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의 성장을 지켜보는 즐거움
아이를 키우며 행복을 느낄 때
아이를 키우면서 즐거운 것은 성장하는 과정을 지켜볼 때다. ‘엄마, 아빠’라는 단어로 시작해서 ‘이거 주세요, 맛있어요.’ 같은 단순한 문장을 말하다가 제 생각을 자기만의 논리로 표현하기 시작할 때 그것을 지켜보는 마음은 벅차다. 그 성장이 아주 천천히 나타날 때도 있지만 계단을 오르듯 한순간에 보일 때도 있다. 첫째를 키울 때 그 감흥은 너무도 커서 아이의 성장을 일일이 담아놓고 싶었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성장 일기를 적었는데 5년 동안 기록한 일기장이 어느새 15권이 되었다. 예상할 수 있겠지만 뒤에 태어난 쌍둥이 녀석들 것은 8권밖에 안 된다. 가끔 일기장을 들여다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내 아이의 세계를 뒤적거리며 내가 교실에서 만나는 아이들의 세계를 좀 더 유연하게 바라보게 된다. 지금 당장 부족한 부분들이 보여도 모두의 성장점은 다르니까.
아이의 말
아이는 한참 동안 포크레인을 ‘키키땅’이라고 말했다. 막 말을 하기 시작한 아이가 할머니를 ‘할미’, 할아버지를 ‘할비’라고 발음할 즈음이었다. 포크레인이 ‘키키땅’이 된 과정이 좀 재미있다. 포크레인 발음이 어려웠는지 ‘키키’라고 하더니 땅을 파 엎는 작업을 관찰한 후로 ‘땅’이라는 명사가 덧붙어 ‘키키땅’이라고 명명된 것이다. 이 얼마나 창조적인가?
아이의 말을 알아듣는 사람은 없었다. ‘키키땅’을 외치며 손으로 땅 파는 시늉을 하는 아이에게 이 사실을 설명하기는 힘들었다. 아이가 하도 ‘키키땅’이라 하니 가족들에게만은 포크레인이 아닌 ‘키키땅’이었다. 변함없이 ‘키키땅’일 것 같았는데 언제 ‘포크레인’이라고 말했는지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아이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이 늘 같은 말로 수정해 주었을 거고 그것을 선택한 것이겠지? 그렇게 아이는 말을 배워갔다. 어쩌면 그렇게 사회화되어 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제 아이들은 처음 말을 배우기 시작할 때와는 다른 차원으로 생각하고 말하지만, 여전히 어리다. ‘세계’라고 발음하지만, 그 다양함과 크기는 가늠할 수 없을 것이고 ‘아름답다’라고 발음하지만 아름다움의 형용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지 가늠할 수 없을 것이다. 아이들이 경험하는 테두리 안에서 튕기고 날아다니는 수많은 언어는 오늘 하루를 지나면 또다시 재배열되어 해석되고 이해된다.
아이의 그림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때도 그랬다. 가는 선이 굵어지고 형태를 잡아가기 시작한 것은 어느 순간의 일이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색칠 도구를 가까이 두었다. 동그란 손과 발을 가진 사람 정도는 금방 그릴 줄 알았다. 그러나 아이는 늘 선만 죽죽 그어대다 던질 뿐이었다. 1년이 지나고 2년, 3년이 지나도 그랬다. 도대체 언제쯤 그림이라는 것을 그리는지 궁금하고 답답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무 예고도 없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사실 그림이라고 하기엔 우연에 의한 형태였다. 선의 방향과 힘을 조절하며 그어가다 보면 갑자기 새가 되기도 하고 양파가 되기도 했다. 그 과정이 아이도 즐거웠는지 한동안 그림을 그리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내곤 했다. 고민 없이 그려가는 과감한 선과 우연한 형태가 주는 유쾌함이 마음에 들었다. 그 그림을 차곡차곡 붙여 모아 두었는데 몇 번 집 정리를 하며 사라져 버렸다. 아쉽게도 이제 아이는 그런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 자기가 생각하거나 본 형태가 아니면 지워버리거나 다시 그린다. 잘 그린 그림에 대한 사회화가 되었다고나 할까.
아이의 성장은 보아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내가 만나는 아이들도 그랬을 것이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엄마 애를 태우다 옹알대고, 말하고, 걷고, 뛰고, 자랐을 것이다. 수업 시작 전 한 번씩 아이들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눈을 마주치고 하루를 시작한다. 이 아이들이 말하기 시작했을 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을 때 이것을 지켜보던 부모의 마음은 어땠을까. 이런 생각을 하며 눈을 마주치면 소중하지 않은 아이가 하나도 없다. 물론 아이들의 미성숙한 말과 행동에 부딪힐 때마다 마음이 흔들리곤 하지만. 그건 부모도 마찬가지인가 보다.
“선생님, 저도 제 아이지만 짜증이 나요. 제 눈에서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어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핸드폰을 뺏어버리면 될까요?” 문제행동이 반복되는 아이의 어머니에게 전화를 드리니 돌아오는 대답이 이랬다. 순간적인 감정에 이런 말을 한 건지 모르겠지만 여태 들었던 말 중 최고로 가슴 아픈 말이다. 무엇이 이 가정을, 그리고 아이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잠시 눈을 감는다.
아이는 자기 이름만 부르면 버릇처럼 고개를 수그리고 굽신거리며 습관처럼‘잘못했습니다’를 반복했다. 행동수정은 없다. 아이 주변에서는 늘 문제가 달그락거린다. 친구를 나쁜 말로 괴롭히고, 과한 행동이나 표정으로 주의를 끌며, 수업 시간에는 산만한 아이. 아이의 이름이 거론될 때마다 아이는 굴욕스러운 자세로 굽신거렸고, 나는 이런 아이의 태도에 더 속이 상한다. 아이의 잘못을 타이르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이의 자존감을 세워주는 일이 필요해 보였다. “어머니, 학급 활동사진 올라오면 보시고 그걸로 이야기 한번 나눠보세요.” 내가 어머니께 부탁한 것은 이 한 가지였다. 사실 별 기대 없이 한 말이었다. 나는 나대로 아이가 성취감을 느낄 수 있게 도와줄 수 있는 구실을 계속 찾았다. 학급 역할, 청소, 발표, 학습. 뭐든 참 어려웠다. 노력하는 모습이라도 보여주면 좋을 텐데 그 모습을 찾는 것조차 힘들었다. 리코더를 배우기 시작한 지 3주가 지났는데도 아이는 구멍 하나 제대로 막지 못하고 삑삑거렸다. 아이 옆으로 가서 손가락 위치를 하나하나 잡아주었다. 아이 손에서 흐른 땀으로 리코더 표면이 미끄러웠다. “땀이 너무 많아서 구멍 막기가 힘들었나 보다. 그래도 차근차근 한번 해 보자.” 아이는 그날 수업을 마치고 나서도 일어설 기미가 없었다. “리코더 연습 좀 해도 돼요?” 남아서 시끄럽게 빽빽거리는 게 귀에 거슬렸지만, 아이가 뭔가를 하려고 한다는 게 신기해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 강낭콩 심은 화분이 사진첩에 올라와 있어서 그냥 잘 크고 있냐고 물었는데, 아이가 엄청 좋아하더라고요? 자기 강낭콩 이름을 말하면서 제 옆에서 조잘거리는데 그렇게 학교 이야기를 한 적이 처음이에요. 저도 좀 더 노력해 볼게요.” 아이를 위해 순회 상담 서비스를 신청하면서 어머니께 전화를 드렸더니 어머니의 목소리가 한결 밝다. 마음이 한결 놓인다. 수면 위로 떠 오른 문제는 여전하지만 아이는 며칠 만에 리코더로 음계와 간단한 곡 하나를 연주하는 데 성공했다. 조금씩 자라고 있다. 그걸로 감사하다.
어쩌면 아이의 성장은 그저 곁에서 보아주고 말 걸어주는 것이 전부가 아닐까. 실수와 절망마저도 경험할 수 있게 보아주는 것, 그것을 이겨낼 수 있도록 대화하는 것으로 일어설 힘을 얻는 게 아닐까. 더운 계절을 지나고 찬 바람이 불 때쯤 아이의 키만큼 마음도 쑥 커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