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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솔 Dec 27. 2016

하동 포구 팔십리

여름의 마지막 외침일까? 아침부터 팔월의 열기를 머금은 섬 공기는 짭짤한 소금색으로 산허리를 감고 축축 늘어진다. 

‘어쩜 이렇게 혼란할까?’

마음은 돌개바람에 모인 담벼락의 지푸라기 같다.

그렇게 안절부절못하는 행동이 여물지 않은 낱알처럼 보였는지, 아내는

“그러지 말고 바람 한 번 쏘이고 마음 공양 좀 하고 오이소!”

하며 마음을 떠보는 눈치다. 

‘그래 떠나야지, 훌훌 털어 버리고……. 좋은 일이지! 어디로 갈까?’


여름이면 바다가 좋다고 볼거리 많다고 외지인들이 많이 들리는 이곳이지만 정작 살을 부비고 뿌리를 내리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별다른 호기심을 자극하지 못한다. 마치 공기와 같이 호흡하면서도 존재의 소중함을 모르는 것과 같다. 아마 항상 새로운 것을 느끼고 갈구하는 사람의 본성 때문에 그럴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래 한 번 떠나 보는 거야! 아내고 딸들이고 …….’

일년에 꼭 한 두 번은 지나는 곳! 그렇게 시작한 혼자만의 나들이가 노량해협을 건너고 있다. 이제 하동이다. 멀어져갈 수록 자꾸 뒤를 돌아보려고 함은 무슨 미련인지 떨쳐 버릴려고 속도를 더한다.


금오산을 끼고 전도에 도착한다. 광양만과 망덕 포구와 맞닿은 인근이라서 낮은 구릉지 형태의 지형은 지리산의 넓은 치맛자락으로도 갯내음을 덮지는 못하는 모양이다.

항상 바다를 끼고 살아서 정작 원하는 것은 물이 흐르는 넓은 강과 젖가슴 같은 계곡의 깊은 산 공기의 부드러움과 모시적삼 같은 신선함을 원하는 것이다. 언뜻언뜻 스쳐가는 도로변의 재첩국 이라는 간판에서 섬진강의 냄새가 진하게 묻어난다.

굽이진 고갯길을 따라 한 굽이를 돌았다. 아! 부드러운 곡선과 갈대, 모래톱, 파란 하늘빛과 구름을 머금은 물길이 눈에 들어온다. 섬진강이다! 빠르지도 급하지도 않은 물의 흐름이 한 낮 풀을 잔뜩 먹고 그늘 밑에서 되새김질하는 소의 느긋함 같다.

올라 갈수록 얕아지는지 멀리 내려다보이는 강 한복판은 시원한 물길과 더불어 점점이 뿌려 놓은 하얀 깨알처럼 넓고 커다란 갈색 대야를 물위에 띄우고 재첩 잡는 사람들로 빼곡하다.


재첩! 새끼손톱 만 한 것부터 갓 태어난 아기의 조막손 만 한 것까지 크기도 다양하다. 거무스럼한 빛깔에 하얀 신비한 속살을 간직한 조개이다. 섬진강을 끼고 기대어 사는 사람들에게 자연에 순응하며 욕심 없는 모습으로 집안과 자식들을 건사하며 성장시키는 모태가 된다. 바다만 보고자란 경험 때문인지 민물재첩조개는 별로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뽀오얀 우유빛 국물에 파를 숭숭 썰어 넣어 마시는 한 그릇의 제첩국물은 그 동안의 조급증을 시원하게 씻어준다.

하동읍내가 가까워질수록 구불구불한 길도 반듯해 진다. 강변과 맞닿은 우회도로 옆 송림사이에 하동 포구란 깃발이 눈에 들어온다. 그 옛날 이 포구는 이 곳에서 나는 배며 쌀이며 갖가지 생산물을 한양으로 보내는 출발점이었으며 분주한 삶의 모습이 원동기 소리처럼 강 사이에 메아리 졌을 것이다. 아마 소설 토지의 길상과 서희도 조준구의 추격을 피해 여기를 거쳤을 것이다. 하동포구 팔십리! 그 길은 전남 광양 망덕에서 화개장터 입구까지라 했던가 하는 기억을 더듬어 본다.


강변을 따라 시간이 지날수록 깊어지는 협곡과 끝이 없는 산 능선의 주름들은 돌아갈 흔적도 못 남길 원시림 속의 여정이라는 상상에 빠져들게 만든다. 너르지만 물살의 빠름도 느린 모래톱 양쪽 가장자리에 기대에 사는 강변 사람들! 멀리 강 건너가 전라도 광양이라 했던가? 밤을 많이 재배하는지 지난 늦봄에는 밤꽃이 지천이었고, 이곳은 배꽃이 하얗게 산길과 물길을 밝혔는데, 아직 이른감이 있지만 벌써 만지배 밭은 첫 수확을 시작해 따고 파는 손길이 분주하다.

그래도 집에 있는 처자식들이 걱정이 되는지 아니면 홀가분한 돌아감을 준비하는 강하지 못한 인정을 소유해서 그런지 조생종 배 한 상자를 사고 덤으로 잘라 주는 배 한 조각을 입에 물자 시원함과 가득히 고이는 단맛이 어릴 적 소풍 갈 때 이십 원 주고 사먹는 환타 맛에 버금간다.

‘그래 이 모든 것이 강을 끼고 아무런 욕심 없이 뿌리는 데로 거두고 받는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삶의 선물 인 것이다.’ 

많이 팔라는 말 뒤로 멀어지는 촌 할머니의 깊게 패인 짙은 검갈색의 손등 주름들이 아쉬움을 더한다.

깊어만 가는 십 구 번 국도! 얼마쯤 지났을까? 더욱더 높아지게 다가서는 지리산 자락에 악양면 평사리가 펼쳐진다.


평사리! 아무리 처음 듣는 사람도 그 지명에는 낯설지 않을 것이다. 소설 토지의 배경이 된 곳이고 드라마로 제작되면서 마음으로 눈에 익어서 그럴 것이다. 강을 낀 넓은 들녘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으면서도 조화가 잘 되는 소나무 두 그루가 소설 속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주인공처럼 서있다. 

그래 평사리다. 학창시절 토지가 완결되기 전 종의 신분인 길상과 상전인 서희가 정말 사랑으로 행복한 가정을 꾸렸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소설 같지 않은 바람을 한 적이 있다. 나중에야 조건이 있는 만남은 완전한 사랑으로 귀결되기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지금의 천연색에 디지털 합성 시대의 사랑보다는 더 나은 모습이 아닐까 한다.

이십 오 년 전 흑백 텔레비젼이 주종이었을 당시 토지의 메인 화면은 소가 쟁기를 끌고 논을 갈면서 흙덩이가 파헤쳐지는 장면이었다. 그 들판을 지나 지금 평사리 들과 부채살처럼 휘어진 섬진강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오는 백일홍이 만발한 최참판댁 정원에 자리해 있다. 

작은 대문을 돌아선다. 연못을 낀 별당채에서 

“찢어죽이고, 말려죽이고, 태워죽일 거야!”

어린 서희의 당찬 목소리가 생생한 것 같다.

사랑채에서 내려다 보이는 평사리 들녘은 한 눈에 모두 들어온다. 가을철 황금물결 일렁이는 수확을 기대하며 젖는 포만감을 느낄 때면 조준구가 왜 그렇게 만석꾼 살림을 탐내었는지 알 것 만 같다. 정말 소설 속 주인공으로 긴 담뱃대를 물고 아랫것들을 부리며 사랑채에 앉아 있다면 그 무엇이 부러울까? 

‘흐-흐, 이상한걸! 욕심 버리고 마음 비우고 오겠다는 여정이…….’

또 다른 조준구를 불러일으키는 것 같아 가슴을 쓸어내린다. 조준구를 보라! 결국은 망했다. 서희를 보라! 의지와 목적을 활화산처럼 태우고 숨기며 재산을 다시 찾았지만 두 가지는 모두 이루지 못했다. 그러면 나머지 한 가지는 무엇일까?

최참판댁을 뒤로하고 내려는 골목길에 용이, 칠성이, 강청댁, 임이네, 월선이 곰보목수 등 스쳐가는 얼굴들이 보인다.

“이놈의 살림! 탕 탕 때려 뿌사삐라!”

사랑을 얻지못한 강청댁의 목소리도 월선이를 못 잊어하는 용이도 관심에서 멀어져 이무기처럼 되어버린 임이네도 모두다 사라지고 흔적만 남았다.

세월의 흐름인가? 소설이지만 현실 같은 일들을 떠올리며 주막에서 들이키는 한 사발의 탁배기가 씁쓸한 마음을 담아낸다.


가을이 오고 있는 게 분명하다. 고개를 숙인 들판의 벼들이 노란빛을 발한다. 그리고 감나무에 매달린 대봉감의 주황색 물든 볼이 풀 섶을 울리는 가을 풀벌레 소리와 여울져 여름을 먼 발치로 손 흔들고 있다.

‘그래도 최참판댁 주인이 되어봤으면 죽어도 한이 없제…….’

평사리를 지났다. 상류로 지리산의 품으로 옷고름을 더 풀어 헤칠수록 머릿속은 맑아진다. 간혹 산등성이 허리며 강변에 자라고 있는 차밭이 또 한 번의 수고로움을 돌아보게 만든다.

차 시배지라는 말은 들었지만 정작 녹차라는 것에 대하여 커피에 길들여진 인스턴트 중독은 녹차의 깊은 맛과 느긋함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생각도 욕심도 시시각각 변하는지 모른다. 

차 하면 제일로 친다는 것이 우전이라 했다. 곡우를 전후하여 비오기 전 처음로 수확한 것이라고 했다. 아마 세상이 개벽하기 전에 태초의 맛을 갖고 있어서 그렇게 부르는 것인지 모를 일이다. 

이 년 전, 전라도 보성 녹차 밭에 간 일이 있다. 대규모로 일구어진 작은 산 전체가 녹차 밭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곳의 녹차밭은 자투리 자투리 이어져 바위틈새 하늘 밑에서 자연그대로 이슬 머금고 때깔 내어 지리산의 깊은 맛과 섬진강의 물오름을 간직하여 자란 것이라고 자문해 본다.


이제 하동포구 팔 십리의 끝자락이다. 한 구비를 또 돈다. 높은 산봉우리에 묻어나는 구름 아래로 붉은 빛 교각이 들어온다. 남도대교이다. 전라도와 경상도를 연결하는 다리 그렇다면 이곳은 

“산청에선 부릉부릉 버스를 타고 광양에선 삐걱 삐걱 나룻배 타고…….”

화계장터이다. 그 옛날 5일장의 명성과 촌 냄새를 맡을 수는 없지만 옛 멋을 낸 다고 나름대로 동선을 고려하여 단장한 건물에서 현대화의 냄새를 실감하게 만든다. 장날을 맞춰 왔다면 길 가장자리마다 늘어선 촌 할머니들 모습과 입담들이 구수한 정겨움을 풍길 것이다. 그러고 보니 시장기가 든다. 

‘고기가 둥둥 떠는 순대 국밥 한 그릇에 막걸리 한 잔이면 딱인데!’

옛 정취를 그리워하는 마음에게는 쉽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도로를 건너 강을 본다. 쌍계골 화계골이 섬진강과 합류하는 지점으로 위쪽으로 자꾸가면 협곡은 좁아지고 물길은 빨라지는 구례로 가는 길이다. 여기까지가 하동포구 팔십리가 했지.

‘이쯤에서 여정을 접어야 할까?’

초가을로 접어드는 태양은 어느덧 서쪽으로 길을 재촉하는데 그래도 마지막 해결점을 정하지 못한 욕구는 또 다른 유혹의 낯설음을 갈구한다.

지금까지 말없이 흐르는 섬진강 어머니 품을 걸으면서도 욕심의 종착점을 못 구했다는 것이 발걸음을 화개계곡으로 밀어 넣는다.


화개천을 따라 올라가는 길은 지난봄의 향연과 폭염의 흔적을 곳곳에 남긴 체 강바닥까지 속살을 드러낸 물살이 구슬처럼 너울을 이룬다. 

십리벚꽃길이라 하였다. 무수한 사연과 만남 들이 이곳에 스며들고 흩날렸을 것이다. 그 사연에 나도 한 몫 끼는 지나는 길손이 된다.

화개천을 따라 산 기슭엔 야생차 밭이 많이 보인다. 

가벼운 옷차림들이지만 주말답지 않게 제법 붐비는 인파다. 다들 무슨 사연이 바람이 있어서 오묘한 마음의 새김들로 쌍계교를 지난다.

매표소까지 들어선 지리산의 혜택들이 올망졸망 좌판을 벌려놓고 앉아 있는 아낙들의 손 끝에 주인을 기다린다. 그 모습이 참 평화로워 보인다.


 처음으로 쌍계사를 찾은 때가 갓 스물을 넘긴 때였다. 그 때나 지금이나 별로 변한 게 없는 것 같다. 청아한 물소리가 계곡을 흐른다. 상쾌함을 느끼며 경사가 시작되는 곳에는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빼곡이 난 숲 속 길이다. 가장자리에는 시누대와 산죽들이 청청함으로 감히 곱지 못한 갈등의 심연을 가진 세인들의 접근을 경계하는 것 같다. 한 줄기 바람이 흔들 때마다 그 떨림에 쌓인 피로는 어느새 섬진강 모래톱으로 흩어진다.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힌다. 대웅전 앞 석간수 한 모금이 갈증을 쓸어준다. 꼭 필요할 때의 물 한 모금이 한계 효용의 법칙을 다시 일깨운다.

지리산자락 어디에서 머물다가 달려 마중 나왔는지 바람은 조용한 경내에 풍경소리를 흩어 놓는다. 

불일폭포로 향하는 길 입구! 울창한 산림 사이에 조용히 머물러 앉아 갖은 고뇌와 갈등들을 말없이 보듬어 주고 쓸어준 가녀린 바람들이 하늘을 찌르는 푸름과 곧음으로 왕대나무 숲이 되어 묵도의 행진으로 베일에 싸인 비밀의 하모니가 연주되는 불일폭포를 가리키고 있다.

드문드문 스쳐 지나는 사람들의 모습이 반갑고 평화롭다. 혼자라서 좋을 때도 있지만 이럴 때 누군가 같이 있었으며 얼마나 좋을까? 

‘그래 몇 시간 지나면 후회할 것을 왜 그렇게 욕심의 손톱으로 서로에게 무관심의 상처를 주러 했는지…….’

가깝다는 말만 믿고 시작한 산행이 제법 숨을 차게 한다. 비가 온 후인지 만나는 실개울들의 물이 제법 소리를 더한다. 울창한 나뭇가지 사이를 헤치고 쏟아지는 햇볕이 제법 따갑다. 얼마나 올랐을까? 어디선가 물소리가 들린다. 아마 폭포에 다가서는 모양이다. 

폭포다! 우렁차고 시원하다. 쏟아지는 물줄기는 중간쯤에서 부딪혀 충돌의 포말을 그리며 아픔으로 하얗게 쏟아진다. 그리고 다시 작은 원으로 태어나서 물분자로 나누어져 태초의 품으로 다시 스며들어간다. 이런 모습에 그 누가 무슨 의미를 부여 할 수 있을까? 단지 그렇게 하려는 자체가 욕심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것을…….

욕심은 소유와 머무름에서 생긴다는 것을, 그냥 그대로 한 순간이라도 머물지만 않으면 소유의 근심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이라고 하얀 포말은 부딪힘 소리로 답해주는 것 같다.


하늘이 파랗다. 멍해짐으로 뚫린 가슴팍에 파란 바람이 헤집고 들어온다. 

어머니의 옷고름을 헤치고, 나오지도 않는 젖을 찾은 모습이 보인다. 그러나 이내 어머니의 심장소리에 잠이 든다.

졸참나무, 너도밤나무, 물푸레나무……. 오를 때 보지 못했던 등산로 주변의 나무들이이름표를 달고 도열해 있다. 너무 앞만 보고 달려왔을까? 물도 바람도 직선으로 가지 않는다. 땅의 형상에 따라 갖가지 모양새로 머물고 어루만지며 지나간다.

이제는 돌아가야 하는 시간일까? 뻥 뚫린 가슴속으로 조각나는 햇볕들이 쏟아져 들어온다. 

다시 남쪽으로 향하는 십 구 번 국도변! 발걸음은 장승들이 빼곡이 서 있는 은빛 모래사장이 펼쳐진 평사리 공원으로 숨을 돌리게 한다.

사각사각 발바닥에 느껴지는 모래 감촉이 너무 부드럽다. 심연의 지리산 계곡에서 머물다 밀려 밀려 바람과 물과 함께 여기에 머물고 가을 바람으로 온 몸을 휘감아 땀에 절은 체취를 훑어간다.

산자락을 본다. 몇 굽이가 겹쳤을까? 깊고 큰 산이라는 것을 느끼게 한다. 그 지리산을 돌아서 머물다 흐르는 강물에 티 하나 먼지 하나 없이 사그락 거리는 모래속에 발을 담근다. 촉감이 간질간질 하다.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게 새 집 다오”

지난 오월 신록의 푸름과 함께 여섯 살 박이 둘째 녀석이 이곳에서 두꺼비집을 지으며 훈풍에 발갛게 물드는 볼로 재롱을 부리는 모습이 눈에 밟힌다.

‘돌아가야지!’

때로는 너그럽고 간혹 사나운 물 흐름 지닌 섬진강과 지리산의 넉넉함을 보면서 이곳에 흩날리는 한 알의 모래 알갱이에도 비교되지 못하는 것이 바로 사람이란 것을……. 

혼란스러울 때 이기심이 눈앞을 가려 한 치 앞을 가누지 못할 때마다 섬진강 따라 하동포구 팔 십 리 길은 사람들의 오욕에 물든 지친 마음을 다시 한 번 쓰다듬어 주는 자연의 제일 소중한 선물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소금기에 절여진 일상의 실증에 더 큰 느낌을 갈구하고 시작한 여정이어서 그런지 산을 안고 도는 구월의 어스름은 완만하게 흐르는 포구에 빨리 젖어든다.

물결과 바람 속에 날려 버린 세속의 때도 저만치 바다로 흘러들고 있겠지!

어느새 남해대교가 눈에 들어온다. 다시 건너야 할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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