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였을 거다. 아버지는 하고 싶었지만, 기회비용이 커서 못했던 일을 시작했다. 바로 신학을 공부하는 일이었다. 이름도 없는 군소신학교가 인근에 생긴다는 신문광고는 아버지의 마음을 뛰게 했다. 늦게 시작한 배움이지만 아버지는 행복해 보이셨다. 낮에는 일하고 저녁에 공부하러 가긴 했지만, 당시 우리 삼 남매의 교육비가 만만치 않았던 시기였다. 칭찬에 인색하던 할머니도 그 당시, 엄마에게 가족 네 명 공부시킨다고 고생 많다는 이야기를 하셨던 것 같다.
그러던 아버지가 진짜 목회를 하실 줄은 몰랐다. 검소하신 부모님 덕에? 지지리 가난하기만 한 줄 알았던 우리는 두분이 노후자금까지 다 마련해 놓았다는 사실에 두번 놀랐다. 그런 우리에게 아버지의 목회 선포는 또 한 번 우릴 긴장하게 했다. 어려운 길을 선택한 아버지의 용기를 응원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농촌의 개척교회 실정은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었다. 성인이 되어서도 손 벌릴 수는 없겠구나, 하는 현실적인 생각을 나만 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아버지는 평생 모은 돈을 교회건물(고작 34평 정도의) 짓는데 썼다. 색다를 것도 없는 형태의, 네모반듯한 붉은 벽돌집이었다. 엄마의 가게는 매매가 되지 않아 사택은 지을 수도 없었다. 오빠와 남동생이 타지에서 공부했던 때라 엄마, 아빠와 나 이렇게 세 식구는 예배당 왼쪽에 칸을 질러 만든 부엌과 작은 방 두 칸을 이용해 살았다. 방 한 칸이 한 평 남짓한 크기였으니, 성인 두 명이 발 뻗고 누우면 끝이었다. 다시 더, 가난해진 느낌이었다. 때마침 나는 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직장에 발령이 났다. 한 달 카드값이 40만 원도 안 되었으니, 기름값 빼고 나면 나를 위해 쓴 돈이 얼마 되지 않았다. 월급의 반 이상을 엄마께 드렸다.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이 된 셈이었으니까.
시골, 고향에서 새로운 교회를 짓는 일은 교회가 반대했다. 작은 규모의 교단이 선악으로 구분되거나, 목회의 질과 비례하는 건 아니라고 응원했던 분들마저 등을 돌리셨다. 온 가족이 힘써 섬기고 봉사했던 교회에서 받는 냉대는 큰 상처였다. 아버지는 동네 깊숙한 골짜기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중심으로 특수하게 목회할 거라며 변명 같은 말로 그들의 흥분을 가라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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