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짧은 어느 날

운동장을 밟는다

by 꿈꾸는 momo

시린 듯 하얗게 영롱한 달빛이, 비워져 있는 까만 하늘을 채운다. 곧 다가올 동지를 앞두고 점점 차오르는 달빛, 취침 전 조명으로는 너무 밝아 결국 커튼을 친다. 달빛이 이리 밝으니 아이들의 입에선 자동으로 노래가 흘러나온다.


"달 달 무슨 달..."


발끝이 시리긴 해도 겨울 공기는 뭔가 상쾌한 느낌이 있다. 습기 많은 우리네의 여름 공기와 틀려 그런지는 몰라도 바사삭 뽀드득 깔끄러운 겨울 공기는 가슴이 뻥 뚫리는 청량감이 있다. 하지만 이런 날들의 시작과 동시에 소아과 병동에는 입원실이 부족하고 진료대기도 길어진다.

해가 짧아 바깥놀이를 할 여유도 없었지만 찬바람에 기침이 심해질까 조심스럽던 터였다. 추워도 밖에서 노는 게 맞다지만 누런 콧물과 밤중 기침은 아이들을 안으로 꽁꽁 싸게 되는 이유가 된다.


"춥든 덥든 아무렇게나 키워라."며 할머니는 팔을 휘저으셨다. 그러고 보면 내 어릴 때는 늘 콧물을 달고 살았던 것 같은데, 소매 깃이 누렇게 반짝일 만큼 콧물을 훔치고 살던 시골 꼬맹이의 기운찬 걸음으로 돌아가 아이들을 데리고 근처 학교로 갔다. 아무도 없는 학교 운동장에는 햇살이 따뜻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얼굴에 닿는 차가운 바람과 따뜻한 햇볕을 동시에 느낀다. 나도 잠시, 어깨를 펴고 눈을 감은 채 햇볕을 쪼인다.


오늘 하루에도 수많은 사건 사고로 시끄러운 세계와 무관한 듯한 지금의 풍경. 아이들이 있는 풍경. 아이들이 흙을 만지고 공을 만지고 바람을 맞으며 뛰노는 것은 해가 뜨고 짐 같이 가장 자연스러운 일인데 동네 꼬맹이들은 다들 어디로 갔을까...

학교 운동장으로 내려오는 길은 여전했다. 시멘트 계단에 낀 검은 얼룩들이 세월을 보여주고 있지만 오빠를 따라 농구 골대 주변을 돌며 한 번씩 공을 튀겨보던 곳이다. 운동장에 그림을 그려놓고 팀을 정해 놀던 '개 뼈다귀, 오징어, 돈가스'놀이. 그러다 바닥에 구르는 적당한 돌을 주워와 땅따먹기를 하거나 공기놀이를 하곤 했다. 손이 시커멓게 되든 말든, 그러다 콧물이 흐른다 싶으면 그 시커먼 손등으로 쓰윽 닦아 콧수염을 그리곤 했다. 실컷 놀고 집으로 뛰어가는 길, 운동장 바닥의 저항을 느끼며 발을 움직이고 바람의 저항을 느끼며 달리고 나면 마음의 우울을 다 떨어낼 수 있었다. 심심했거나 속상했던 마음들 말이다. 가끔씩 아이들의 재잘거림과 숨찬 기운들이 사라진, 텅 빈 운동장을 뒤돌아보면 내가 떨쳐낸 마음들이 구르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해가 지고 내일의 해가 돋으면 다시 환할 운동장이다. 그곳을 나의 아이들과 밟고 있구나...

아무것도 없어도 셋은 신이 나 뛰어논다. 운동장 구석구석에 누군가가 버려두고 간 공들을 보물찾기 하듯 찾아내며 깔깔대는 아이들의 웃음을 쫒아간다. 해가 지기 전에 운동장 곳곳에 우리의 발걸음을 채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