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

아무나 쓰는 아무 글

by 꿈꾸는 momo

그런 날이 있다. 흰 종이를 펼쳐놓고 아무 낙서나 끄적이고 싶었는데 생각보다 그림이 마음에 안 들어서 다른 종이를 가지고 와 다시 휘적거려 보는 날. 그렇게 마구 마구 그리고 나면 그 종이가 비록 재활용 박스로 직진하더라도 마음은 개운해진다. 그림보다 글은 꽤 까다로운 녀석이라 번쩍하고 떠오른 생각의 타래를 풀어내려 펜을 들기만 하면 모든 것이 순식간에 사라지곤 한다. 그래서 늘 머릿속에서 글을 읊듯 써 내려가다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글들이 많다. 어떤 이들은 손 닿을 만한 어딘가에 늘 메모지와 펜을 둔다더니, 아직 난 습관이 안 된 모양이다. 당장 떠오른 생각의 조각을 메모해 둘 수 있을만한 상황도 안 된다. 아직은 날 가만두지 않는 어린 녀석들 덕분에 이만큼 글을 쓰는 것도 감지덕지라 해야 하나.


큰 일났다. 아주 흔쾌히 "네"라고 대답한 것이 수습이 안 된다. 원고 청탁을 받은 그 날은 폐 ct를 찍고 3차 정기검진을 다녀오는 길이었다. 조영제 투여 후의 몽롱한 정신 상태여서 그랬는지, 코로나 19로 인한 삼엄한 경계 속을 뚫고 피곤해서였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뜸도 들이지 않은 가벼운 마음으로 좋은 교사 잡지의 원고 청탁을 수락해 버렸다.

편집장에게서 온 메일을 열어보니 원고 마감 기한이 얼마 남지 않았다. 갑자기 마음이 바쁘다. 썼던 글 중에서 골라 그냥 보내볼까 하고 훑어도 왠지 시차가 맞지 않는 것 같아 접어둔다. 뭘 쓰겠다고 컴퓨터 앞에 앉는 순간 내가 잘 못했구나 싶다. 난감한 마음으로 쓰는 글은 힘이 잔뜩 들어간 글이 된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그냥 멍해진다. 아무것도 아닌 글을 가볍게 끄적거릴 때는 몰랐는데 말이다. 일단 아무 거나 써보자 싶다가 아무것도 못 쓰고 있다. 이런 마음이라도 토해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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