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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변민욱 Nov 17. 2017

'명량하라'라는 그녀의 정언명령(定言命令)

[북리뷰] 두근두근 내 인생을 읽고



아버지가 묻는다.
다시 태어나면 무엇이 되고 싶으냐고
나는 큰 소리로 답한다
아버지, 나는 아버지가 되고 싶어요
아버지가 묻는다
더 나은 것이 많은데, 왜 당신이냐고
나는 수줍어 조그맣게 말한다.
아버지 나는 아버지로 태어나, 다시 나를 낳은 뒤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싶어요
아버지가 운다.

이것은 가장 어린 부와 가장 늙은 자식의 이야기다.
<프롤로그> (p.7)


 두근두근 내 인생은 "가장 어린 부모와 가장 늙은 자식의 이야기"(p.7)다. 대수와 미라는 17살에 아름이를 낳는다. 갖은 시련을 견뎌내 피워낸 아름이는 '조로증(早老症) '에 걸린 채 태어난다. 이후엔 '감성팔이'라고 말하는 이야기들이 줄을 이을 것 같다. 김애란의 소설은 바로 이 지점부터 여타 소설과 맥을 달리한다. 소설은 이야기 속 칠흑같이 깜깜한 운명 속에서도 명량(明亮)하기만 하다.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서술의 책임을 17살 소년 한아름에게 지웠기 때문이다. 이로써 '자식을 떠나보내는 부모'의 통속적 관점에서 벗어나 '부모에게서 떠나는 자식'으로 펜의 압점이 집중된다.



1. 모든 생명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터져'나온다.


 너무 일찍 사랑의 꽃을 피워낸 그들에게 주위의 손가락질이 이어진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의 새끼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진짜 새끼'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는 퇴학을 당하고 친구들도 떠나간다. 주위의 손가락질과 친지들의 비난은 견딜 수 있다. 하지만 집을 나온 순간 냉혹한 현실이 그들을 향해 아가리를 벌린다.


"아버님, 전에 여러 가지 일을 하셨다고"
"예"
"주로 어떤 일들이었나요?"
"어려선 주로 조끼 입는 일들을 했습니다."
"네?"
"왜 주유소 조끼, 편의점 조끼, 택배 조끼, 중국집 조끼 그런 거요"
지금도 드센 성격이 남아 있긴 하지만, 어머니의 말씨가 풀 죽은 듯 순해진 건 세상이 '시발'로만 해결되는 게 아니란 걸 깨달은 순간부터 인 듯하다. ······식당에서 자기보다 어린 소녀들의 까탈과 소란을 받아줘야 했을 때,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도무지 답이 안 나오는 병원비 청구서를 뚫어져라 들여봐야 했을 때 같은 경우 말이다 (p.13)


 정말 그들은 '안 해 본 일 없이' 노력하며 아름이를 피워내려 하지만 이름조차 낯선 아름이의 병 앞에선 한 없이 무력해질 수밖에 없다. 더 이상 '시발'로는 세상이 해결되지 않는다. 그 속에서도 나무는 자신이 피운 꽃을 포기하지 않는다. 때론 도망치려고도 한다.


"누군가는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 그 사랑을 알아보는 기준이 있어요"
어머니의 두 눈은 퉁퉁 부어 있었다.
"그건 그 사람이 도망치려 한다는 거예요."
"······"
"엄마, 나는  ······엄마가 나한테서 도망치려 했다는 걸 알아서, 그 사랑이 진짜인 걸 알아요(p.143)


 "엄마 나는 엄마가 나한테서 도망치려 했다는 걸 알아서, 그 사랑이 진짜인 걸 알아요(p.140)" 하지만 이 도피는 비극적 운명 속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무력감에서 비롯된 것이다. 아름이도 이를 이해한다. 그 도피 속에서도 사랑의 끈을 서로 놓지 않는다.


“그래도 그렇지, 나는 어떤 내기에도 너를 걸지 않아.”
“그럼 뭘 걸어요?”
“뭘 꼭 걸어야 해?”
“그럼요. 이왕이면 아버지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 중 하나로요.”
잠시 후 뭔가 궁리하던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그럼 이렇게 하자.”
“어떻게요?”
“자, 아빠가 맹세할게. 잘 들어. 내가 만약 아름이가 가져오라는 파일을 미리 읽으면 죽을 때까지 월세에 산다.” (p315)


 아름이가 자신의 소설을 읽지 말아 달라고 부탁할 때의 '대사'다. 이 소설 속에서는 '대사'라고 해도 무방할 만큼 살아있고 있음 직한 말들이 대화의 주를 이룬다. 김애란 작가는 "저도 남들이 믿는 말, 권하는 말, 제 몸을 통과한 말들을 쓰고 싶었어요"라고 말한다. 그렇게 작가를 통과한 말은 동심원을 넓혀가며 요동친다. 그래서 우리 가슴을 충분히 울리고 관통한다.  




2. 내가 어머니를 배어드릴게요. 나 때문에 잃어버린 청춘을 돌려드릴게요.


 아름이는  슬픔 속에서 살면서도 연민에 빠지지 않는다. 아름이는 '한아름' 그 이름과 같이 운명을 힘껏 껴안으려 한다. 비극적인 운명을 타고났지만 비관도 원망도 없이, 삶에서 '명량하라'를 정언명령(定言命令)으로 삼은 듯 살아간다. 인생의 형식은 비극이었으나 그 내용은 희극이었다. 명량함은 그 희극 속에서 아름이가 체득한 생존 방식이다.


"하나님을 원망한 적은 없니?"
"솔직하게 말해도 돼요?"
"그럼"
"사실 저는 아직 잘 모르겠어요."
"뭐를?"
"완전한 존재가 어떻게 불완전한 존재를 이해할 수 있는지 ······그건 정말 어려운 일 같거든요."
"그래서 아직 기도를 못했어요. 이해하실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런 뒤 나는 겸연쩍은 듯 말을 보탰다.
"하느님은 감기도 안 걸리실 텐데. 그죠?" (p.171)


 사회는 잔인하다. 아름이의 조로증을 취재한 방송 작가는 "이번 화는 대박 날 것 같다"라고 말한다. 방송이 끝난 후 이메일을 주고 받으며 아름이가 유일한 친구가 된 '서하'는 사실 열일곱 소녀가 아닌 서른여섯 시나리오 작가 아저씨였다. 김애란 작가는 인터뷰에서 "작가가 순수할 순 있어도 순진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기본적으로 갖고 있어요"라고 말했다. 잔혹한 현실에서나 그 현실을 먹은 소설에서나, 개인은 순수(純粹)할 수 있을지언정 순진(純眞)에 가득 차 있을 순 없다.


이윽고 그 말들은 스스로 노래하기 시작한다. 아버지 내가 아버지를 낳아드릴게요. 어머니, 내가 어머니를 배어드릴게요. 나 때문에 잃어버린 청춘을 돌려드릴게요.  ······앞으로 나는 어떻게 될까. 그리고 어디로 갈까. 그런 것은 모르겠다. 다만 조금 전 내가 던진 한 마디, 어디예요? 그 한마디가 어쩌면 내가 지상에서 남기고 가는 마지막 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p.324)


"내가 두 분께 뭔가 드릴 수 있는 게 있다면, 그건 우등모도 학사모도 아닌, '이야기'여야 할 것 같았다." 자신을 위해 거름이 되어준 부모를 위해 아름이는 사별(死別) 선물로 이야기를 건넨다. '황반변성'으로 인해 눈이 멀어가고 생명이 다함을 느끼면서도 아름이는 소설을 써내려 간다. 소설 말미에 아름이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부모의 젊은 시절을 잉태하고 출산한다. 부모는 또한 새로운 생명을 뱃속에 잉태한다. 그 이야기('두근두근 그 여름')는 소설이 끝난 뒤 마치 엔딩 크레딧처럼 독자에게 전달된다.





3. 글을 마치며


이해라는 말은 다각형이 아닐까. 책을 읽으며 그 생각을 했다. 소설 속에는 아름이를 향한 이해와 공감의 탈을 쓴 연민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진짜 어린애들처럼 세상의 상처를 다 받은 것 같은 얼굴로요. 근데 그 순간 애들이 무지무지 부러운 거예요.  그 애들의 실패가."
"왜 그런 생각을 했니?"
"그 애들, 앞으로도 그러고 살겠죠? 거절당하고, 수치를 느끼고, 그러면서 또 이것저것을 해보고."
"아마 그렇겠지?"
"그 느낌이 정말 궁금했어요. 어 그러니까  ······저는 ······뭔가 실패할 기회조차 없었거든요."
" ······"
"실패해보고 싶었어요. 실망하고, 그러고 나도 그렇게 크게 울어보고 싶었어요." (p.17

 하지만 실패할 권리조차 태생적으로 박탈당한 아름이를 그들과 우리는 이해할 수 있을까. 시인 김소연은  '이해' 란 가장 잘한 오해이고, '오해' 란 가장 적나라한 이해라고 말했다. 아름이는 고통의 측면에서 보면 사실 '조로증 환자'가 아니다. 오히려 일분이 한 시간 같고, 어느 때는 영원 같고 그런 하루를 고통 속에서 계속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설픈 이해와 공감은 그 의도가 퇴색되어 오히려 상처를 줄 수 있다. 그 포옹 사이에는 포옹의 모양처럼 따듯한 구(球)가 있다기보다는 어설프리만치 차가운 다면체가 존재한다.

 

 어설픈 위로를 내가 사는 세상 속으로 옮겨 생각해 보았다. 세계경제가 회복세로 돌아서고 있다. 우리나라도 반도체 호황에 따른 착시현상이라지만 경제지표가 연일 상승하고 있다. 하지만 그 결실은 청년들의 몫이 아니다. 기성세대들도 어렵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인지, 최근에는 '우리 때와 다르게 도전 정신이 없다.'는 어조의 말은 많이 줄어들었다. 오히려 '요즘 많이 힘들다더라'는 위로가 많이 들린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최근 베스트셀러들의 부제들도 '지치고 힘들 당신께'로 요약될 수 있을 듯하다.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중요하다. 소설 속에서 나온 말처럼 인간은 "이해라는 단어의 모서리에 가까스로 매달려 살 수밖에 없는 존재"일 수도 있다. 하지만 소설 속이 아닌 현실 속에서라면 감정의 방향을 잘못 잡은 듯하다. 아프다면 왜 아픈지 물어야 한다. 언제까지나 아프니깐 청춘일 수는 없다. 아직 우리는 이를 수 있지만, 위로와 조언을 건네는 그들 기성세대는 사실 이렇게 사회 시스템을 설계하고 유지하고 있다. 또한 바꿀 수도 있는 지위에 있다. 실패할 권리조차 잃어가는 사회 속에서, '미래는 여러분의 몫입니다'라는 그들의 조언과 위로가 각지게 느껴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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