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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조개

by 정채린

조개는 진주를 만들 때 통증을 느끼지 않는다.

흔히 진주가 상처에서 시작된다고 알고 있으나 진주는 상처가 아닌, 조개가 뱉지 않은 물질로부터 시작된다. 조개를 해감해보면 알게 된다. 조개는 자기 안의 뻘과 더러운 것을 깨끗이 뱉어낼 줄 안다. 그러니 진주의 첫 시작은 조개의 의지로부터 시작된다. 자신 안에서 키우겠다고 마음먹은 그것을 조개는 껍질이 속살을 감싸는 것처럼, 자신 안에서 감싼다.


진주는 조개가 마음먹고 끝내 품어버린 타자다. 진주를 만들겠다고 결심한 조개는 껍질을 만들 때 쓰는 물질을 진주에게 조금씩 양보한다. 껍데기가 될 예정이었던 그 물질들은 조개가 품은 다른 어떤 것을 겹겹이 둘러싸 층을 만들며 키운다. 그렇게 진주는 조개의 또 다른 몸이 된다.


진주 특유의 꿀 탄 우유처럼 달큼하며 손끝에 소리 없이 내려앉은 천사 같은 광채는 다른 보석이 빛나는 원리와 조금 다르다. 다이아몬드와 사파이어가 단단한 표면으로 빛을 밀어 반사하는 광채를 낼 때, 진주는 조개가 이물질을 품었던 것처럼 빛을 품는다. 진주가 품은 빛은 진주의 틈과 균열 사이사이로 흘러 들어가 층과 층 사이에서 진동한다. 층층이 스민 빛이 산란하며 만들어내는 부드러운 스펙트럼. 균열이 없으면 진주의 빛도 없다.


나는 내 몸의 모든 부분을 안다. 내 성대는 네 시간을 연속으로 노래해도 쉬지 않고, 허리는 하루 종일 앉아 있어도 지치지 않는다. 건조한 피부는 언제나 로션이 필요하고, 햇빛에 타며 벽화를 그릴 때 생긴 점이 검지에서부터 어깨까지 아홉 개가 있다. 강한 부분도, 약한 부분도, 특별히 소중한 부분도, 잘 신경 쓰지 않는 부분도 있으나, 나의 몸의 모든 부분들은 조개가 진주를 만들어 낸 것처럼 나의 물질들을 모아 만들어낸 나의 것이다. 나는 내 몸에게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으며, 내 몸 구석구석을 살필 권리가 있다.


언젠가 진주가 들어있는 조개를 판매하는 게 유행한 적이 있다. 그중에는 살아있는 진주조개를 배송해 주는 업체도 있었다. 영상을 찍는 사람들이 너도 나도 조개를 사서 진주를 꺼내는 영상을 찍어 올리곤 했다. 진주를 꺼낸 조개는 다시는 진주를 만들지 못한다. 버려지기 때문이다. 그것은 조개 양식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영상에서는 패각을 잘라 마지막 숨을 헐떡이며 완전히 벌려진 조개의 속살을 마구 헤집어 진주를 꺼낸 뒤 죽어가는 조개를 무심히 버린다. 진주가 꺼내어질 때 조개는 갯벌 대신 어떤 유언을 내뱉었을까?

'나의 보석을 잘 부탁합니다. 당신들이 그것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걸 알고 있어요. 부디 소중히 다뤄주세요.'

진주를 빼앗기는 조개는 관자가 뜯기는 고통 속에서도 진주만 생각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자신이 품겠다고 결심한, 자신의 살로 키워낸 몸의 일부. 빛나는 보물. 자신과 닮지 않아 더욱 귀하고, 닮지 않아 더욱 가치 있는.


내 딸은 나를 전혀 닮지 않았다. 가늘고 옅은 갈색머리, 쌍꺼풀 없는 긴 눈, 분홍색의 흰 피부까지. 딸이 다섯 살 때 문화센터 입구에서 바닥에 누워 떼를 쓰며 울고 있는 딸을 달래고 있는데 지나가던 할머니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친엄마가 맞느냐고 물을 정도로 닮지 않았다.


나는 2023년 6월에 이혼했다. 그 후로 단 한 번도 딸을 만나지 못했다. 폭력으로부터 도망친 여자들은 평생 그 남자를 만나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만나면 죽을 수도 있으니까. 나는 엄마지만 엄마의 일을 할 수 없다. 딸의 생일을 챙길 수도 없고, 어디에 사는지 전화번호가 어떻게 되는지도 모른다. 아플 때 이마에 손을 얹어 줄 수도, 배고플 때 밥을 차려줄 수도 없다.


나는 나의 몸, 나의 진주를 잃었다. 나의 패각은 진작에 닫힐줄 모르고, 살은 헤집어 벌려졌다. 나는 죽지 않았으나 죽었다. 진주를 빼앗기고 버려진 조개처럼 죽었다. 그러나 분리된 나의 또다른 몸은 이제 나와 이어지지 않았으니 다행히 통각의 연결도 끊어졌다. 그러니 나는 아프지 않다. 아픈 건 진주다.


진주의 빛은 완전하게 닫히지 않은 틈 사이로 빛이 스며들어 생긴다. 표면이 완전하여 빛이 스며들지 못한다면, 진주의 빛은 지금과는 전혀 다를 것이다. 균열이 진주의 귀한 빛을 만드는 것처럼 나와 딸 사이의 틈은 언제가 빛을 만들 것이다. 지금은 그 빛에 닿지 못해 어둠처럼 보일지라도 나는 알고 있다. 그것은 나의 밖에서 빛나고 있다.


그 보석은 내 밖에서 걷고, 자란다. 울고,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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