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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변민욱 Dec 11. 2017

노란 리본을 기억하는 당신께

오멸 감독의 영화 '파미르'를 보고


 단편영화 '파미르'는 생존자와 돌아오지 못한 친구에 대한 이야기다. 문학의 태명(胎名)이자 숙명(宿命)은 '말해야 하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단편영화 '파미르'는 그런 측면에서 내겐 단편영화 형식의 된 문학작품이었다. 



"이 자전거 타고 파미르 갈 거야"라고 말했던 친구가 수학여행을 떠난다. 영화 속 나레이션으로 그 날의 속보가 들려온다. 그렇게 떠난 친구는 돌아오지 못했다. 그 날 이후론 자전거만 우두커니 전봇대 옆에 세워져 있다. 자전거는 나아가기 위해서 그곳에서 누군가의 손길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존재다.


 이 부분에서 자전거 안장의 '상처'가 타입랩스와 함께 확대된다. 시간이 지나며 상처는 점점 벌어진다. 나는 그것이 자전거의 '상처'인지 인간의 상처인지 혼동이 시작됐다. 이내 깊어지는 게 자전거의 상처인지 우리의 그것인지 갈등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친구의 꿈을 대신 이루기 위해서 소년은 '파미르'로 떠난다. 단순히 영화 속 우정이라고 해석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영화 속에서라도 상처의 치유를 위한 진정한 소통과 공감의 노력으로 보았다. 친구의 자전거를 끌고 갔기 때문이다. 여행 중 자전거는 짐이 될 때도 있다. 자전거를 타다가 낭떠러지에 굴러 떨이지기도 한다. 힘든 여정에 "내가 왜 여기 있냐고"외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자전거를 소년은 버리지 못한다. '파미르'는 친구의 꿈이기도 했지만 그가 떠난 뒤에는 그의 꿈이 된다. 꿈의 실현은 상처의 치유가 된다. 외상(外傷)은 꿰매면 이내 아문다. 하지만 마음속 내상(內傷)은 그렇지 못하다. 그리고 치유에 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영화 중간에 등장한 몽골 소년 아루카가 기억에 남는다. 아루카는 처음 본 그에게 돌을 던진다. 그와 정말 닮은 소년이 아루카와 행복하게 뛰어놀다가 어느 날 홀연히 떠나버렸기 때문이다. 떠난 후에 아루카는 슬퍼한다. 그러곤 며칠간 심하게 앓는다. 떠난 그 소년이 돌아온 줄로만 알았을 것이다. 상처에 소통의 부재라는 톱니가 맞물려 돌아가며 오해와 갈등을 빚는다. 다름 아닌 우리의 이야기다.


 갑자기 떠난이는 남은자에게 공허함과 그리움을 작별 선물로 주고 떠난다. 성장통이라고 치부하기엔 아루카도 그도 너무나 힘든 이별이었다. 준비 없는 이별이었기 때문에 우리도 아루카도 아픔이 더욱 컸다. 어떤 기억은 시간이 지나며 잊히기보다는 그 기억만 생생하게 남는다.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영화 속 아루카와 그처럼 서로에게 너무나 많은 돌을 던졌다. 서로를 이해하기도 전에 말이다.  자전거 안장처럼 상처는 갈등의 골과 함께 아물기보다는 더 깊어져 갔다. 



 마지막 장면에서 그는 벼랑에서 굴러 떨어진 후에 내가 찾고 있던 사진 속 파미르가 바로 여기였음을 알게 된다. 치유의 그렇게 과정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러한 그의 노력에 친구는 호탕한 웃음을 짓는다.  떠나는 그가 "잘 지내 또 올게 임마"는 상처가 치유됐음을 의미하는 것일까. 영화를 보는 측면에 따라, 그 사람만의 해석이 존재할 수 있는 다의성을 지닌 결말이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점은 그 모두가 이제는 부디 행복하길 바라는 결말이라는 점이다. 


나의 사진 앞에서 울지 마요 나는 그곳에 없어요
나는 잠들어 있지 않아요 제발 날 위해 울지 말아요
나는 천개의 바람 천 개의 바람이 되었죠
저 넓은 하늘 위를 자유롭게 날고 있죠

가을에 곡식들을 비추는 따사로운 빛이 될께요
겨울엔 다이아몬드 처럼 반짝이는 눈이 될께요
아침엔 종달새 되어 잠든 당신을 깨워줄게요
밤에는 어둠 속에 별 되어 당신을 지켜 줄게요

나의 사진 앞에 서 있는 그대 제발 눈물을 멈춰요
나는 그 곳에 있지 않아요 죽었다고 생각 말아요
나는 천 개의 바람 천 개의 바람이 되었죠
저 넓은 하늘 위를 자유롭게 날고 있죠

나는 천 개의 바람 천 개의 바람이 되었죠
저 넓은 하늘 위를 자유롭게 날고 있죠

저 넓은 하늘 위를 자유롭게 날고 있죠
임형주 <천개의 바람이 되어>


글을 마치며 


영화 '지슬'로 블랙리스트에 오른 뒤 '오멸'감독께서는 지원금이 끊겨 사정이 많이 어려워지셨다고 한다. 그러자 시나리오 한 편을 완성하겠다고 다짐하고 산티아고 순례길로 떠났다. 걷다가 JTBC 측에서 연락이 닿아 탄생한 영화가 이 '파미르'였다.


어두운 식견으로 적어본다. 영화 속 감독이 왜 파미르로 갔을까에 대한 생각이다. 파미르 고원은 세계의 지붕으로 불린다. 바디의 심연(深淵)과는 정반대의 곳이다. 장소의 역설을 통해서 상흔(傷痕)에서 벗어난다. 그러나 절대 도피(逃避)는 아니다. 김훈이 '말하여질 수 있는 것'을 말하기 위해 역사 속으로 들어간 연유(緣由)와 비슷하다. 떠남으로써 오히려 우리 사회를 더 직설적으로 말한다. 여타의 '말할 수 없는' 논쟁으로부터 떠남으로 '말해야 하는 것'에 대한 예술인의 도의적 책임을 다한다. 


그것을 예술이라고 부를 수 있으려면 닿을 수 있는 차선책보다는 벼랑에 핀 꽃에 뻗은 손일지라도 불가능한 최선을 다한 작품에 걸맞는 칭호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불가능한 최선에는 그 최선의 무게만큼 무거운 책임이 따른다. 문학은 그러한 최선의 예술의 무게 속에서도 말해야 하는 것을 말해야만 한다. 대중들이 읽기 편한 소재들을 아름다운 표현들로 포장해서 내놓으면 안 된다. 그것은 이런 현실 속 예술의 민주주의보다는 대중주의로 해석되어야 한다. 편한 길로 대중들을 이끌며 길들이는 '위선'보다는 차라리 '위악'을 택하더라도 현실을 보게 해야 하고 대중을 형성해나가야 한다. 그래서 어렵지만 이루어질 수 없을지도 모르는 이 꿈에 헌신해야 한다. 글로 세상을 알리고 바꾸려고 하는 예술가들의 몫이자 운명이다. 그리고 독자들에게 의문을 품게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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