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청솔 Jan 07. 2017

 바래길의 속삭임

가을이 여물고 있다. 점점이 박혀 있는 섬 사이에 파란 하늘빛이 에메랄드 빛으로 물들어 있다. 남면 평산마을에서 시작되는 바래길! 남해사람에겐 흔히 갱번가는 길이다. 풍족하지 못했던 시절 해변에서 해초와 고둥을 바구니에 담아 머리에 이고 잰 걸음을 재촉하였던 아낙네들의 한이 서린 길이다. 그런데 그 길이 요즘엔 건강의 의미로 새로이 다가서고 있다.

비탈진 오르막을 오르며 밭언덕을 본다. 결실의 계절만큼 들국화와 구절초 꽃이 가을날을 환히 밝히고 있다. 계단식으로 늘어선 손바닥만 한 밭뙈기에는 가을 배추와 무가 싱싱하게 자라고 길 높이의 슬레이트 지붕엔 누런 늙은 호박이 가을 햇볕을 쬐며 튼실해지고 있다. 잎은 시든지 오래지만, 아직 줄기에는 생명의 흐름이 억세게 묻어나고 있다.


경운기나 지게가 지나는 좁은 길! 인기척에 놀라 포르르 뛰는 메뚜기들의 날개 부딪히는 소리가 정적을 깨운다. 그리고 마르는 들풀의 향과 바다를 배경으로 붉은 속살을 드러낸 황토밭 여기저기에 흩어진 고구마들이 햇볕에 마르면서 가을의 속삭임을 피워 올리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저만치 밭의 중간에는 꽤 연세가 들어 보이는 노부부가 고구마 넝쿨을 걷어내며 고구마를 캐고 있다. 지난날 고구마는 각박한 남해사람들의 생존을 위한 돈줄이었고 식량이었다. 어린 시절 이맘쯤이면 밭들은 빼때기로 희끗희끗하였다. 그런 날 어쩌다 밤에 비가 오기 시작하면 식구들 모두 좁은 산길을 걸어 빼때기 주우러 간다. 잠이 들깬 눈을 비비며 투덜대며 걷는 밤길. 한기는 몸을 감싸고 괜히 내리는 비가 원망스러웠다. 그리고 보리밥에 섞인 고구마 밥은 얼마나 먹기 싫었던가? 하지만 그런 추억은 아련해지고 허기를 채우려고 먹던 지난날의 음식들은 건강식으로 주목받고 있다.

태양에 반사된 은빛 바다와 밭 언덕에 흐드러진 억새가 윤기를 발하며 바람에 흔들린다. 바람결에 부딪히는 파도소리의 부드러운 화음이 컴퓨터와 스마트폰의 정보 속에 파묻힌 디지털 치매증상의 일상을 아날로그 속으로 몰고간다.


나지막한 농로 길을 벗어나 조금 돌자 볼똥 나무가 눈에 띈다. 맛은 기억 속에 각인되는지 벌써 입안에 군침이 돈다. 볼똥을 한 움큼 따서 씹어 본다. 달콤함과 떫은맛의 조화가 입안에 전해져 온다. 같이 온 아이들은 먹어도 되느냐며 두 서너 알 씹어보곤 퉤퉤 내뱉어 버린다. 맛도 없고 떫다며 어떻게 먹느냐고 한다. 문득 어릴 적 산에 나무하러 가다 볼똥나무를 보고 좋아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어떤 때는 찔래 나무 열매인 까치밥도 따먹고 청미래 열매도 먹곤 하였다. 그렇다. 이미 우리 아이들은 풍족한 생활에 즉석식과 초콜릿에 길들어 자연의 맛을 모른다. 어쩌면 저무는 날처럼 지금 세대가 지나면 이런 맛도 영원히 잊힐 것이다. 

산을 내려 해변으로 걸음을 옮긴다.

남면 유구마을 해변이다. 번창했던 시절 이곳은 어선을 수리하는 간이 조선소가 있었던 곳이다. 술집도 있었고 사무실도 있었으리라.하지만 지금은 빈집과 갈무리한 고춧단만 빈 골목을 지키고 햇볕과 바람만 돌담 사이로 추억을 되새김질하고 있다.


발밑에서 몽돌들의 부딪힘과 스며드는 파도소리가 이중창을 한다. 사촌 해수욕장을 얼마 앞둔 몽돌해안이다. 헤아릴 수 없는 긴 세월동안 둥글은 시간의 흔적들. 두루뭉술하게 살면 이렇게 소리도 예쁠 것인데 사람의 욕심은 언제나 불협화음을 만들어 낸다. 자연을 닮고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가을빛 내려앉는 따사로운 세상이 될 것인데…….

오늘 닿기로 한 곳이 저만치 보인다. 조금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 사촌해수욕장의 호선형 해안이 그림처럼 다가선다. 해안으로 밀려오는 파도가 긴 주름처럼 겹쳐 바다 소식을 모래톱에 전한다. 그 이야기들은 어느 예술가도 표현할 수 없는 기하학적인 무늬를 모래톱에 남기며 자연의 신비를 전하고 있다. 

묵직한 다리도 쉴 겸 바다를 향해 제일 편안한 자세로 앉는다. 그리고 온몸에 힘을 빼고 숨을 들이마신다. 간간이 스치는 바람이 머리카락을 흔들고 간다. 자연 그리고 보물섬 바래길. 소중한 추억과 공존의 의미가 저무는 가을날 오후에 상념의 바느질을 시작한다.



작가의 이전글 겨울에 찾은 다랑이 마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