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에게 기억된 모습이 세월을 지나며 좀 더 이해되길 바랄 뿐
기억하지 못할 거라는 오해
복직을 앞둔 어느 날, 쉬었던 SNS 계정을 다시 열었다. 쌓여있던 친구요청 메시지에는 옛 제자들이 제법 있었다. 그 중 한 녀석은 십년도 넘게 지난 종이 한 장을 올려 나를 찾고 있었다. 이걸 기억하실까? 하는 문장과 함께. 종업식 전날, 반 아이들과 돌려썼던 롤링 페이퍼였다. 아이의 글을 읽고 신이 났다. 이걸 아직 갖고 있다고? 아이를 응원하며 남긴 몇 줄의 문장 끝에는 ‘선생님이’라는 문구가 있었다. 친구 수락을 하고 아이의 글에 댓글을 남겼다. 호들갑을 떨며 반가운 마음을 표현하고 싶은데도 어떤 글을 남겨야 할지 몰랐다. 난 그게 잘 안 된다. 결국은 간단한 안부 정도로 반가움을 표현했다. 그러고 나서는 혹시 아이가 서운하지는 않았을지, 자기를 잘 기억하지 못한다고 생각하지 않을지 아이의 마음을 재어보며 괜히 미안했다.
교사가 되기 전엔 몰랐다. 내가 만난 아이들은 몇 년이 지나도 여전히 그때의 아이들로 마음속에 남아있다는 걸. 매년 새롭게 만나고 헤어지기 때문에 나같이 소심하고 조용한 아이의 이름은 기억도 못할 거라고 오해했었다.
아니다. 다 기억난다. 대학생이 되어 날 찾고 있던 청년은 두 번째 제자들 중 한명이었다. 그때 아이는 5학년. 비슷한 키의 현수랑 짝이었던, 키 작고 여리던 아이를 기억한다. 친구들이랑 어울리기보다 혼자 책 읽는 모습이 많았고 한자를 좋아했다. 얼굴이 빨개져 화를 내기도 했지만 그게 혼잣말일 때가 많던 아이. 그 모습이 짠했던 게 기억난다. 가정방문을 하던 날, 유치원 아이처럼 폴짝이며 걷던 아이의 상쾌한 걸음이, 골목 사이로 들어갔던 아담한 주택이, 아이를 걱정하던 어머니의 표정도 기억난다. 교직 3년 차였던 나는 그저 아이를 잘 살피겠다고, 매일 조금씩이라도 소통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겠다는 말을 했던 것 같다. 열정만 앞서 입만 동동대던 그때의 나를 아이는 어떤 선생님으로 기억하고 있을까. 그 질문은 하지 못했다. 곧 코로나가 찾아왔고 우리는 아직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하지만 서로를 응원하며 ‘좋아요’를 눌러주는 친구가 되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도 있다
제자의 연락이라고 다 반가운 것은 아니다. 어떻게 내 연락처를 알아냈는지는 몰라도 굵직한 목소리로 안부를 묻는 청년의 이름을 듣고 내 심장은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선생님, 저 준입니다. 준? 어! 네가 어떻게…. 그래, 어떻게 지내니? 보호관찰 중입니다. 어? 어, 그렇구나. 다른 아이들은 모두 대학을 들어가 꽃다운 청춘을 즐기고 있는데 너는 결국 그렇게 사는가 싶었다. 보통의 안부도 묻기가 어려웠다. 아이가 먼저 자신이 소년원을 가게 된 경위를 이야기했던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왜 전화를 했을까. ‘친구’라는 영화가 사회적으로 파장을 불러일으켰던 때였다. 실제로 동창을 살해하는 사건까지 뉴스로 나왔던지라 별 생각이 다 들었다.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아이의 끝말조차 섬뜩하게 들렸다.
첫 제자였다. 아이는 다른 아이들이 모르는 나를 알고 있었고 나는 그게 싫었다. 아이는 그걸 빌미로 나를 괴롭히곤 했다. 그러니까, 이 아픈 이야기를 19년이 지난 지금에야 처음으로 꺼낼 만큼 그 아이는 내게 참 아픈 존재였다. 아이를 만나기 전부터 전 담임으로부터 아이에 대한 이야기는 들었다. 경고문과 같은 말이었다. 그 경고를 기회로 들었던 건 오만이었을까. ‘사랑’으로 대하면 모든 게 해결될 거라는 믿음, 그 ‘사랑’이 내게 충만할 거라는 믿음이 내게 있었다. 돌아보면 지식 없는 믿음이자 사랑이었다. 나는 한동안 의기양양했다. 맹랑한 아이였지만 날 잘 따르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이는 점점 내 심기를 건드리는 행동을 했으며 내 반응을 즐기는 듯했다. 그것이 날 비웃는 것 같아 참을 수가 없었다. 수업을 방해하는 아이의 행동에 경고를 하던 어느 날, 아이는 반말을 하며 반항적인 태도를 보였다. 너, 그러려면 그냥 집에 가! 가버려! 홧김에 한 말이었다. 아이는 두 주먹을 쥐고 씩씩대는가 싶더니 정말로 교실 밖을 나가버렸다. 아이가 교문을 빠져나가기 전에 뛰어 가 멱살을 잡았다. 나에게 그런 어마한 힘이 있을 줄은 나도 몰랐다. 아이를 끌고 특별실로 들어가 매를 들었다. 사랑의 매를 운운하며 아이에게 휘둘리는 감정을 한꺼번에 쏟아내고 말았다. 해서는 안 될 말들과 함께…. 그러고 나서는 미친 듯이 아이를 끌어안고 울었다. 나는 완벽한 패배자였다. 아이는 전처럼 내게 으르렁 대지는 않았으나 언제나 날 경멸하는 눈으로 바라보곤 했다. 나는 늘 마음이 조마조마했지만 아이는 있었던 일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게 참 고마웠다. 2년 동안 담임했던 아이들을 졸업시키던 날, 나는 아이에게 참회와 같은 편지를 써서 전했다. 여전히 싸늘한 표정으로 편지를 받아 읽던 아이는 그 표정 그대로 나를 떠났다. 다음 해, 내 결혼 소식을 듣고 찾아온 첫 제자들 틈에 준이만 없었다.
다시 연락한다던 준이와는 몇 번의 문자만 오갔다. 어려움이 느껴지던 아이의 문장에 나는 어쭙잖은 조언밖에 하지 못했다. 아이를 어떻게 도와야 할지 여전히 막막하다는 게 가슴 아팠다.
우린 어쨌든 서로의 마음을 물들인다
올 2월이었다. 꽃빛처럼 화사한 아가씨가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16년 전 내가 지도했던 합창부의 제자라고 했다. 선생님 이름을 찾아봤어요. 첫해에는 보이지 않더라고요. 작년이었어요. 선생님 이름을 발견하고 얼마나 설렜는지 몰라요. 동료교사가 되어 나타난 제자는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담임도 아니었던 나를 찾기 위해 수소문을 하며 참 설레고 기뻤다는 제자의 흥분이 나마저 들뜨게 했다. 합창부에서 만난, 그때 그 아이 얼굴이 기억났다. 안경을 쓰고 머리를 묶어 넘긴 마른 아이의 얼굴. 야무지던 옆 반 아이. 나보다 훨씬 커버린 아이의 키만큼 그 아이를 성장하게 한 시간과 근황을 유쾌하게 들었다. 제자가 주고 간 꽃다발을 정리해 화병에 꽂아 두고 향기가 날아가기 전에 마음을 기록했다. 향기가 진하다.
꽃빛 같은 사람이 꽃을 들고 찾아왔다
뛰는 가슴으로 내 이름을 찾았다는 네 말이,
뛰는 가슴으로 내 이름을 확인했다는 네 말이,
꽃향기를 타고 가슴에 들어온다
꽃빛 같은 사람이 떠난 후에도
꽃향기가 가득하다
꽃빛이 온 마음을 물들인다
나는 교사라는 말보다 선생이라는 말이 더 좋다. 내가 아는 것이 많아 가르치는 입장에 서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앞서 살아서, 가는 길을 알려주는 것일 뿐이다. 길이 몇 갈래인지, 험하고 좁은지, 어느 쪽으로 가야하는지 안내하는 사람. 그리고 그 길 끝에 쳐져 있는 아이에게는 힘내라 다독거리는 사람. 하지만 때때로 나는 나 스스로에게 권위를 부여하고 싶어 한다. 아이들 앞에선 강자처럼 굴지만 정작 고리타분하고 좁은 식견의 어른, 내 수고만큼 따라오지 않는 아이들에게 곧잘 실망하는 비겁한 어른이 되곤 한다. 그런 기억은 부끄럽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서로에게 기억된 선생과 제자의 모습이 세월을 지나며 좀 더 이해되길 바랄뿐이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만나는 아이들에게 좀 더 친절하기를 애쓰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