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나는 기분을 아니?
새 운동화를 사는 기쁨
메이커가 뭔지 모르고 자랐다. 신발이 떨어지면 엄마와 같이 가는 곳은 늘 동네 신발 가게였다. 합판으로 짜 맞춘 가판대에는 얼마 안 되는 종류의 신발이 진열되어 있었다. 주로 시골 아주머니들이 신고 다니는 꽃무늬 슬리퍼들이 많았다. 그 옆에는 같은 종류의 실내화나 슬리퍼들이 비닐봉지에 담겨 수북이 쌓여있었고, 벽면에는 치수별로 쌓아놓은 신발 상자들이 가득했다. 고를 것도 별로 없었지만 새 운동화의 깨끗함과 반짝임은 어떤 것이라도 좋았다. 유행하는 만화 캐릭터가 그려진 운동화라도 만난 날이면 '하늘을 나는 듯' 기분이 좋았다. 새 신발 냄새가 진하게 나는 운동화를 품고 집으로 돌아오면 그날만 허락되는 일이 있었다. 바로 오빠와 동생 앞에서 다시 신어 보는 일이다. 그것도 밖이 아니라 방 안에서 말이다. 이렇게 한껏 뽐내고 나면 신발은 머리맡 위에 가지런히 놓인다. 새 신발은 자고로 내일, 학교 갈 때 처음으로 신어야 ‘구름 위를 나는' 기분도 느낄 수 있는 법이니까.
새 운동화는 친구들 눈에도 금방 띄었다. 그걸 알아봐 주는 친구들 때문에 발뒤꿈치가 까여 벌겋게 물집이 생겨도 참아야 했다. 하얀 운동화는 대부분 며칠 만에 더러워졌다. 양말 바닥이 까맣게 되도록 고무줄 뛰기를 하고(신발을 신으면 무거워 방해가 된다고 우리는 뒤꿈치 부분을 꼽쳐 신고 있다가 제 차례가 되면 벗어던지기 일쑤였다) 개 뼈다귀, 오징어 땅콩 놀이를 하기 위해선 신발 옆 축이 그림 도구가 된다. 그렇게 운동장과 동네 골목을 누비고 다니면 어느새 운동화는 시커멓게 때가 타 있었다. 단 한 켤레의 운동화를 빨 수 있는 날은 토요일이었다. 그것도 엄마가 씻어줄 수 있을 때만 가능했다.
겨울이 되면 내 발은 곧잘 동상에 걸렸다. 그게 좋은 신발이 아니었기 때문인지, 신발이 닳았기 때문인지, 운동장 조회 때 교장 선생님 훈화가 길었기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비 오는 날 양말이 젖는 것도 예삿일이라 여겼다. 우산살 끝에서 똑똑 떨어지는 빗방울과 바닥에서 살짝 튀어 오르는 빗물은 항상 신발 앞코 위쪽으로 흔적을 남기며 봉제선을 따라 새어들었다. 그래서 비 오는 날은 되도록 다른 사람의 집에 가지 않는 것이 사소한 삶의 원칙이 되었다. 심하게 닳아 있는 내 신발을 엄마가 먼저 발견해 주시길 기다렸다.
대학생이 된 기념으로 엄마는 처음으로 메이커가 있는 구두를 선물해 주셨다. 가격표가 제시된 수많은 구두 앞에서 무얼 골라야 할지 몰라 망설이다가 점원이 제안하는 구두를 재빨리 수락했던 것 같다. 또각또각 시멘트 바닥에 부딪히는 구두 소리가 참 설레었더랬지. 이제는 어른이 된 것 같았으니까. 비 오는 날에도 양말이 뽀송뽀송하게 그대로인 걸 보고 깜짝 놀라며 “엄마 이 구두는 비가 안 새요.”라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좋다는 표현을 그렇게 한 건데 어머니는 잠시 서글픈 표정이 되셨다 웃으셨다. 어느 날, 그 이야기를 아버지께 꺼내시는 어머니에게서 미안한 마음을 읽었던 것 같다.
풍요로운 시대를 살고 있다
지금은, 다섯 식구의 신발로 신발장이 비좁다. 내가 어릴 적, 다섯 식구였던 우리 집 신발장에 비하면 말이다. 계절별, 기능별로 다양하니 내 신발만 해도 열 켤레가 넘는 것 같다. 어디 신발뿐이랴. 아이의 입학을 앞두고 유치원뿐 아니라 가족들과 지인들로부터 선물이 계속 들어온다. 처음에는 ‘선물’이라는 단어 하나로도 설레며 소중하게 여기던 아이도 이 경험이 자꾸 이어지니 무덤덤해진다. 특별한 것이 평범한 것으로 둔갑한 탓이다. 이제 웬만한 학용품들에는 눈길도 안 준다. 미처 포장도 뜯지 않은 학용품들이 베란다 수납장에 차곡차곡 쌓이고 있다. 아이의 관심과 욕심은 더 멋지고 좋은 선물에 있다. 원하는 게 많아지고 더 커지는 것 같다. “엄마, 나는 핸드폰이 갖고 싶어요. 친구들처럼 게임도 하고요.” 내 예상보다 더 빨리 아이의 입에서 나오는 요구에 잠시 멈칫했다. 이제 새로운 과제로 고민해야 하는 시기가 다가온 것 같다.
너무 많은 것을 가진 건 아닌지, 너무 쉽게 가지는 건 아닌지, 그리고 아이에게 너무 쉽게 허락하는 건 아닌지 생각해 본다. 아이는 어떨 때 ‘머리가 하늘까지 닿는 기분’을 느낄까. 새 신발 한 켤레로 충분히 행복했던 때를 떠올리며 지금은 역설적으로 결핍의 경험이 필요한 시대라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