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청솔 Dec 23. 2016

눈과 동심

대설은 중국 화북지방의 기상을 기준으로 눈이 많이 내린다는 뜻으로 소설 15일 후 동지이전까지의 24절기 중 하나로 누런 콩을 쑤어 메주를 만들기 시작하는 날이다. 그런데 이날 공교롭게도 남해에 모처럼 많은 눈이 내렸다. 기상청 발표에 의하면 적설량이 4센티미터 이상이라고 했다. 눈 구경하기 어려운 따뜻한 남해에 내리는 함박눈은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많은 이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선생님 눈이 와요!” 아이들은 수업시간 내내 창문 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수업에 집중하지 않았다. 보다 못해 커튼으로 창문을 가리고 수업을 하였지만, 창문 쪽에 앉은 녀석들은 눈이 온다고 눈빛으로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쉬는 시간을 알리자 용수철처럼 튀어서 실내화 바람으로 밖을 쏘다니기 시작했다.

비둘기가 나무에 앉아 있어도 마음은 콩밭에 가 있다고 할 수 없이 재량으로 쉬는 시간을 조금 더 주며 놀다가 운동장 시계를 보고 약속 시각 맞추어 수업에 참여하라고 하자 환호성을 지르며 밖으로 나간다. 그리고 이내 하늘은 어두워지며 싸락눈도 나비눈도 아닌 함박눈을 펑펑 내리붓는다. 금세 주변은 새하얗게 변한다. 가까운 뒷산에서부터 멀리 망운산까지 온 세상이 은 세상이 되었다. 타다만 가을빛도 여러 가지 세상의 얼룩들도 모두 눈 속에 감추어졌다. 순수로 포장한 모습이 이럴까?


다시 수업 시작을 알리는 음악이 나오자 몇몇 아이들만 교실로 오고 나머지는 소식이 없다. 가까운 곳을 돌며 흩어진 아이들을 다시 불러 모아 들어왔지만 세 아이가 보이질 않는다. 차가운 곳에 있다가 들어온 아이들의 볼은 홍당무 같다. 그제야 손이 시리다고 난리 법석이다. 손을 잡아보니 차가운 돌멩이 같다. 눈 뭉치는데 정신이 팔려 장갑이 젖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았던 것이다.

세 녀석이 걱정되었다. 다시 한 번 운동장으로 나가서 찾아보니 내리는 눈도 개의치 않고 여러 아이 틈에 눈을 뭉쳐 눈사람을 만들고 있다. 그것도 삼 층 눈사람이었다. 끌고 들어갈까 망설였지만, 성인이 된 지금도 눈이 내린다면 약간 두근거리는 마음을 생각하며 그대로 두고 다시 들어왔다. 그리고 얼마 후 다시 수업 마침 음악이 나오자 눈을 축구공만 하게 뭉쳐서 보듬고 교실로 헐레벌떡 들어오며 선생님 눈사람 교실에 만들어 놓으면 안 되느냐고 한다. 너무 기가 막혀 당장 밖에 두고 오라고 호통을 치자 조금 전까지 의기양양하던 모습은 꼬리를 내리고 샐쭉해져 밖으로 나갔다 다시 온다.

세 녀석에게 늦은 이유를 물어보자 시간이 그렇게 많이 지난 지 몰랐다 한다. 혼을 내려다 잘못된 점만 말을 하고 꿀밤을 한 대씩 주었다.


따뜻한 남쪽에 사는 사람들은 내심 눈을 기대하는 경우가 참 많다. 하지만 운수업이나 하우스 농사를 하는 사람들에게 눈은 골칫덩어리다. 문득 어릴 적 기억이 되살아난다. 보리를 많이 심던 시절 겨울에 눈이 많이 내리면 다음 해 보리농사는 대풍이라고 어른들은 말하였다. 또한, 지붕개량이 되기 전 초가였을 때 눈이 내리고 녹기 시작하면 낮은 기온 탓에 고드름이 주렁주렁 처마 밑으로 매달렸다. 그것을 마루에 서서 따다 먹기도 했다. 지금 같으면 환경오염, 대기오염에 산성눈이라 하여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성장하여 눈 구경을 물리도록 한 일은 몇 해 전 산타의 고향인 핀란드에 갔을 때이다. 호텔에 여장을 풀자마자 일행들은 동심이 솟구쳐 눈을 뭉쳐 서로 던지고 피하며 잠깐의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계속되는 눈과 얼음, 빙판길은 사람을 지치게 하였다. 북극에 가까운 나라는 겨울 낮시간이 짧고 평균 기온도 낮다. 하지만 차고 건조한 바람은 적어 매섭게 춥다는 느낌이 적어 견딜만하였다. 그곳에 사는 사람에게도 신은 견딜만한 시련을 준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나라의 전형적인 겨울 날씨는 차고 건조하다. 특히 남해는 섬지역이라 바람이 세게 분다. 북쪽의 찬 냉기를 머금은 대륙성 고기압이 확장하면 겨울바람의 심술은 더 해져 모두 몸을 움츠리게 한다. 하지만 동심 앞에 추위란 별로 매섭지 못한 것 같다. 아이들을 모두 보내고 운동장을 본다. 내리던 눈도 멎고 주위가 밝아지기 시작한다. 구름장 사이로 햇살이 한줄기 비추자 여기저기에 서 있는 꼬마 눈사람들이 해 맑게 웃고 있다. 눈이 얼마나 좋았으면 시간 가는 줄도 몰랐을까? 교실에서 하는 공부보다 저런 공부가 더 알찬 경험이라고 반추해 본다.

눈과 동심! 깨끗함과 순수는 같은 의미를 남긴다. 오늘 모처럼 내린 눈에 대한 기억이 성장하여 지치고 힘들 때마다 좋은 기억으로 되살아나 마음을 따뜻하게 하였으면 좋겠다.

겨울날 늦은 오후 하늘이 맑아지기 시작하자 눈은 녹기 시작한다. 먼 산 눈을 뒤집어쓴 소나무의 푸름과 대비된 설경이 이채롭다. 자주는 안되지만 편안하고 포근함을 느끼며 동심을 되살릴 수 있는 눈이 내리는 겨울이 되었으면 좋겠다.

작가의 이전글 시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