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청솔 Jan 16. 2017

부소암에서

손바닥만 한 부소암 뜨락에 늦가을 햇살이 얇아져 간다. 산 아래 두모마을의 다랑논이 아지랑이처럼 얼룩지고 멀리 떠 있는 소치섬과 노도 그리고 고개를 돌리면 망운산과 호구산이 가까이 다가선다. 늦가을 금산! 복곡 저수지 부근은 아직도 단풍이 붉음을 토해내고 있지만, 산허리 부근 위로는 초겨울 색이 완연하다. 그 가을의 끝자락 부소암에서 그리움과 회상이 불사를 기다리는 기왓장에 깃들고 있다. 


금산의 가을! 화보에서 본 가을 경치를 직접 셔터에 담아보기 원했지만 시원찮은 다리로 무리라는 생각에 가을 내내 미뤄왔다. 이런 기다림의 반전은 찬 바람이 더 해지고 앵강만 물빛이 진한 파랑으로 변하는 십일월의 마지막 주말 몸을 곧추세우게 한다.

금산의 참모습을 보려면 산행을 해야 한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문명의 이기인 마을버스를 이용하여 정상부근까지 오른다. 산을 오르는 임도 부근 골짜기 여기저기엔 아직 떨어지지 않은 단풍들이 화려한 가을을 토해내며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다. 조금 더 일찍 왔어야 하는데…….

이번에 금산을 찾은 목적은 부소암을 보는 것이었다. 금산을 여러 번 올랐지만, 그 숨은 비경인 부소암을 찾을 기회는 그리 쉽지 않았다. 어떤 해는 휴식년재로, 산불 조심으로 인해 탐방의 인연이 맞질 않았다.

부소암을 처음 찾은 일은 맹렬한 기세로 타닥거리는 참나무 장작불 같은 이십 대 초반의 오월이었다. 산 정상은 신록으로 물들고 철쭉꽃은 함박웃음을 터뜨리며 낭만의 시선을 사로잡았었다. 그때 금산이 주는 배경으로 연애 중인 아내와 두 손을 꼭 잡고 부소암 구름다리에 섰었다. 녹슨 철재 다리는 운무에 싸이고 금방이라도 미끄러질 것 같았다. 그리고 부소암 아래는 모두가 구름바다였다. 건널까 말까 하는 요란한 소리에 인기척을 듣고 나온 구름다리 왼쪽 바위 아래 보살 한 분이 돌아가라는 알지 못할 외침만 손짓으로 전하고 있었다. 아마 길이 미끄럽고 위험하거나 기도하는데 방해가 되지 않을까 싶어 그랬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 바위 아래 숨은 암자가 있다는 것을 몰랐다. 그런 신비가 이제 부소암 아래 암자 가는 길을 잘 닦아 한층 더 수월하게 손을 잡는다. 그 젊음을 회상하면 지금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부소암! 중국 진시왕의 아들 부소가 유배되어 살다가 갔다는 전설과 단군의 셋째아들 부소가 방황하다 이곳에서 천일기도를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금산 38경의 하나인 34경이다. 눈 아래 펼쳐지는 금산 자락과 다도해는 보는 이로 하여금 황홀 지경에 빠지게 한다. 다시 찾은 금산의 부소암. 이십 오 년 전에는 사랑하는 사람과 있었기에 배고픈 줄 몰랐지만, 달랑 사진기와 찾은 지금은 그 풍경에 매혹되어 홀로임을 잊어버린다. 

바위 사이 열린 녹슨 철문을 들어서자 좁은 돌계단이 나타난다. 그 위에 길손을 기다리다 빛을 잃은 상수리나무인 듯 느티나무인 듯 세월을 담은 나무 두 그루가 가을 색을 대비하며 벼랑 위에 서 있다. 어쩜 이런 벼랑 끝 좁은 터에 고목이 자라고 있는지 생명의 끈기와 자연의 조화가 오묘해진다. 

부소암은 보리암과 마찬가지로 물이 귀한 곳이다. 그래서인지 암자 마당 가장자리 곳곳에 빗물 받는 통들이 나와 있다. 잠깐 손이라도 뻗치면 지척인 바닷물을 마음껏 퍼 올 수 있겠지만 마실 수 없으니 기다림의 깨달음이 바람을 타고 이슬로 비로 내리길 손 모아 본다. 회색빛 바위 뒤로 청아한 파란 하늘이 대비된다. 펼쳐지는 금산 자락! 산 정상은 이미 겨울을 입고 있다. 북적거림과는 거리가 먼 부소암을 뒤로 후들거리는 다리를 부여잡으며 돌아갈 생각에 숨을 고른다. 


겨울이 더 뿌리를 내리기 전 그리움, 기쁨, 성냄에 물든 일상을 다독여야 한다. 이런 염원을 아는 듯 바람결에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아쉬움으로 새겨진다.

모든 일은 시작과 끝이 있다. 언제나 찾을 때보다 돌아올 때 마음이 더 무겁다. 어쩜 살아간다는 것이 이런 이차방정식의 해를 구하는 것이 아닌지 부소에게 묻고 싶다. 다시 숨을 몰아쉬며  상사바위로 가는 오솔길에서 새로움을 만난다. 그 길 주변 단군성전 가는 길목엔 긴 한숨보다 더 지쳐 늘어져 겨울바람에 갈무리 되어가는 시래기들이 지난 시월을 회상하고 있다. 늦가을 부소암이 던져주는 메시지. 봄은 기다림 끝에 터지는 아픔으로, 여름은 푸른 자람 속에 짙어지는 그리움으로, 가을은 기다림을 다시 해야 한다는 원망으로, 겨울은 긴 침묵 속에 돌아보는 반성의 기울임으로 산도 우리네 삶도 그렇게 돌고 있다고 한다.


<2014년 늦가을에>

작가의 이전글  바래길의 속삭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