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예민한 사람'이라면, 이 글이 불편할 수도 있어요
오디오북을 들으면 듣는 순간에는 참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어.
그런데 이상하게도, 며칠만 지나면 그 이야기가 뭐였는지 거의 기억이 안 나.
그냥 흘러가는 라디오처럼, 들을 때만 반짝하고 머릿속엔 남는 게 없어. 이게 흔히 하는 말처럼, 종이책이 최고다. 책은 읽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서 하는 말이 아니야.
활자로 읽을 때는 문장 하나하나가 마음에 새겨지는 느낌이 있는데, 오디오북은 내 귀를 스쳐 지나가 버려.
듣는 동안만 잠깐 빛나고, 금세 사라지는 이야기의 잔상.
왜 그런지 생각해 봤거든.
혹시 소리 없이 드라마나 영화를 자막만으로 감상해 본 적 있어? 나는 자주 그렇게 해.
이상하게 들릴 수 있지만 드라마는 보고 싶은데 소리는 원하지 않는 순간이 많거든. 물론 자막과 화면만으로도 이야기를 충분히 전달받고, 감정선도 놓치지 않아.
소리 없는 감상은 마치 무성영화 시대의 감성처럼 오직 화면과 글자만으로 감정의 결을 읽어내는 경험이랄까.
그럴 때 있잖아. 친구들이
“나 그 남자 노래 잘해서 반했어.”
“내 남친은 목소리가 너무 좋아”
“그 연예인의 중저음 멋있지 않아?”
이런 얘기할 때, 솔직히 나는 잘 모르겠더라.
내겐 목소리의 매력보다는 그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가 훨씬 더 중요해.
듣기 힘들 정도로 이상한 목소리거나, 발음이 심하게 안 좋거나, 심한 눌변일때만 신경이 쓰이고, 그 외에는 목소리가 좋든 평범하든 별 차이를 못 느껴.
난 음악감상도 하지 않아.
사람들이 종종 "음악감상이 취미입니다."라고 말할 때 그게 무슨 소리인지 최근까지 이해하지 못했어.
알고 보니까 그건 진짜로 '음악을 듣는 행위만을 즐기는 것.'이더라고.
나는 클래식 음악회에 가는 것을 좋아하지만, 그 이야기는 반대로 말하자면 그 정도로 정제되고 절제된 음악과 공간이 아니라면 음악을 감상하는 것에 시간과 정신을 쓸 가치를 느끼지 못한다는 거야.
상상해 본 적도 없다니까.
누군가가 오롯이 음악만을 듣고 있는 시간이 있었다는 것을.
그렇다고 해서 음악의 필요성을 전혀 못 느끼는 건 아니야. 글 쓸 때 듣는 음악이 따로 있고, 글마다 그 이야기를 상징하는 음악이 따로 있기도 하거든. 예를 들면 최근에 쓴 단편소설 'AI를 팝니다(가제)'의 경우 그 글을 쓰면서 The Mole - Christoffer Moe Ditlevsen을 반복해서 하루 종일 들었었어.
그런데 내가 글 쓸 때 음악을 트는 건, 사실 그 소리 자체를 즐기려는 게 아니야. 그것보다는 음악이 울리는 그 공간 안에 나를 가둬서, 세상과 단절된 집중의 방을 만드는 느낌이거든. 그래서 이어폰으로 음악 듣는 건 내겐 별 의미가 없어. 이어폰은 공간을 납작하게 만들어버려서, 그 안에선 내가 원하는 공간감이 전혀 안 느껴지거든.
오디오북을 듣는 이유는 편리함 때문이야. 쉴 때 침대에 누워서 쇼츠를 보는 대신 책을 읽고 싶은데 손목이 약해서 책을 들고 읽는 게 쉽지 않아. 그런데 독서가 내게는 가장 재미있는 놀이거든. 그래서 오디오북을 듣지. 하지만 오디오북은 내게 이야기의 흐름만 따라가게 해줄 뿐, 문장 하나하나의 희열을 느끼기에 하지는 못하더라.
가끔 이거다 싶은 멋진 문장이 있어서 두세 번 다시 들어봐도, 그 문장이 내 안에 남지 않아. 반드시 문자로 된 텍스트를 시각적으로 읽어야만 그 문장이 내 안에 각인 돼.
나는 글을 쓰기 전까지는 상업 디자이너였어, 취미이긴 했지만, 아크릴화를 그려 개인전을 열기도 했었지. 그래서 소리가 없는 세상에서 살아도 직업과 일상생활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어, 그런데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사정이 달라졌어. 내 글에는 청각적 심상이 다른 감각들에 비해 유난히 부족하다는 걸 알게 됐고, 그게 글의 다층적인 소묘를 막는 벽이 되더라고.
이건 마치 음식을 할 때 한 가지 맛을 못 쓰는 느낌이랄까. 짠맛 단맛 매운맛은 있는데 신맛이 빠진 김치찌개를 끓여버리게 되는 거지. 생각만 해도 맛없을 것 같다.
내 글이 신맛 빠진 김치찌개라는 걸 알게 된 건, 내게 시를 가르쳐주시는 박소진 선생님 덕분이었어.그날 나는 수업 중에 선생님의 지도에 따라 짧은 문장을 썼고, 수업이 끝난 뒤 그 문장을 다듬어 시로 적었거든. 그 시는 이런 시였어.
우물이 있다 나는 이 곳에 자주 온다
빛나는 우물에서 아들이 죽었다고 했다
쇠가 울리는 소리로 우물은 운다
흘러내린 쇳물 사이로 쇠가 꽂힌다
식은 막대기에서 피냄새가 난다
우물은 붉다
빛이 너무 더워지면 온도가 없어진다
그 이야기를 아들이 죽었다는 의사가 말했다
집을 짓는다는 소문이 들리면 우물이 저절로 온다
회색먼지와 쇳덩이가 바가지에 걸린다
마중물처럼 걸려 올라온 밧줄이 도르레에 감겨
뜨겁다고 뜨겁다고 소리쳐도 듣지 못하는 틀이 있다
쇠가 굳는 소리를 듣는 그을린 나무처럼 그가 걸어 나온다
숯이다
외친 이의 목이 꽃에 걸린다
잊지 말라고 검은 몸을 잊으라고
그리고 이 시를 읽고 선생님이 해주신 피드백은
'청각적 심상에 대한 묘사를 더 생각해보고, 감각을 확장해보라'라는 거였어.
우물이 있다 나는 이 곳에 자주 온다
빛나는 우물에서 아들이 죽었다고 했다
쇠가 울리는 소리로 우물은 운다
흘러내린 쇳물 사이로 꽂힌 쇠
식은 막대기 끝에서 피냄새가 난다
우물은 붉다
빛이 너무 더워지면 온도가 사라진다
그 이야기를 아들이 죽었다는 의사가 말했다
집을 짓는다는 소문이 들리면 우물이 저절로 온다
도로가 생긴다는 소문에도 우물이 걸어온다
회색먼지와 쇳덩이가 바가지에 걸린다
비릿한 쇳내가 철컹이며 끓고 철이 녹기 시작하면
풀무를 울리는 소리 펑펑 폭발음이 터진다
깃발처럼 펄럭이는 불길을 아들이 삼켰다
마중물처럼 걸려 올라온 밧줄이 도르레에 감겨
뜨겁다고 뜨겁다고 소리쳐도 듣지 못하는 틀이 있다
쇠가 굳는 소리를 듣은 그을린 나무처럼 그가 걸어 나온다
숯이다
외친 이의 목이 꽃에 걸린다
잊지 말라고 검은 몸을 잊으라고
이 세 줄을 추가했지.
그런데 나는 이 간단한 문장을 추가하면서 놀랍게도 제철소에서 어떤 소리가 나는지 혼자서는 거의 표현을 떠올리지 못했어. 쇠로 만들어진 거대한 도르래의 소리가 '철컹'이다. '펑펑 폭발음이 터진다.'라는 간단한 표현을.그래서 유튜브에 제철소 영상을 틀어놓고 자막을 켰지.
맞아. 나는 그 와중에도 '자막'으로 소리를 시각으로 본 거야.
내 세계는 그야말로 소리 없는 무음의 세계였어. 음소거의 세계에서 살고 있었더라고.
그러면 난 항상 다른 사람들보다 소리를 못 듣느냐고?
아니, 누구보다 예민하게 소리를 듣는 영역이 있어.
내가 아주 오래전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해 왔던 게 있었어. 바로 사이렌 소리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었어. 나는 밖에서 사이렌 소리가 아주 작게 들려와도 그 소리가 어디서부터 시작되어 어디로 흘러가는지, 경찰차인지 구급차인지 소방차인지까지 구별해냈어.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거나, 소방차가 여러 대 지나가고, 이어서 구급차까지 지나가면 '아, 어딘가에 큰불이 났구나, 혹시 우리 집 근처는 아닐까.' 하며 괜히 창밖을 내다보곤 했어.
그런데 신기하게도, 내 주변 사람들은 그런 소리에 전혀 관심이 없더라.
내가 “방금 사이렌 소리 못 들었어?”라고 물으면, 그들은 듣지 못했다고,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더라고. 당연히 청각에 아무 문제도 없고, 오히려 음악 감상을 즐기는 사람들이었는데 말이야.
그리고 나는 이제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어. 내게 청각은 외부를 감시하는 창문인 거야.
내가 음악을 듣지 않는 이유도 여기서 비롯돼. 음악은 많은 이들에게 감정을 열고 몰입하게 만드는 예술이지만 내게는 감정을 조율하는 예술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감싸던 경계망을 무력화시키는 위험 요소가 되어 버리는 거야. 특히 이어폰을 사용한다는 건, 마치 마취제로 더듬이를 마취당하는 거랄까.
나는 누군가의 말소리를 글로 옮기기보다는, 눈앞에 펼쳐진 장면을 해석하거나, 감각의 미세한 이상치를 쫓아 언어로 바꾸는 쪽이 더 자연스러워. 그래서 내 글에는 정적과 긴장, 시각적 응시, 그리고 체감적인 묘사가 자주 등장하지만, 사람들의 말소리나 음악적 리듬은 상대적으로 비어 있어.
나는 난청이 있어. 어린 시절의 사고로 이명이 생겼고, 그 이명 때문에 아주 약간의 청각 소실이 발생했어, 장애등급을 받을 정도는 아니고, 30대에 받은 청력검사에서 50대의 청각을 가지고 있다고 나올 정도.
반면 시력은 정말 좋아. 나는 아차산 아래에 살았는데, 아차산은 바위산이거든. 멀리서 등산하는 사람의 신발 끈 색깔까지 볼 수 있었고, 잡지에 인쇄된 CMYK의 작은 동그라미도 보였고. 하늘을 가르는 비행기의 로고만 보고도 아시아나인지 대한항공인지 구별할 수 있을 정도였어. 그때의 추정 시력은 4.0.
지금은 나이를 먹어서 시력이 많이 줄었는데 그래도 안과에서 잰 시력이 2.0이야.
후각도 예민한 편이야. 만약 친구가 아침에 제육 볶음이나 미역국, 된장찌개 같은 개성 있는 냄새의 음식을 먹고, 샤워하고 화장까지 마친 뒤 나를 만난다면, 나는 그 친구의 정수리 냄새만으로도 아침 메뉴를 맞출 수 있어.
내게 청각은 조금씩 멀어졌지만, 그 빈자리를 시각과 후각이 더 또렷하게 채워주고 있어. 그래서 나는 세상을 소리보다는 빛과 냄새, 그리고 촉감으로 더 깊이 읽어내.
내 감각은 균형이 아니라 불균형이 빚어낸 묘한 조화였어. 귀가 살짝 고장 났고, 그래서 귀로 듣지 않는 대신 눈이 내 귀가 되었지. 나는 소리를 듣는 대신, 세상을 봐. 냄새로 기억을 꺼내고, 시선으로 음악을 분해해.
쇠가 부딪힐 때면 그 소리를 듣는 대신에 쇠가 미세하게 진동하며 떨리는 모습을 눈으로 읽어. 그래도 내게 청지각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자각한 후로는 신경이 쓰이긴 해. 부족한 감각과 과잉 된 감각이 서로의 자리를 채우며 맞물려 돌아가는 내 세계. 그 불균형 속에서 나는 여전히, 보고, 맡고, 느끼며 나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해석하고 있어.들리지 않는 곳에서 시가 시작되고, 보이는 소리와 냄새나는 기억들로 문장을 만들어낸다. 나는 결핍된 감각으로 누군가의 소리를 대신 보고 있어.
The most personal is the most creative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 -마틴스콜세지
이 말은, 결국 진짜 나의 감각과 경험, 내가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모습이야말로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고유함이라는 뜻이야.
남의 시선이나 기준에 맞추려 애쓰는 대신, 내 안의 불균형과 결핍, 그리고 나만의 감각적 방식까지도 솔직하게 받아들이고 표현할 때, 그 자체가 곧 개성의 본질이 되는 거지.
내가 자막만으로 드라마를 보거나, 소리 없는 감상 같은 독특한 미디어 소비 방식을 즐기는 것도 결국 나답게 세상을 해석하는 방식이고, 그게 곧 나만의 특별함이야.
남들과 다르다는 걸 불안해 하지 마 HSP는 불안이 아니라, 개성이야.
나다운 것에 집중할 때 진짜 개성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는 걸 잊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