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와 선택의 길에서, 항상 어렵다
호랑이처럼 사나운 살쾡이가 내려왔대. 간밤에 어느 틈 사이로 들어와 짐승을 한 마리씩 물고 갔단다. 그저께는 수탉이 한 마리 사라졌고 어제는 큰 거위 한 마리를 물고 갔다가 틈 사이를 빠져나가지 못해 두고 갔대. 거위가 천장 높은 곳에 매달려 있지 뭐야. 도대체 어디로 들락날락거리는지 몰랐던 할아버지가 드디어 그 틈을 알아챘어...
아이들은 숨죽여 다음 이야기를 기다린다. 그림책 이야기도 아니고 할아버지네 실제 이야기다. 살쾡이가 금방이라도 옆에 나타날 것처럼 두근거리는 마음이 느껴진다. 어둠 속에서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을 아이들은 바짝 내 옆에 붙어 눕는다.
아이들의 청각을 자극하는 일은 유아기 때 필수적인 요소임에는 틀림없다. 그래서 걸음마도 떼기 전부터 영어노래를 틀어놓고 이중언어에 노출되게 하는지 모르겠다. 효과는 분명할 것이나 유창한 모국어를 구사하는 일에는 걸림돌이 될 것이란 판단에 영어를 시키지 않았다. 아직 아무것도 시키지 않는 나를 보고 큰일 날 엄마라고 말하며 학습지를 들이 내미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그건 아이의 발달단계와 학습욕구에 맞게 자연스럽게 하게 될 일들이라 믿는다. 어차피 모든 것을 다 갖춘 아이는 만들 수 없다는 걸, 아이의 기질과 성향에 따라 접근방식도 다 다르다는 걸 알기에 포기와 선택이라는 길에 항상 서 있다.
축기견초(築基堅礎)
다산 정약용 선생은 학문을 하기 이전에 먼저 인간이 되어야 한다 주장했다. 바탕을 다지고 주체가 서야 학문을 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때 바탕이 되는 것이 곧 자연과 사물, 사람을 대하는 바른 태도가 아닐까 싶다.
마음껏 땅을 밟으며 주변 세계를 관찰하고 아름다움을 느끼는 마음, 자연과 타인에 대해 배려하는 마음은 어릴 때 꼭 배워야 할 일이 아닐까. 많은 걸 다 경험할 수 없지만 제한된 경험 가운데서도 일맥상통하는 '배움'이 존재한다.
엄마! 저것 좀 봐요!
산책길 근처 카페 창밖으로 고라니가 보였다. 고라니는 위태하게 비탈에 서서 대나무 잎을 뜯어먹고 있었다. 먹을 게 없어서 마을까지 내려왔나 보다. 동물원 우리 안에 갇힌 무기력한 동물들이 아니라 생존본능에 필사적인 살쾡이와 고라니를 보며 아이들은 무엇을 느낄까...
엄마, 그런데 왜 호랑이는 산에 없어요? 곰은요? 토끼는요? 우리는 왜 잘 못 보는 거예요?
먹을 것이 없어서, 살 터전이 없어 계속 줄어드는 동물들의 개체 수와 멸종위기에 대한 이야기를 아이들은 귀 기울여 듣는다.
내 역량이 부족해서인지는 몰라도 아이들의 시선을 따라가 이야기를 나누는 일마저도 내겐 벅찰 때가 있다. 하지만 바람을 느끼며 산책하고 그림책을 읽어주며 아이들과 이야기 나누는 것은 내가 가장 즐겁게, 잘할 수 있는 일임에는 틀림없다.
흙을 만지고 열매를 줍고 관찰하며 세상을 보는 일, 아이가 있는 공간과 관계 속에서 평생습관이 될 기본적인 삶의 태도를 배우는 일, 형제끼리의 우애를 다지고 부모를 공경하는 마음을 배우는 일만으로도 사실 매우 어렵고 바쁘다. 게다가 아이들은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빨리 자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