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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솔 Dec 22. 2016

시제

늦가을 햇살이 까치밥이 될 감들에 스며들고 있다. 푸들 거리는 날갯소리에 뛰는 녀석은 메뚜기들이다. 그 재빠르던 동작도 푸름이 가시고 누런빛으로 변하는 풀빛처럼 굼뜨다. 여름철 잡으려고 안간힘을 들여도 애를 태우던 녀석들이 오늘은 힘 안 들이고도 잡힌다. 여러 번 비상을 시도하지만, 손길이 와도 눈만 까맣게 보인 채 가만히 있다. 메뚜기는 지난여름의 놀이터였던 녹색 초원을 떠올리며 겨울이 오지랖에 쏟아짐을 아는 것 같다.


선산 건너 고구마 밭은 오그라진 갈색 잎들을 매단 덩굴에 귀퉁이를 내주고 맨살을 드러내고 있다. 

시퍼런 서슬을 감춘 쇠풀에 바람이 잘려나간다. 지난번 산행에서 미끄러질 때 눈에 띄는 풀을 잡았더니만 선홍색의 상처를 입혔다. 빛은 바랬지만, 가장자리 날카로움은 여전하다.

즐비한 봉분을 보며 사람의 수명과 연관하여 대를 거슬러 올라가자 고려중엽부터 여기에 정착하여 터를 잡은 것으로 보인다. 산 아래부터 허리까지의 봉분들은 역사지도처럼 세월의 흔적을 잿빛으로 반사하고 있다. 위로 갈수록 봉분의 형태를 가늠하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후손들이 모였다. 정해진 날짜이지만 생업에 바빠 참가하지 않은 분들이 절반이 넘었다. 팔순을 넘긴 큰아버지와 아버지도 서 계신다. 걸음걸이가 은빛을 발하는 억새 같다. 지팡이를 들고 계신 손이 떨린다. 얼굴은 종착역을 앞두고 비포장 진흙탕 길을 달려온 자동차의 모습들이다. 한때는 젊음을 구가하며 제물도 차리며 주인공으로 이곳에 서 있었을 것이다. 여름보다 길어진 그림자를 발아래로 한걸음 물러앉은 모습이 까마귀 울음소리 청아한 늦가을 하늘을 질리게 한다. 그래 아버지들도 이제 이곳에 올 때가 되었구나.

일곱 살 때의 기억이 아득하게 곱다. 먹을 것이 귀한 시절! 시제 따라오면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 그때는 왜 그렇게 추웠을 때 시제를 지냈는지 모른다. 갓 자란 보리밭 위로 눈발이 풀풀 날렸다. 조무래기들은 산신제를 지내러 가는 집안 할아버지 뒤를 졸졸 따라다닌다. 축문을 다 읽고 난 할아버지는 큰 홍시감을 통째로 베어 먹는다. 얼마나 군침을 삼켰는지……. 이내 보채고 있던 우리에게 주시면 발밑에 막 돋아난 보리 싹 들은 이래저래 비벼지고 밟힌다. 즉석식, 조미료에 더 친숙한 요즘의 아이들은 그 맛을 모를 것이다.

선산의 맨 아래쪽에 제물이 차려진다. 예전에는 위에서 아래로 차례대로 지냈지만, 간소화를 내세워 다섯 분의 신위를 한꺼번에 모셔 지내니 수월해졌다.

형님이 먼저 술을 올리고 다음은 내 차례가 되었다. 당당하게 주름잡던 큰아버지 아버지는 거동도 불편하여 물끄러미 물러나 지켜본다. 숨 쉬는 소리가 해소를 앓는 것 같다. 세월의 흐름은 자연스럽게 세대교체를 이루었다.


수백 년을 이곳에 터를 잡고 후손들을 퍼뜨렸다는 곳. 선산 아래의 야트막한 야산 자락에 이십여 호 되는 마을. 멀리 내려다뵈는 들녘 가운데는 시내가 흐르고 그 건너 큰 마을, 방풍림 뒤에 펼쳐진 바다가 풍수에 문외한이라도 좋은 풍광을 가진 장소란 것을 알게 한다.

몇 차례 절을 끝나고 철시를 한다. 이때쯤이면 아이들의 눈빛은 반짝였다. 모두의 시선이 가는 곳은 유자였다. 예닐곱 살 때 형은 학교에 가면서 다른 것은 몰라도 꼭 유자를 먼저 덮치라던 생각이 유자향기처럼 배어난다. 향기가 매우 진한 바닷냄새를 풍기는 유자. 그러나 오늘 그 유자를 먼저 닦아 채는 이가 없다. 그 높은 위상도 관중이 없으니 한 물 떨어지고 풍요의 산물이 보석으로서 희귀성을 잃게 하였다. 늘어나는 빈집과 아이들 울음소리 끈긴 텅 빈 골목, 홍시가 지천이어도 손댈 이 없는 마을이 되었다. 

큰 소주병을 들고 일어선다. 아버지와 항렬이 같은 분을 따라 선산의 맨 위쪽부터 술을 따른다. 나머지 한 분은 시제 날은 산소에 손을 대어도 괜찮다고 이곳저곳 솟아 자란 잡목들을 베어낸다.

“자손들 번성하고 부자 살게 해 주소” 세 번을 나누어 따르는 술잔 속에 속이 켕긴다. 부스럭거림에 발목은 낙엽 속에 빠지고 곳곳에 멧돼지가 파헤친 흔적들이 바쁘다는 핑계에 한두 번 찾는 후손들을 나무라는 것 같다.

봉분마다 술을 따르는데 꽤 시간이 흘렀다. 먼발치를 지나며 저곳이 문중 선산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이렇게 넓은 것을 새삼 느꼈다.


이곳은 이 마을에 살던 또래의 아이들에게는 좋은 놀이터였다. 진 뺏기 놀이, 고지탈환 그리고 가을철 이맘때면 비료 포대나 나무판자가 있으면 잔디 미끄럼 타기에 제격인 곳이었다. 간혹 시끌벅적한 소리에 선산을 관리하는 분이 봉분 무너뜨린다고 몽둥이를 휘두르며 다가오면 갯벌에 나왔다가 숨어버리는 게처럼 모두 몸을 감춘다. 이내 잠잠해졌다 싶으면 다시 모여들어 시작하였다. 지난날의 추억이 늦가을 햇살에 데워진 지면을 타고 하늘로 오른다. 그 하늘가엔 모든 사람의 추억들이 쪽빛으로 물들어 있다.

팔순을 넘긴 아버지 형제들은 봉분 사이에 앉아 콜록거리며 담배를 빨고 있다. 흩어지는 연기에 초점 잃은 눈동자는 지난날 주름잡던 때를 생각하며 기억을 더듬는 것이다. 그 기억은 지난 일들의 보석들로 아쉬움의 꽃을 피워 검버섯으로 물들었다.

“이제는 죽어도 선산에 올 수 없지.” 정해진 곳이 아니면 묘지를 만들 수 없는 조례에 콜록거림이 더해진다. 한 많은 세상 등지는 것도 아쉬운데 저 세상에서도 같은 자리에서 가족을 이룰 수 없는 세태를 원망하는 것 갓 같다. 

주름진 얼굴과 손등이지만 쏟아지는 가을빛은 아흔을 바라보는 아버지들을 환하게 조명하고 있다. 퍼지는 서늘한 웃음이 빛바랜 풀밭에 배어든다. 아직은 삶이란 연극무대에서 조연을 더 바라고 있다.


그림자가 더 길어진다. 해는 중천을 넘었고 하오의 길을 걷고 있다. 

이제 몇 번의 가을을 더 넘길지 모르지만, 가을날 기억의 한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그 기억이 쇠잔할 즈음이면 오늘의 내가 대신할 것이다. 대를 이어 산다는 진리가 국화꽃처럼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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