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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쓴 글이 나를 넘는 법

2025서울국제도서전 후기

by 정채린

문학계의 오랜 경구중 “글은 작가를 넘을 수 없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문학 비평이나 글쓰기 교육에서 오랫동안 회자되 온 격언으로 글의 완성도나 깊이가 작가의 역량과 내면세계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나는 이 말에 동의하는 편이다. 글은 결국 작가가 경험하고, 사유하고, 통찰한 것을 바탕으로 창조된다.

글에는 작가가 세상을 이해하는 깊이와 인간 본성에 대한 통찰 그리고 삶과 세계의 다양한 측면에 대한 경험이 문장 속에 고스란히 녹아들기 마련이다.

그래서 만약 작가의 시야가 좁거나, 경험이 부족하거나, 통찰력이 깊지 않거나, 배움이 부족하다면 아무리 기술적으로 잘 쓴 글이라고 하더라도 그 깊이나 폭에서 한계를 보일 수밖에 없다. 또한 그 글의 장르가 소설이나 시처럼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다면 작가의 상상력과 공상의 한계가 글이 구축할 수 있는 세계와 사건의 한계일 수밖에 없다.


또한, 글은 작가의 가치관, 세계관 그리고 무의식의 내면세계까지 반영한다. 작가의 중심 가치가 향기처럼 종이에 글씨로 촉촉하게 스며들고, 작가가 세상을 보는 시각이 사진처럼 글에 그대로 현상 될 수밖에 없다.

작가의 내면은 글의 주제, 등장인물의 성격과 서사의 전개 방식, 세계에 대한 묘사 등 모든 요소에 영향을 미친다. 작가가 자신의 내면을 충분히 탐구하지 못했다면 부족한 사색의 빈자리가 그대로 글의 빈자리로 남을 것이며, 일상과 모순되거나 피상적인 가치관을 따르고 있다면 글 역시 피상적으로 흩어지고 모순의 자국을 그대로 남기며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다.


게다가 아무리 훌륭한 글쓰기 기술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기술만으로는 진정으로 독자에게 깊은 감동이나 울림을 주는 글을 쓰기 어렵다. 기술은 도구일 뿐이다.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종이나, 한 획도 그어보지 못한 펜은 그 자체만으로 감동이 될 수 없다. 그 도구를 통해 무언가를 담아내는 작가의 움직임이 있어야 글이 되고, 감정을 움직이는 힘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힘을 담아내는 작가의 정신적 깊이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기술은 껍데기만 남을 수 있다.

이처럼 "그의 글은 작가를 넘을 수 없다"는 말은 글쓰기라는 행위가 단순히 기술적인 작업이 아니라 작가의 존재 전체가 투영되는 총체적인 행위임을 강조한다.


그러나,

"작가는 절대로 자신을 넘는 글을 쓸 수 없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나는 '절대 그럴 수 없다'고 가능성을 닫고 싶지는 않다.

예술은 종종 그것을 조형한 인간을 넘는다. 재능 있는 창작자라면 간혹 창조물이 창조자인 자신을 넘어서는 황홀한 경험을 해봤을 것이다. 이론적으로는 설명되지 않을듯한 이 일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며칠 전 2025 서울 국제 도서전에 다녀왔다. 전날 저녁을 굶고, 당일 아침도 먹지 않은 채 집을 나선 나는 매우 배가 고픈 상태였으므로 굶주린 해파리처럼 전시장을 유영하고 있었다. 그때 어딘가에서 아주 먹음직스러운 청포도 향이 풍겨왔다. 나는 홀린 듯이 그 부스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독립 출판사 ‘시시담시시청’의 부스였다. 그리고 이윽고 그 향이 도서전 특별 굳즈인 <여름공원> 이라는 이름의 향낭에서 나는 향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향이 정말 좋네요.”라는 나의 감탄사에,

'시시담시시청'의 직원분은 여름과 청포도 향이라는 수식어가 어울리는 환한 미소로

“제가 조향한 향낭이에요”라고 설명해 주었다.

그러면서 이 향낭에는 청포도 향은 전혀 들어있지 않았지만, 다 조합하고 나니 자신도 신기할 정도로 청포도 향이 나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 향낭은 정말로 향기로웠다. 단순한 달콤함을 넘어서 싱그럽고도 신비로운 향이었다. 마치 갓 수확한 청포도 알갱이들이 햇살 아래 터져 나오듯 코를 간지럽히는 상큼함이 퍼져 나왔고, 동시에 풀잎의 풋풋함과 이슬 맺힌 여름의 촉촉한 새벽 공기 같은 맑고 깨끗한 향이 어우러져, 천국의 아침 숲길을 걷는 듯한 청량감을 선사했다. 향의 마지막은 청포도 식탁 위에 놓인 들꽃을 한 아름 담뿍 안고 얼굴을 묻은 듯 은은한 꽃향기와 시원한 풀잎 향으로 자연이 선사하는 순수하고 깨끗한 생명력이 응축된 듯한 향기였다.


내가 홀린 듯 향기를 맡고 있으니, 직원분의 설명이 이어졌다.

“자몽과 쁘띠그랑 로즈메리와 네롤리, 버베나, 로즈와 머스크를 섞어 만들었어요.”

그 말을 듣고 나니 향이 더욱 신비해 보였다. 청포도와 비슷한 향은 들어가지 않았는데 어떻게 이런 완벽하게 아름다운 청포도 향이 날 수 있을까. 나는 그 순간을 잊지 않으려고 얼른 사진을 찍고 부스를 빠져나가며 간단한 메모를 남겼다

“아름다운 것을 조합하면 더욱 아름다운 것이 된다.”



작가는 항상 어제의 자신을 넘고 싶어 한다. 매일 눈과 귀로 이야기를 수집하고 작은 손가락을 놀려 무언가를 남기면서 자신의 능력보다 더 좋은 글이 마법처럼 흘러 나왔으면 하는 바람을 가진다. 그렇다면 작가가 본인을 넘는 글을 쓰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 작가 안에서 흘러나오는 것들이 담을 그릇을 넘어 식탁보를 흠뻑 적시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도서대전에서 우연히 만난 그 청포도 향낭에서 답을 얻고 싶다. 자몽, 네롤리, 로즈메리, 로즈의 향기를 엮어 무릉도원의 청포도향를 얻은 것처럼, 내 안에 든 여러 가지 감정과 감각과 경험과 사유를 한데 묶어 아틀라티스에서 건져 올린 것 같은 신비롭고 흥미로운 이야기와 엘도라도에서 가져온 듯 감각적이며 아름다운 글, 그리고 천국에서 내려온 듯한 감정을 울리는 글들을 쓸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싶다. 내 안의 집단 지성들이 더하기가 아니라 곱하기가 될 것을 기대하며 오늘도 읽고 쓰고 느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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