제활동도 가능해졌다.
하지만 그만큼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인지 혁명을 가능케 했던 것은 이전보다 더 커진 뇌였다. 불을 사용할 수 있게 되자 우리는 음식을 익혀먹을 수 있게 되었다. 덕분에, 소화에 많은 열량이 필요치 않아졌다. 이는 소화기관이 짧아지며 뇌가 발달할 수 있는 여지를 열었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뇌는 크면 클수록 좋을까? 아니다 실상 큰 뇌는 밑 빠진 독이었다. 뇌가 커지면서 우리는 더 많은 식량이 필요했고 근육은 퇴화했다. 과연 이런 진화가 초원에 살았던 사피엔스들에게 도움을 줬을지는 의문이다. 진화는 '눈먼 시계공'이었다.
인간의 또 하나의 큰 특징은 직립보행이다. 여성들은 직립보행에 큰 대가를 치러야 했다. 산도가 좁아졌다. 이로 인해 출산 시 위험이 증가했다. 생물학적으로 인간은 이른 출산을 선호하게 되었다. 동물들 중에서 인간은 가장 미완의 존재로 태어난다. 하지만 이는 마치 뜨겁게 달궈진 쇠가 모양을 낼 수 있듯, 사회화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 주었다.
역설적이게도 수렵채집 사회는 최초의 풍요사회로 평가된다. 농업혁명 이후 농민의 삶은 훨씬 더 불만스러워졌다. 더 열심히 일하는 노동의 대가는 더 열악한 식사였다. 유발 하라리는 농업혁명을 '역사상 최대의 사시극'이라 말한다. 사람들은 왜 이렇게 돌이킬 수 없는 오류를 저질렀을까. 왜 돌이킬 수 없었을까?
작은 변화가 축적되어 사회를 바꾸는 데는 여러 세대가 걸리고 그때쯤이면 자신들이 과거에 어떤 방식으로 살았다는 것을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구증가 때문에 돌아갈 다리가 불타버렸다는 것도 한 이유였다.(「사피엔스」 p.134)
사피엔스는 상상과 사치품의 덫에 제대로 걸렸다. 현대사회에서도 지속되는 "열심히 일하면 내일은 더 나아지겠지"라는 생각은 이미 이때부터 등장했었다. 하지만 늘 바람에 그쳤다. 세계 각지에서 열심히 일하는 농부들은 열심히 엘리트들의 배를 불렸다. 과거 근대 후기까지 세계의 90%는 농부였다. '사치품은 필수품이 되고 새로운 의무를 낳는 경향이 있다'는 역사의 몇 안 되는 철칙이 등장했다.
과거 인지 혁명 시절 때의 협력과 평등에도 금이 갔다. 더 이상 협력이란 단어는 아름다운 단어가 아니었다. 평등은 드물었고 협력 안에는 압제와 착취가 내포되어 있었다. 국가라는 거대한 '상상의 공동체'가 등장한 것도 이 시기다. 이 거대한 상상을 일반 대중들이 믿을 수 있도록 엘리트들은 여러 가지 또 다른 '상상'을 만들어냈다. 메소포타미아에서 문자가 탄생했으며 돈과 제국 그리고 종교가 등장한다.
우리는 모르는 사람과 'ㅇㅇ나라'와 같은 곳에서 거래할 때 그 사람을 믿어서 거래하지 않는다. 다만 그 화폐가치를 믿을 뿐이다. 원숭이에게 우리 5만 원을 보여주며 바나나를 달라고 하면 어떻게 될지 상상해보자. 그런 종이 쪼가리에 바나나를 주는 원숭이는 없을 것이다. 인지 혁명으로 빚어진 인간과 원숭이의 큰 차이점이다. 돈이 만약 공동체와 국가를 무너뜨린다면, 세상은 하나의 크고 비정한 시장에 불과하게 될 수도 있다.
제국은 문화적 다양성과 국경의 탄력성으로 정의된다. 제국의 황제는 표준화를 통해 자신의 통치뿐만 아니라, 작은 문화를 융화시켜 큰 문화를 만드는데도 기여했다. 동아시아 고대국가들이 한(漢)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한의 문물을 수용하며 한반도와 일본에서는 다양한 문화가 꽃을 피웠다. 이후에도 당나라, 송나라 등 수많은 제국들이 뒤를 이었다. 제국이 사라지면 역사에서는 새로운 제국이 등장했다. 서구에서도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로마에서부터 시작해, 이슬람 문화, '해가지지 않는 대영제국'으로 대표되는 유럽의 제국주의가 서사를 이어나갔다. 제국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일반적인 형태의 정치조직이었다.
과학적 발견이 우리를 진보시킬 수 있다는 생각과 결합하지 과학은 난해했던 문제들을 하나씩 풀어주었다. 과학은 산업 혁명과 군사기술이 등장하면서 관계를 맺기 시작했고, 그 관계가 성립되자 세상은 급변하기 시작한다. 산업혁명은 인간이 능동적으로 에너지를 생산하고 새로운 상품들을 만드는 데 일조했다. 그 결과 산업과 정부의 명령에 이전 시대보다 더 복종하게 되었다. 또한 새로운 시간 개념이 탄생했다. 농사를 지을 때 하루는 자연의 주기적인 시간에 의존했었다. 하지만 산업혁명은 시간표와 조립라인을 인간생활에까지 확산시켰다.
현대 사회가 발달하면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인간미'가 없는 국가와 시장에 위협받는다는 느낌을 받는다.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살아왔던 우리는 현대사회에 이르러 소외된 개인이 되었다. 문화가 인간 본성에 이렇게 끔찍한 힘을 보여주는 사례는 많지 않다. 그래서 사회는 또다시 상상의 산물을 만들어낸다. 소비지상주의와 민족주의가 그 보완책이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모르는 수 억 명의 사람들과 공동체 안에 속해 있다는 안심을 하고, 공통의 관심사를 갖도록 사회화된다.
근대 과학은 인간의 생각에도 영향을 주었다. 인류의 학문은 '무지의 혁명'을 통해 전통지식보다 역동적이고 탐구적인 모습으로 변모했다. '아는 것이 힘이다'를 주창하며 과학자들이 나아갔다. 그들은 패배주의적 관념에 사로잡혀있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죽음조차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해결해야 할 문제 중 하나였다. 인간은 게놈지도를 밝혀내고 생명을 복제해내며, 점점 신에게 다가갔다. 이제 거의 다 다다랐다.
우리는 머지않아 스스로의 욕망 자체도 설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마도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진정한 질문은 "우리는 어떤 존재가 되고 싶은가?"가 아니라 "우리는 무엇을 원하고 싶을까?"일 것이다. 이 질문이 섬뜩하게 느껴지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 이 문제를 깊이 고민해보지 않은 사람일 것이다.「사피엔스」 p.586, 사피엔스 마지막 문장)
인류는 끊임없이 기술의 발전을 일구어나가고 있다. 기술의 진보 덕분에 우리는 여러 가지 혜택을 누린다. 우리 삶을 보더라도 많이 편리해졌다. 인류의 영원한 숙제이었던 전염병과 유아 사망률도 상당히 개선되었다. 그러나 역사에 질문을 던져본다. 우리는 이전보다 행복해졌는가? 한국은 급격한 산업화와 경제성장으로 반 세기 만에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냈다. 그 결과 우리는 행복해졌는가? 세계 최고 수준의 자살률과 최저 수준의 행복지수는 그 성장이 만들어낸 숨길 수 없는 상처다.
더욱이 우리 인간만의 행복을 생각할 것인가. 최근의 추세를 보면 사피엔스는 역사상 최악의 포식자로 기어이 등극할 듯하다. 인간에 의한 대멸종이 일어나고 있다. 이렇게 가다가는 정말 남는 종은 인류의 노아의 방주에 탄 가축들 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가 얼마나 멸종을 시켰는지 안다면, 왜 보호해야 하는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인간은 역사상 최악의 포식자에서 멈추지 않는다. 신에게 다가가고 있다. 이 항해의 끝이 파멸일지 축복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유일하게 확실한 점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유토피아'는 결코 유토피아가 아니었으며 '멋진 신세계'도 전혀 멋지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해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