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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변민욱 Nov 22. 2017

다시 소나기를 맞으러 돌아온 당신에게

[북리뷰] 소나기를 읽고



글을 시작하며

 

영화 엽기적인 그녀에서 견우(차태현 분)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멜로 영화를 좋아하게 돼있어"

"왜?"라고 되묻는 그녀에게 견우는 다음과 같이 설명해준다. "야! 우리나라 사람들이 사춘기 때 가장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소설이 뭔지 알아? 바로 황순원의 소나기 아냐. 사춘기 때 읽은 그 소설이 한국사람들의 감정을 결정하는 거야. 한국사람들이 슬픈 영화를 좋아하는 것도 그 때문이고."


 1952년 소나기는 단편집 『학』에 실려 황순원 선생에 의해 세상에 나오게 된다. 이후 1960년대부터 현재까지 교과서에서 수많은 학생들을 맞이하고 있는 작품이다. 정갈하고 순백한 문장들에  "나는 보랏빛이 좋아"을 '복선'이라고 형광펜을 칠하고 그만 지나가려던 많은 학생들이 매료됐다. 그렇게 소나기는 '이루어지지 못한 첫사랑'을 노래한 원곡이 되어 지금도 여러 변주곡들의 효시가 되었다.     




어느 산골 소년의 슬픈 사랑이야기 


 소년은 징검다리에 앉아서 물장난 치고 있는 소녀를 만난다. 소녀가 비켜주길 기다리며 물끄러미 서있는데 조약돌이 날아온다. "이 바보"라는 말과 함께. 소녀는 갈대 속으로 휑하니 사라진다. 다음날도 소녀가 징검다리에 하마 있을까 하여 나가보지만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 소년의 그리움이 시작된다.


 소년은 조약돌을 집어 주머니에 넣었다. 다음 날부터 좀 더 늦게 개울가로 나왔다. 소녀의 그림자가 뵈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었다. 소녀의 그림자가 뵈지 않는 날이 계속될수록 소년의 가슴 한구석에는 어딘가 허전함이 자리 잡는 것이었다. 주머니 속 조약돌을 주무르는 버릇이 생겼다.



 어느 날, 소녀를 개울가에서 만나게 된다. 소녀는 비단 조개를 소년에게 보여주며 말을 건넨다. 그들은 무 서리를 하고 허수아비를 흔들며 논길을 달려 산 밑 턱에 다다른다. 소년이 참외 그루에 심은 무밭으로 들어가, 무 두 밑을 뽑아 온다. 능숙하게 잎을 비틀어 팽개친 후 소녀에게 한 밑 건넨다. 그러고는 이렇게 먹어야 한다는 먼저 대강이를 한입 베어 물어낸 다음 손톱으로 한 돌이 껍질을 벗겨 우걱 깨문다.


 소녀도 따라 해보지만 세입도 못 먹고, "아, 맵고 지려."하며 집어던지고 만다. 그러자 이렇게 먹는 게 익숙할 소년도 "참 맛없어 못 먹겠다."라 말하며 더 멀리 팽개쳐 버린다. 소년은 소녀를 이해하고 공감하기 위해 그 나이를 지나온 독자들이 볼 때는 어설플 수도 있는 행동들을 한다. 때 묻은 데 없는 청아한 사랑의 모습이다.   

소나기에 등장하는 '마타리 꽃'


 소년은 싱싱한 꽃가지만으로 골라 꽃묶음을 소녀에게 건넨다. 예쁜 꽃만 솎아서 주고픈 그 소년의 마음이 말 그대로 꽃답다. 그러나 소녀는 꽃이 아깝기도 하고 소년이 주는 꽃과 그 마음을 모두 간직하고 싶었는지 "하나두 버리지 말어"라고 말한다. 소년은 소녀가 비탈진 곳에 핀 꽃을 꺾으려다 무릎에 생채기가 나자 송진을 발라주기도 한다. 그러곤 제가 꺾어다 줄 것을 잘못했다고 뉘우친다.


 사춘기 시절 자신이 사랑하는 소녀 앞의 소년이 으레 그러하듯 소년도 송아지를 타며 용기를 과시할 때 그들은 운명적인 소나기를 만난다. 수숫단 속에서 비를 피하고 돌아오는 길에 물이 불자 소년은 소녀를 업고 건넌다. 그날 이후 소년은 소녀를 하염없이 기다릴 뿐 한동안 다시 보지 못한다. 어느 날 개울가에서 다시 만난 소녀는 소년에게 소나기를 맞고 며칠을 앓았다며 소식을 전한다.


소녀가 분홍 스웨터 앞자락을 내려다본다. 거기에 검붉은 진흙물 같은 게 들어있었다. 소녀가 가만히 보조개를 떠올리며,
"이게 무슨 물 같니?"
소년은 스웨터 앞자락만 바라다보고 있었다.
"내 생각해 냈다. 그날 도랑 건널 때 네게 업힌 일 있지? 그때 네 등에서 옮은 물이다."


 분홍 스웨터 앞자락에 있는 자국을 소년에게 보인다. 또 소녀는 대추 한 줌을 건네며 곧 이사를 간다 말한다. 이별의 선물로 소년은 덕쇠 할아버지의 호두 밭에서 소녀에게 줄 호두를 따고 돌아온 소년은 뜻하지 않은 비보를 듣는다. 소녀가 죽었다는 것이다. 자기가 입고 있던 옷을 그대로 입혀서 묻어달라는 후대에도 잊히지 않을 그 잔망스러운 유언과 함께.


 


글을 마치며


 소나기를 읽으면서 떠오르는 노래 하나가 있었다. 예민의 '어느 산골 소년의 사랑이야기'다. 아름다운 노랫말 중에서도 소년의 소년의 그 사랑을 가장 잘 나타낸 백미는 "냇가에 고무신 벗어놓고 흐르는 냇물에 발 담그고 언제쯤 그 애가 징검다리를 건널까 하며 가슴은 두근거렸죠"라고 생각한다. 황지우 시인이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라고 그의 시 「너를 기다리 동안」에서 노래했듯 사랑의 미학은 기다림 속에 있기 때문이다.


 요즘은 '징검다리'가 '학원 앞'이 되어 버렸고 '꽃 묶음'이 '기프티콘'이 되었다. 소녀가 소년에게 던진 '조약돌'은 '페메(페이스북 메신저)'나 '카톡(카카오톡)'쯤 되고 맵고 지리다며 던져버린 '무'는 어려운 '수학 참고서'라면 비유가 맞을까. 비록 낭만이 덜해졌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현대의 '소년'들도 '소녀'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사소한' 움직임 속에서도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너일 것이었다가"와 같은 그 감정만큼은 여전하다고 믿는다. 소나기의 변주곡은 여전히 우리 삶 속에서 연주되고 있다.       


 떠올려보면, 교과서 내 이 작품 뒤엔 어떤 이야기가 펼쳐졌을지 써보는 독후활동이 있었다. 그런 독후활동이 나오게 된 것은 여운을 남기는 결말의 '여백의 미' 때문일 것이다. 소녀가 떠난 뒤에 소년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 질문에 답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 대답이 바로 사춘기 시절 소나기를 읽었던 나와 당신이다. 소설 속에서 구태여 이름 속으로 인물을 국한하지 않고 '소년'과 '소녀'라는 보통명사를 쓴 이유도 이 때문일 것이다. 소나기처럼 순식간에 지나갔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모두 한 때 그 '소년'과 '소녀'였다. 소나기는 나와 당신의 이야기였다. 그래서 소나기도 당신이 순박했던 어린 시절 사랑에 대한 기억의 유효기간 동안이라면 찾아온 당신을 언제나 시나브로 적셔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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