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빗살무늬 토기와 주먹도끼를 추억하며 씁니다
갑작스러운 전기공사로 인해서 정전이 났다. 우두커니 앉아서 발전기가 돌아가면 전기가 다시 들어오겠지 생각했다. 발전기는 고장 났는지 작동하지 않았다. 발전기 소리 대신 어둠과 적막만이 전기가 나간 자리를 메웠다. 다행히 글은 쓸 수 있었다. 아니 불행하게도 글 쓰는 것 이외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주위 사람들은 모두 잠이라는 관 속으로 자진해서 들어갔다. 사인(死因)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심심함.
밖으로 나가긴 싫어 라면이라도 끓여먹으려 했더니 인덕션은 고사하고 정수기부터 말썽이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냉장고에 물도 없다. 전기가 끊기니 나는 물도 마실 수 없었다. 텅 빈 냉장고는 내가 먹고 마시는 것을 마련하기 위해 가능한 게 아무것도 없다는 현실과 직면케 해주었다. 그 순간 왜 사람들이 그토록 글을 쓰고 싶어 하는지 깨달았다.
나는 종종 한 사물을 보고 '저건 누가 처음으로.. 어떻게.. 무슨 생각으로 만들었을까'라는 의문에 잠길 때가 있다. 내가 초안을 쓰는데 썼던 만년필도 족보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붓이나 펜이 있을 테고 그 위엔 벽화를 그리던 석기가 있을 것이다. 또한 당신이 이 글을 보는 데 사용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스마트폰도 석기와 닮아있다. 잡기 편하고, 휴대하기 용이하고 이를 사용해 사냥을 하거나 자기를 보호한다. 이렇게 스마트폰과 석기가 생김새나 용도면에서 별반 다를 바 없다고 하면 과장인가 혹은 비약인가.
구석기시대 사람들은 처음 석기를 어떻게 만들었을까? 어렸을 적 흙장난을 하며 놀았던 기억을 떠올리면 돌끼리 부딪히면 깨지고 날카로워지는 것을 보고 만들었을 듯하다. 석기는 그렇게 수 백번, 수 천 번의 내려침 속에서 만들어졌다. 대부분은 제작자의 의도와 다르게 쪼개지거나 부서져서 버려지고 가끔 원하는 모양과 날카로움에 도달했을 것이다. 내 생각은 항상 여기까지였다.
그렇다면 토기는 어떻게 만들었을까. 이건 퍽 난감하다. 유년시절을 다시 떠올려봐도 그때 만든 내 토기는 어디서 본 적 있는 상(像)의 구현하는 데 불과했다. 확실히 창조는 아니었다. 미술이나 역사 수업시간에 나는 둥글 띠를 말아서 쌓아 올려 만들었다고 배웠다. 자세히 설명한 책을 읽어본 적도 있다. 하지만 내 기억은 도무지 그 발상의 시작점까지는 도달할 수 없었다.
사람들의 삶의 범위는 과거와 비교가 무색할 정도로 넓어졌다. 그 옛날 조개껍데기의 후손만 가지고 있다면 나는 과거 인류가 수 억년을 걸어온 길을 하루 만에라도 왕복할 수 있다. 더 이상 먹고살기 위해 수렵이나 채집할 필요도 없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필요도 없지만 할 수도 없다. 석기와 토기도 비슷한 운명을 겪었다. 그렇게 우리는 창조의 방법을 모두 잊어버렸다.
사람들은 이젠 어떻게 만드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빗살무늬 토기와 주먹도끼를 추억하며 글을 쓴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스스로 할 수 있는 활동이 공동체의 범위와 함께 협소해져 버린 시대에 사람들은 빗살무늬 토기와 주먹도끼를 추억하며 글을 쓴다. 스스로 요리를 하거나 피규어를 만드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관음증도 편집증도 아니다. 낭만적이거나 고상한 취미도 아니다.
오히려 효율성과 생산성으로 각박해져 버린 문명에서 잠시 벗어나려는 비효율적이고 비생산적인 자구(自救) 행위다. 즐거움은 필사적인 노력이다. 사실 글을 쓰며 곁들여 마시는 이 커피도 각성제보다는 환각제에 가깝다. 환각에 빠져 걸어왔던 걷는데도 내딛는 한 발 한 발 어렵고 낯설기만 하다. 그렇지만 나는 오늘도 빗살무늬 토기와 주먹도끼를 추억하며 글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