될 수 있었던 나에서 완성하는 나로
가끔 나를 사로잡는 질문이 있다. 질문의 종류는 매우 다양해서 '왜 잠자리는 날개가 네 개일까?'부터 시작해 '진정한 선의란 무엇일까?'까지 장르를 넘나 든다. 또, 내 호기심은 인간 탐구에도 열심이다. '왜 어떤 사람은 자신에 대한 대답은 하지 않으면서 타인에 대한 질문만 늘어놓는가?'라든가 '여름에 휴대용 선풍기를 들고 다니는 사람과 부채를 들고 다니는 사람들 간의 차이' 같은 사소하거나 거대한 질문도 나의 관심사다. 아주 어릴 때부터 늘 세계를 관찰해 왔고, 갑자기 떠오르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떠나는 지적 모험을 매우 즐겼다.
그래서 나는 주변 사람들 관찰하기를 좋아한다. 내 시야 안에 들어오면 누구든지 필연적으로 관측의 대상이 된다. 그런데 본격적으로 전업 작가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고, 글을 배우기 시작하면서부터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 유독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늘 비슷한 인상을 주는데, 문제는 그 미묘한 거슬림이 어디서부터 오는지 정확히 표현할 수 없어 답답하다는 것이다. 나는 그들을 조금 더 적극적으로 관찰하면서 그들의 어떤 면이 나의 관심을 끄는지, 또는 내 마음을 건드리는지 탐구했고. 이제 그 답을 찾았다.
나는 중학교 1학년 때 태어나서 처음으로 창작 활동으로 돈을 벌었다. 중학생이 되자마자 가입한 만화 동아리에서 동아리 회원 각자가 그린 짧은 만화와 일러스트를 모아 책을 냈고, 여의도 서울 코믹월드에 부스를 얻어 판매했다. 비록 작은 돈이었지만, 내 창작물로 돈을 벌었다는 사실과 내 그림을 사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신기하고 좋았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세부 분야는 조금씩 달랐지만 계속해서 '미술 계통의 창작'으로 돈을 버는 직업에 종사했다. 미술, 음악, 문학 등 어느 분야든 창작은 고된 일이다. 특히 창작으로 돈을 버는 행위는 창작자에게 재능에 대한 고민을 더하며 가뜩이나 힘든 일을 더욱 고되게 만든다.
'작은 재능은 신의 가장 큰 저주'라는 문장의 냉혹함을 느껴본 사람은 이 말이 얼마나 잔인한지 안다. 시인 김소연은 그의 수필 『나를 뺀 세상의 전부』에서 "이 문장을 처음 접했을 때, 누군가에게 몹쓸 것을 들킨 기분이 들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몹쓸 이 말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이 세계의 현실이다. 그리고 나는 작은 재능이 신의 저주가 되는 과정을 잘 알고 있다.
어린 시절, 나는 그림에 재능이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약간의 재능은 있었다. 적어도 재능이 전혀 없는 사람보다는 손을 섬세하게 놀릴 수 있었다. 하지만 여느 분야가 다 그렇듯, 프로의 세계는 재능 있는 사람들끼리의 싸움이다. 재능이 없는 사람들은 애초에 그곳에 발을 들이지 않으니까.
재능이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시각 예술의 아름다움은 악마처럼 나를 유혹해 결국 그 세계에서 허우적거리게 만들었다. 아무리 팔을 뻗어도 닿을 수 없는 영원한 절망의 세계에서 나를 겨우 숨 쉬게 한 것은 그나마 뛰어난 색 구분 감각과 미적 감각, 그리고 컴퓨터를 잘 다루는 이공계열의 재능이었다.
적은 재능으로도 먹고살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세계의 함정이자 구원의 밧줄이었다. 다양한 직업이 산업별로 분화된 현대에 태어난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랄까.
그렇게 미술의 세계 끝에 겨우 매달려 있던 나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발판 삼아 다시 문학이라는 재능의 전쟁터 한 복판으로 가겠다며 모든 짐을 싸들고 출발했다. 12살 때와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제는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하는 몇 가지 방법을 안다는 것뿐이다.
언젠가 프랑스 자수를 배우기 위해 문화센터에 등록했다가, 3주 만에 수업을 환불받고 나온 일이 있었다.
재능이 없어서도, 배우기 힘들어서도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재능이 넘쳐서였다.
프랑스 자수의 핵심은 여러 기법을 익히는 것에도 있지만, 얼마나 정교하고 규칙적으로 바늘땀을 꿰는가에 있다. 자수틀에 천을 고정하고 도안을 확인한 뒤 필요한 기법으로 실을 천에 꿰는데, 천의 앞에서 뒤로 바늘을 넣을 때는 바늘이 눈에 보이니 크게 어렵지 않다. 문제는 천의 뒤에서 앞으로 바늘을 뺄 때다. 이때는 바늘을 잡은 손이 천 뒤에 있어 위치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자수를 웬만큼 잘하는 사람들도 바늘이 올라올 위치를 잡기 위해 여러 번 찔렀다 뺐다 반복 한 뒤, 원하는 위치가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바늘을 뽑아 올린다.
그런데 나는 두 번째 주부터 뒤에서 앞으로 오는 바늘의 위치를 한 번에 잡을 수 있었다. 손이 보이지 않아도 위치를 알 수 있었고, 내가 찌르고 싶은 곳으로 정확하게 바늘을 옮길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속도는 남들의 두세 배를 앞섰고, 자수의 여러 기법도 한 번만 보면 선생님이 미처 말하지 못한 팁까지 꿰뚫어 작품을 완성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문화센터 선생님에게 배우기엔 부족함을 느꼈다. 수업을 환불받은 돈으로 책방에 가서 자수교본을 한 권 사 오는 것으로 수업을 대신했다. 몇 달 뒤, 친한 언니에게 내 작품을 보여주며 프랑스 자수를 배운다고 하자 눈 나빠진다고 말리기에 약간의 고민 끝에 그만두었지만, 만약 계속 배웠다면 자수의 진정한 어려움을 깨닫고 벽에 부딪히기까지 아주 멀리 나아가야 했을 것이다.
반면 재능이 너무 없어 금방 그만둔 수업도 있었다. 바로 케이팝 댄스였다. 친구들과 함께 배우려고 별생각 없이 등록한 학원이었는데, 정확히 한 달 만에 그만두었다. 초급 클래스의 다른 친구들은 어설프게나마 동작을 따라 했고, 두 시간 수업이 끝나면 어느 정도 동작을 익혀 음악에 맞춰 그럴싸하게 움직였다. 하지만 나는 똑같은 시간을 배웠음에도 '춤이라고 부를 수 없는 삐걱거림' 그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에이, 춤을 못 춰 봤자 얼마나 못 추겠어?'라고 생각한다면 일단 고맙지만, 막상 내 춤을 보게 된다면 당신은 고장 난 로봇과 갓 태어난 기린을 합친듯한 나를 보며 차마 웃지 못할 것이다. 나는 춤에 너무 재능이 없어 단 두 시간 만에 벽을 만났다.
그러니까 재능의 정도를 정량적으로 측정하는 척도가 뭐냐고 묻는다면, 나는 '벽을 만나는 시기'가 언제였나를 따져보라고 말하고 싶다. 다이어트에는 정체기라는 구간이 있는데 다이어트를 하고 있음에도 체중이 빠지지 않는 구간을 말한다. 바로 이 다이어트 정체기가 체중감량의 벽이다. 체중감량에 재능이 있다면 정체기가 늦게 올 것이고, 체중감량에 재능이 없다면 아주 짧은 기간마다 자주 정체기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어떤 것을 배우는데 실력의 정체기가 늦게 온다면 그 분야에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반대로 정체기가 짧은 주기로 빠르게 온다면 재능이 부족하다고 판단하면 되겠다는것이 나의 주장이다.
그러나 재능의 여부를 섣불리 판단해서는 안된다, 같은 분야 안에서도 재능이 세부적으로 나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색을 구별하는 원추세포가 더 많은지, 일반인들은 구별해 낼 수 없는 미묘한 색 차이까지 자세히 구분한다.
이는 마치 'ㅈ' 발음과 'z' 발음을 구분하는 것과 같다. 이 차이를 쉽게 구분하는 사람은 언제 어디서 들어도 명확하게 알아듣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아주 주의 깊게 들어야만 구분하거나 아예 차이를 모르는 경우도 있다.
또한, 색을 잘 구분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움직이는 화면 속의 색을 프레임 단위로 구분하는 문제를 받으면, 잘 해내는 사람이 있는 반면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다. 전자는 동체 시력도 좋은 경우이고, 후자는 동체 시력은 좋지 못한 경우다. 이처럼 재능은 아주 세밀한 분야로 나뉘므로 수학, 국어, 영어 같이 큰 단위로 나누어 섣불리 판단하는 건 위험성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내가 굳이 색 구분과 동체시력의 예를 든 이유는 이것이 시세포와 유전자의 차이, 즉 노력으로 메우기 어려운 분야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알지만 잘 말하지 않는 금기가 있다. 나는 지금 그 금기를 깨려 한다. "모든 직업에는 재능이 중요하고, 재능이 없다면 빨리 자리를 털고 일어나 다른 곳으로 가야 한다는 이야기"다. 물론 이 말을 하려면 전제 조건이 필요하다, 재능이라는 단어의 뜻을 아주 넓게 확장해야 한다.
우리는 재능이라고 하면 보통 미술, 음악, 체육, 문학 등 결과가 눈에 보이는 분야의 기본적인 소질을 떠올린다. 그러나 재능은 그런 것뿐만이 아니다.
많은 사무직 종사자들은 자신에게 재능이 없어서 사무직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 그들은 '지루한 일을 묵묵히 해내는 재능' '성실함의 재능' '무난한 성격과 좋은 사회성의 재능'을 가지고 있다. 프랜차이즈 떡볶이집을 하는 사람이라면 '현실성의 재능'과 '트렌드를 보는 눈'의 재능을 가지고 있을 것이고, 공인중개사로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영업의 재능'과 '법률 해석의 재능' 그리고 '친절함의 재능'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이런 전제 아래, 나는 창의성을 재능이 아닌 창의적 활동을 완수하는 힘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반짝이는 아이디어가 전혀 없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살면서 자신조차 감탄할 만큼 새롭고 기발한 아이디어를 생각해 낸 적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끝까지 끌고 가서 팔 만한 결과물로 만들어 세상에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창작으로 돈을 버는 전업 창작자가 되고 싶은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가장 달콤한 함정이 있다.
'나는 될 수 있었던 사람이다, 다만 되지 못한 이유가 세상에 있을 뿐'이라는 자기 위로적 변명이 그것이다. 가능성의 함정에 빠져서는 안 된다. '지망생'이라는 단어로 자신을 규정하고 너무 오랫동안 '가능성 있는 상태의 나'에 매몰되지 말아야 한다.
지망생이라는 단어는 너무 달콤해서 중독되기 쉽다. 또한 그 서사 안에서는 결과를 내지 못해도 자존감이 유지되기 때문에 더욱 위험하다. 진행도, 현재도 없이, '영원한 가능성의 무대 위에 서 있는 것'의 무서움을 알아야 한다. 가능성은 아름답다. 하지만 그것은 무한정 머물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 출구가 필요한 통로다.
물론, 반짝이는 아이디어와 철학, 감성 또한 아무나 가질 수 있는 재능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을 완성하지 못하면 상상은 망상이 되고, 철학은 아집이 될 뿐이다.
이 글의 화자는 나지만, 독자 또한 나 자신이다. 아직까지는 쓰기 시작한 글 모두를 완결 냈고, 공부를 시작한 책은 어떻게 해서든 전부 읽었다. 누군가는 공모전 당선이나 메이저 매체로의 등단이 '완성'이라고 하겠지만, 창작에 있어 가장 작은 단위의 완성은 작품 하나를 끝내는 것이다. 글의 수준이나 완성도에 상관없이, 시작한 글은 무조건 끝내야 한다.
쓰기 시작한 작품을 끝내지 못했던 사람은 새로운 다른 것도 완성하기 힘들다. 비록 완성 한 결과물이 용두사미의 모양이라 할지라도, 끝낸 것과 끝내지 못한 것은 0과 1만큼이나 완전히 다른 가치를 지닌다.
창작품에 소수점은 없다. 캔버스에 물감을 칠하기 시작해 작품을 완성하고 사인을 하면 1이 된다. 그러나 완성하지 못하면 몇 퍼센트를 그렸던 0일뿐이다. 문학 작품 또한 마찬가지다.
이렇게 말하는 나도 언젠가 무너질 수 있다는 걸 안다. 몇 년 전 그림책을 냈지만, 본격적으로 전업 작가가 되겠다고 마음먹은 지는 일 년도 채 되지 않은 초보 중의 초보라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실패는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 글을 배우면서 아직까지는 벽에 부딪히지 않아 다행이나, 한편으로는 벽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 또한 두렵다. 내가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는 증거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내 앞에 기다리고 있을, 앞으로 넘어야 할 수많은 벽들도 무섭다. 하지만 자기 연민을 감성으로 착각하는 일은 하지 않겠다. 지망생이라는 단어에 숨어 앞으로 나가지 않는 실수를 범하지 않겠다. 그리고 그때를 위해 이 글을 남긴다. 혹여 내가 감정에 휘둘려 창작을 하는 척만 하게 되었을 때, 이 글을 다시 읽고 고개를 돌려 결과물을 만드는 사람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또는 가장 현실적인 선택으로 방향을 틀 수 있기를 바라면서.
하지만 가장 바라는 것은, '될 수 있었던 나'에서 멈추지 않고 진짜 원하는 곳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전까지는 배우는 중인 주제에 이미 마스터한 것처럼 굴지 않겠다.
나를 신경 쓰이게 했던 그 사람들처럼 되고 싶지 않다. 생각만 해도 부끄러워 수치심이 느껴질 정도다. 변명할 자격은 완성한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자격을 얻기 전까지 내게는 변명할 입이 없다.
그렇기에 나는 매일 책상 앞에 앉는다. 단 하나의 완성이라도 더 만들어내기 위해서다. 꿈이 현실이 되는 그날까지, 나는 나의 재능과 한계를 냉정하게 마주하며 나아갈 것이다. 언젠가 이 글을 다시 읽을 때, '그때의 나는 정말 치열했구나'라고 스스로를 칭찬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