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늘 한 줄 늦게 웃었다 — 감정 없는 비평의 시대
글을 어디엔가 올린다는 건,
어느 날 불쑥, 낯선 사람이 빳빳한 정장 차림으로 내 앞에 나타나
낯선 목소리로 말을 건네는 일과 닮아 있다.
그들은 대개 이런 식으로 말한다.
“돈 주고 사기엔 좀 아깝지만,
그래도 포스팅 사이트 가판대에 굴러다니는 글보단 낫네요.”
이런 말은 얼핏 비평처럼 들리지만,
실은 누군가의 문장,
감정과 맥락이 스며 있는 그 글을 어딘가에 세워두고,
다른 것들과 나란히 줄을 세우는 일이다.
그들은 읽고 있는 게 아니다. 그저 분류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 말을 쓰는 사람들은, 겉으론 자의식이 넘쳐 보이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자존감은 낮고, 자기연민이 조용히 고여 있는 경우가 많다.
비평이라는 외투를 빌려, 자신의 위치를 어딘가에 세우려 애쓰는 습관.
말투는 조용하지만, 그 침착한 중립성은 언제나 우위의 언어가 된다.
“나는 이 정도쯤은 알고 있어요.”
“당신의 글은 여기쯤에 두죠.”
그들은 그렇게, 자신만의 투명한 선을 그으며 말한다.
그 말들이 불편하게 다가오는 건, 그 속에서 누군가의 상처나 온기가 아니라
지친 비교의 그림자만이 어른거리기 때문이다.
감정이 빠져나간 언어는, 가장 먼저, 사람의 온기를 지워버린다.
물론, 글에는 기술이 있다.
매끄럽게 잘 다듬어진 문장이 있는가 하면,
어딘가 어색하게 비틀린 문장도 있다.
정문과 비문을 가르는 이론도, 분명 어딘가에 존재한다.
비평은 어쩌면 그 지점에서 출발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가끔,
그 문장을 쓴 ‘사람의 마음’을 잊어버린 비평이 가장 비인간적으로 느껴진다.
글을 잘 쓴다는 것과, 그 글이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시간’이 된다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일이다. 문장은 기술로 쓸 수 있지만,
그 시간을 건네는 일에는 언제나 마음이 필요하다.
사람들은 종종 글을 잘 쓴다는 것과
그 글이 ‘책이 될 수 있느냐’를 같은 선 위에 올려놓는다.
하지만 그 둘은 전혀 다른 선상에 있다고 생각한다.
문장을 잘 쓴다는 건,
언어의 감각과 밀도의 문제다.
반면, 돈이 될 만한 글을 쓴다는 건
독자와 시장, 유통과 브랜딩이 얽혀 있는 전혀 다른 분류의 문제다.
이 둘을 혼동하기 시작하면, 모든 글은 ‘팔릴 수 있느냐’는 잣대만 남고
존재의 이유를 잃어버린다. 나는 그 모든 가능성 이전에,
한 사람이 왜 이 글을 썼을까,
그 마음부터 조용히 들여다보고 싶다.
사람을 살리는 피드백과 댓글 그래서 나는 늘 되묻는다.
이 말이 누군가의 쓰기를 멈추게 하지는 않을까?
내가 한 이 말 한 줄이
그 사람의 글을 겨누는 날카로운 무기가 되지는 않을까?
그리고 내 마음을 비추는 부끄러운 거울이 되지는 않을까?
비평은 필요하다. 하지만 비평이 사람을 지워선 안 된다.
나는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말을 고르는 윤리도 함께 쓰고 싶다.
잘 쓴 글이든, 서툰 글이든
그 글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를 조금이라도 상상할 수 있다면,
우리는 아마, 조금 더 따뜻한 말로 서로를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의 문장을 읽는다는 건, 그 사람이 살아온 시간을 잠시 빌려보는 일과 비슷하다.
그 시간이 내게 맞지 않았다면,
그저 조용히 책을 덮고, 문을 나서면 된다.
나는 더 이상 누군가의 마음 위에 올라서서
말을 내뱉고 싶지 않다. 말은 무기가 아니라,
서로를 살려내는 손이 되어야 하니까.
그리고 덧붙이자면,
나는 종종 독서 모임 같은 가벼운 자리에서 타인의 글에 대해 날카로운 평가를
유머처럼 툭 던지곤 했다.
그 말들이 그저 웃음의 일부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나는 조금 늦게서야 깨달았다.
말은 언제나, 누군가의 마음 위에 조용히 내려앉을 수 있다는 것을.
그 사실을 이제라도 알게 되어, 조금은 다행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