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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변민욱 Nov 08. 2017

끝나지 않을 당신들의 천국 속에서

[북리뷰] 당신들의 천국을 읽고


'당신들의 천국' 저자 故 이청준 선생

 


봄만 되면 그 분홍색  벚꽃이 구름처럼 산을 뒤덮었다. 육지사람들은 봄이 되면  떼 지어 섬으로 와서 이 붉은 섬을 구경하고 돌아갔다. 황톳길과 벚꽃과 그 벚꽃의 분홍색이 원식의 그림자처럼 곱게 점 찍힌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돌아갔다. 분홍색은 절망의 색깔이었다. 누구나 분홍색을 저주했다. P.53





조백헌 원장의 부임으로 소식은 시작된다. 그가 부임한 날, 때마침 섬에선 탈출 사고가 벌어진다. 부임 인사조차 마다한 채 탈출 사고를 조사하려는 원장은 왜 그들이 섬을 탈출하려 하는지 이해하지 모한다. 환자들은 그 이유를 묻는 원장과 대화조차 꺼린다. 


"말을 해봐요. 말을 왜 말들을 않은 거요? "(p.28)라는 절규에 가까운 물음에도 섬사람들은 냉담하다. 

"당신들이 모르는 일이라면 우리도 모르는 일이오."(p.28) 대화 속 말은 서로 벽에 부딪혀 나아가지 못하고 허공에서 부서진다.


이상욱은 이런 원장에게 의심에 기반한 논평을 독자에게 전하는 인물이다. 


"그들은 환자이기 이전에 인간인 거지요. 환자로서의 생존 양식과 일반의 그것을 구별 짓기에 지쳐버린, 그래서 환자로서의 자신의 특수한 처지를 벗어버리고 보다 깊은 충동에 따라 인간으로서 섬을 나가고자 한 사람들이 이들이란 말입니다. ······ 우리로선 얼핏 이해하기 어려운 이 사람들의 행동의 모순은 바로 거기서부터 연유하고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p.39)


 원장의 이해는 '환자로서의 남다른 처지'와 '인간의 보편적인 존재 조건'이 충돌하는 상욱의 말에 닿지 못한다. 그 후에도 원장은 섬을 계속 관찰하며 다음과 같은 생각에 다다른다. "모두들 참으로 무서운 병들을 앓고 있는 중이로군 ······ 몸으로 앓고 있는 것보다 더 무서운 질병을 않아대고 있으니"(p.61-62)


조백헌은 이 환자들을 위한 '여러분의 진정한 낙토'를 구상한다. 그는 사자(死者)의 섬을 재건하기 위해 '정정당당, 인화단결, 상호 협조'라는 구호를 내걸고 실천에 착수한다. 예컨대 축구팀과 오마도 개척 사업이다.


 물론 그의 노력은 선한 의지에 비롯됐다. 하지만 타자(섬사람)와 공감이 부재한 상태에서 착수된 개별적 노력이라는 점에서 분명한 한계를 지닌다. 이상욱을 비롯한 섬사람들에게 원장은 동상을 짓지 않겠노라 다짐을 하지만 운명적으로 타자일 수밖에 없었다. 일제 강점기 시대 주정수 원장의 동상이 끌어내려졌을 지라도 그들 마음속에서는 여전히 동상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가 황희백 노인을 비롯한 평의회의 의결을 거쳐 결정을 내렸더라도 이는 형식적 민주주의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맥락에서 그가 그려나가는 천국은 타자와 불신 속에서 명분의 독재성을 무기로 삼은 그 당시 하향식 개발 독재에 다름 아니었다. 


 이런 개인의 노력 속에서 원장은 섬사람들과 끊임없이 갈등한다. 갈등의 순환고리에서 골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그들에게 회의와 불심이 포름알데히드가 돼 결국 배반이라는 괴물을 잉태하고야 만다. 이에 반해 주체는 점점 더 그 선한 의지의 편집증에 빠진다. 이상욱은 이를 옆에서 비판한다.


"명분이 과정을 속이지 말아야 한다. 명분이 재물을 요구하지 않아야 한다. 천국이 무엇인가. 천국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 속에서 마음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스스로 구하고, 즐겁게 봉사하며, 그 천국을 위한 봉사를 후회하지 말아야 진짜 천국을 얻을 수 있었다. ( p.60)


 명분의 가치가 과정의 그것을 앞설 때, 그들 마음속에서 동상이 재건된다. 그 명분의 가치 속에는 미래의 행복마저 가불 돼 있다. 


"내일의 꿈을 오늘 미리 가불 해주고 그 가상의 현실을 당장 오늘의 그것으로 착각하고 즐기게 하여 진짜 현실의 말들을 잠재워버리는 말의 요술은 이 섬을 다스려온 사람들의 해묵은 수법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오늘의 삶이라는 것이 늘 힘겹고 짜증 나는 사람들에게는 그야말로 지극히 손쉽고 효과적인 지배술 중 하나였습니다."(p413)


오마도 간척공사(1962) <출처:한센병박물관> 


 오마도 간척사업을 둘러싸고 주위에서 압력이 행사되고 갈등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원장은 압력과 갈등을 무릅쓰고 자신이 그린 천국을 완성시키고자 한다. 떠나기 전, 절강제 행사를 치러 원장은 화룡점정을 찍으려 하지만 그것마저 이상욱이나 황 장로에게 저지당한다. 처음의 선한 의지는 빛이 바래고 화려한 퇴장을 꿈꾸는 원장의 모습이 비친다. 이상욱은 다음과 같이 직설적으로 타자일 수 밖에 없는 그에게 이야기한다.


" 그냥 섬을 떠나주십시오. 원장께선 때가 왔을 때 이곳을 떠나주시기만 하면 그만입니다"(p.320) 그와 섬사람 간에는 아직 넘을 수 없는 골이 흐르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갈등의 골을 넘어설 다리는 영영 들어서지 못하는 것일까. 이 소설의 뒷부분은 이 타자와 주체 간 소통의 가능성을 찾기 위한 노력이다. "지금까지 끊임없이 그의 눈 앞을 가리고 있던 장막이 활짝 걷힌다"(p.345) 그는 색안경을 벗고 환자란 페르소나 이면에 존재한 노인의 맨 얼굴을 응시한다. 이 맨얼굴을 정면으로 응시했을 때 타자와 진정한 소통이 가능해진다. 그에게 황 장로는 '자유'에 기반한 '사랑'을 제시한다. 


"그야 물론 사랑이어야겠지. 이제 이 섬은 자유로는 안 된다는 걸 알았으니 다시 또 그런 자유로만 행해나갈 수는 없을 게야. 자유라는 건 싸워 빼앗는 길이 되어 이긴 자와 진자가 없이 모두 함께 하는 길이거든. 하지만 이건 물론 자유로 행해나갈 것도 지레 단념을 한다는 소리는 아니야. 아까도 잠깐 말했지만 이제 이 섬에선 자유보다도 더 소중스런 사랑으로 행해 나갈 수 있어야 한다는 소리일 뿐이지. 자유가 사랑으로 행해지고 사랑이 자유로 행해져서 서로가 서로 속으로 깃들면서 행해질 수만 있다면야 사랑이고 자유고 굳이 나눠 따질 일이 없겠지만, 이 섬에서 일어난 일들로 해서 자유라는 것 속에 사랑이 깃들이기는 어려워도, 사랑으로 행하는 길에 자유가 함께 행해질 수도 있다는 조짐은 보였거든. 그리고 아마 이 섬이 다시 사랑으로 충만해지고 그 사랑 속에서 진실로 자유가 행해지는 날이 오게 되면, 그때 가선 이 섬의 모습도 많이 사정이 달라지 게야." (p.349)


 여운을 남긴 채 섬을 떠난 조백헌은 이상욱의 편지를 받고 5년 만에 섬으로 돌아온다. 원장이 아닌 하나의 개인으로서 그는 더 이상 타자가 아닌 섬사람들과 운명의 공동체로서 공존한다. 하지만 원장이 아니었기에, 그가 실현코자 했던 것들은 정치적 힘의 부재로 인해서 어려움을 겪는다. 


그렇다면 또 다른 힘의 정치학이 모색되어야 할까. 아니다 그는 힘이라는 구현 수단을 넘어 자유와 사랑의 실천적 화해라는 방법을 깨우친다. 섬으로 돌아오기까진 이를 위한 시간이 필요했다. 


"난 이런 생각을 자주 해왔어요. 눈을 뜨고 찾아내려고만 하면 이 땅 위엔 아름답고 귀한 것이 얼마든지 많을 거란 생각 말이오. 하지만 그 아름답고 귀한 것들은 우리가 눈을 뜨고 찾아내지 않으면 함부로 모습을 드러내 보이질 않습니다. 볼 수가 없습니다. 누구의 눈에도 띄어본 일이 없이 우리 눈앞에서 숨어 사라져버리는 것들이 얼마든지 많습니다. -중략- 바로 저 나무뿌리가 그런 것 중의 하나지요. 산에만 올라가면 저런 고목나무 뿌리는 얼마든지 많습니다. 모두가 땅속에 숨어 있어요. 놔두면 제물에 썩어 없어져버릴 것들이지요. 하지만 내가 올라가 땅을 파고 썩어가는 뿌리를 찾아주면, 저것들은 제 몫의 아름다움을 되찾아 지니고 저렇게 내게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요즘 사람들 현상의 실첸가 뭔가를 찾아낸다고 생 유리창을 주먹으로 두들겨 깨기도 하고, 새끼줄을 이리저리 얽어매는 따위의 어려운 짓들까지 하는 모양 입디다만, 이 나무뿌리는 그렇게 힘이 들 필요가 없어요. 일부러 뭘 만들어낼 필요가 없어요. 제가 원래 지니고 있는 아름다움이 있거든요. 그 숨어 묻혀 있는 아름다움을 찾아내 주기만 하면 그만이니까. 놔두면 그냥 땅속에서 썩어 없어질 나무 뿌리를 찾아내 주기만 하면 그만이란 말이우다. 그게 예술이 안 됩니까. 그래선 예술 작품이 안 되는 거웨까?"(p.366-367)


 나무뿌리를 섬을 취재하러 온 이정태 기자에게 보여주며 "일부러 뭘 만들어낼 필요가 없다"는 무위의 윤리학을 제시한다. 이런 깨달음 속에서 원장이 윤해원과 건강인 서미연의 결혼식 축하 연습을 하며 소설은 끝을 맺는다. 




글을 마치며


 그러나 당신들의 천국은 계속되고 있다. 최근 8대 스펙 중 하나로 부상한 해외봉사에 대해 조심스레 말을 꺼내본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 진정한 의미에 봉사를 하시는 분들께 올리는 말은 아니다. '같은 운명의 공동체'로서 봉사하는 분들을 나는 존경하며, 다가가지 못해 멀리서 동경할 뿐이다. 다만 '스펙'으로서 해외봉사를 나가는 풍조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글로벌 역량'을 쌓기 위해 바쁜 방학에도 짬을 내어 해외봉사에 나선다. '우리'는 글로벌 역량에 보람까지 얻고 온다. 이로서 "한국은 이제 원조를 받는 수혜국에서, 국제사회에 기여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로 시작하는 문장을 자소서에 쓸 수 있는 자격을 얻는다.


 하지만 진정한 천국이라면 전 그것을 누리고자 하는 사람에게 먼저 선택이 행해져야 할 것이고, 적어도 어느 땐가는 보다 더 나은 자기 생의 실현을 위해 그 천국을 버릴 수도 있어야 하는 것으로 믿고 싶습니다. 천국이란 실상 그 설계와 내용이 얼마나 행복스러워 보이느냐보다 그것을 누리고자 하는 사람들의 선택 여부와 내일의 변화에 대한 희망이 어느 정도까지 허용될 수 있느냐에 더욱 큰 뜻이 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p.399)


 이상욱의 말이 스친다. 당신이 보람차게 봉사하고 떠나온 그곳에는 무엇이 남는가. 나 또한 가보고자 알아보니 해외 봉사 프로그램이 1주일 내외의 기간이나 길어야 한 달 이내였다. '이 짧은 기간 동안 그곳에서 낯선 타자들과 공감하며 진정한 의미의 봉사를 구현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에 나는 회의적이다. 시점을 바꿔 그들 시각에서 바라보면 한 주 혹은 한 달마다 사람들이 가고 또 다른 사람들이 와서 봉사를 '자행'한다. 수혜자 입장에서는 선의를 품은 그들의 봉사 자체를 거부할 수도 없는 입장이다. 더욱이 봉사 단체 간 수행 방향이 일정하지 못하거나 공유되지 못한다면 그들 삶에는 혼란만 가중될 수도 있다.


르완다의 폴 카가메 대통령은 다음과 같이 말했었다.

"우리는 외부의 지원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외부의 지원은 우리가 스스로 달성하고자 하는 것을 돕는 것이어야 합니다. 누구도 우리가 쓰는 것 이상으로 우리 국가들에 대해 더 신경을 쓰는 체 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누구도 우리에게 좋은 것이 무엇인지 우리보다 더 잘 아는 척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OECD,2011:32)" 


 잘못된 방향의 해외봉사는 자칫 봉사하러 떠나 '당신들의 천국'을 건설하고 오거나 아니면 그들의 동상을 세우고 올 수도 있다. 이렇게 세워진 동상은 또 다시 그들 마음속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울 것이다. 정말로 이제 수혜국에서 베푸는 나라가 된 나라의 시민이라면 해외봉사에 대한 재고가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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