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단편 : 저녁노을
인생을 다룬 드라마들을 보다 보면 가끔 놀라울 때가 있다.
어떻게 그런 기발한 반전을 떠올릴 수 있을까.
익숙하다고 생각했던 삶의 장면들을 전혀 다른 시선으로 뒤집어 보여주는 순간마다,
드라마 작가들의 끝없는 상상력에 감탄하게 된다.
2019년에 방영된 눈이 부시게 역시 그런 작품이었다.
반전의 반전을 거듭하면서도, 끝내는 너무도 따뜻한 온도로 마음에 남았던 드라마.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노년의 질병, 알츠하이머와 기억의 상실을
‘과거로 돌아가는 시간’이라는 설정으로 풀어낸 방식은 아름답고, 동시에 가슴 아프게 다가왔다.
그 드라마를 보며 떠올랐던 감정은 단순한 슬픔이 아니었다.
언젠가 나에게도 닥칠지 모를 미래,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랑하고 살아가야 하는 오늘에 대한 생각들이
겹겹이 밀려왔다.
그중에서도 유독 마음에 남아 있는 장면이 있다.
저녁이 되면 집집마다 밥 짓는 냄새가 골목을 채우고,
노을이 질 즈음이면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남편을
아이 손을 잡고 마중 나가
붉게 물든 하늘을 함께 바라보는 장면.
정확한 대사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내가 기억하고 싶은 방식으로 남아 있는 장면일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 장면이 내 마음 어딘가에 깊게 드리워졌다는 사실이다.
나는 그런 고요한 평화를 오래도록 꿈꿔왔다.
그래서인지 저녁이 늘 좋았다.
특히 노을이 지는 순간을 유독 기다리곤 했다.
어린 시절, 부모님을 도와 밭일을 하던 날들에도 저녁노을은 늘 신호였다.
해가 기울고 어둑어둑해질 즈음이면
이제 그만하고 집으로 돌아가도 된다는 안도의 시간.
고된 노동이 끝났다는 안심,
그리고 붉게 물든 하늘을 올려다보며
‘이제는 쉬어도 되겠구나’ 하고 그 노을은 내게 위로이자, 하루의 마침표였다.
하지만 지금의 저녁은 조금 다르다.
노을을 보게 되면 편안함을 느끼기는 하지만
벌써 저녁이네 하는 생각이 먼저 든다.
시간이 너무 빨리 흘러간다는 감각이 먼저 다가온다.
어느새 저녁이고, 어느새 아침이며,
하루하루가 무한 반복의 루프 속에 갇힌 것처럼 느껴진다.
기억은 점점 단편처럼 흩어진다.
어제 무엇을 했는지,
오늘이 며칠인지,
2026년이 벌써 이렇게 와 있었나 싶다가도
새해였던가, 하고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이런 무감각함이 낯설고 두렵다.
이러다 정말 제정신으로 남은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괜한 걱정이 고개를 든다.
나는 예민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정작 기억하지 못하는 것들이 너무 많다.
분명 꾸준히 하던 무언가가 있었던 것 같은데,
어느 순간 다른 일들에 밀려 그것을 전혀 하지 않고 있는 지금.
무엇을 했는지,
무엇을 좋아했는지,
무엇에 마음을 쏟고 있었는지조차
또렷이 떠오르지 않는다.
기억은
아마도 저녁노을처럼
어딘가에서 조용히 지고 있는 중일지도 모르겠다.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기억의 단편일지라도,
지금의 나를 다시 이어 붙일 수 있도록 기억들과 감각을 다시 찾아 나서야 한다.
더 늦기 전에...
<눈이 부시게 명대사>
내 삶은 때론 불행했고, 때론 행복했습니다.
삶이 한낱 꿈에 불과하다지만,
그럼에도 살아서 좋았습니다.
새벽에 쨍한 차가운 공기,
꽃이 피기 전 부는 달큰한 바람,
해질 무렵 우러나는 노을의 냄새...
어느 하루 눈부시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지금 삶이 힘든 당신,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당신은 이 모든 걸
매일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대단하지 않은 하루가 지나고
또 별거 아닌 하루가 온다 해도
인생은 살 가치가 있습니다.
후회만 가득한 과거와 불안하기만 한 먼 미래 때문에
지금을 망치지 마세요.
오늘을 살아가세요. 눈이 부시게!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누군가의 엄마였고, 누이였고, 딸이었고,
그리고 '나'였을 그대들에게...
당황
부끄러움
신선함
부끄러움
엄마와 언니에게 옛날이야기를 물었다.
그들의 이야기 속에서 내가 기억하고 있던 과거는 아주 작은 단편, 한 조각에 불과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동안 얼마나 좁은 기억의 세상 안에 갇혀 살고 있었던 걸까?
같은 시간을 살았지만, 같은 기억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는 사실이 낯설었고,
내가 보고 느낀 것만이 전부라고 믿고 있었던 나 자신이 조금 부끄러워졌다.
모든 것을 다 기억하기는 어려워.
그리고 그 일들은 이미 지나간 시간이야.
비록 내가 가진 기억이 단편이었다는 것에
그게 나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면
이제는 전체를 다시 이해해 보려고 생각을 내 밖으로 넓혀 보자
그리고
앞으로 내가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지를 생각해 보자.
과거보다는,
미래를 더 생각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