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선물 받은 책갈피에 어울리는 책 고르기

책갈피는 디자이너에게 우주다.

by 정채린

책갈피론 (Bookmark Theory)

내가 책을 좋아한다는 것을 아는 지인들은 종종 나에게 책갈피를 선물한다.

나는 운 좋게도 지인이 꽤 많아서 책갈피도 꽤 많이 쌓였지만 여전히 책갈피를 선물 받는 것을 좋아한다.

그 책갈피가 정말 내 취향이 아니거나 지독하게 못생겨 나를 놀라게 할 때도 있지만, 책갈피의 생김새를 따질 일은 아니다. 내게 책갈피를 선물하는 사람들은 최소한 나의 취미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누군가가 좋아하는 일을 기억해 주고, 그 일에 필요한 물건을 생각해 주는 것은 정말이지 위대한 일이다.

그 위대함은 작게는 잠깐의 미소를 선사하고 크게는 사람을 살리기도 한다.


책갈피를 선물 받으면 나는 그것들을 수집용과 실사용용 두 가지로 분류한다.


그리고 수집용은 책갈피 지갑에 넣어둔다. 나는 책갈피를 위한 지갑이 따로 있는데, 이 지갑은 투명해서 책갈피들을 가까이 두고 자주 보며 행복해하기 좋고, 투명한 재질이지만 단단해서 얇은 책갈피들이 구겨지거나 손상되지 않고 보관하는 데 유용하다.


수집용을 아예 사용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필요할 때면 꺼내서 쓰곤 한다. 그래서 수집용 책갈피 지갑은 항상 책상과 책장 가까이에 있다.


수집용과 실사용용을 나누는 특별한 기준은 없다. 그저 느낌에 따라 이것은 수집용, 저것은 사용용으로 구분해 왔을 뿐이다. 수집용은 선물 받은 그대로 보관해서 좋고, 사용용은 선물한 사람의 바람대로 쓰여서 좋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며칠 전 앨리스 달튼의 그림이 그려진 반투명한 책갈피를 선물 받고 난 후 나의 책갈피 분류 방식에 어떤 기준이 있다는 걸 알아챘다.


첫 번째, 책갈피는 책에서 튀어나왔을 때 이질적이지 않아야 한다.

소설 데미안을 펼쳤는데 그 안에 귀여운 시나모롤 책갈피가 끼어 있다면 그 간극에 잠깐 어지러울 것이다.

앨리스 달튼 삽화의 책갈피는 내 시집들을 돌아다닐 예정이다. 소설에 종종 쓰일 수도 있겠지만, 동화책 속에 들어갈 일은 없을 것 같다.


두 번째, 책갈피는 책을 망가트리지 않아야 한다.

이번 2025 도서대전에서 무명천 두 장을 겹쳐 바느질하고 풀을 먹여 만든 책갈피를 몇 개 받아왔는데 천을 겹친 만큼 두께가 두꺼운 나머지 아무래도 책을 망가트릴 것 같아 사용하지 않고 모셔두거나 진열만 해두었다.


세 번째, 책갈피는 무심코 떨어트렸을 때 망가지지 않아야 한다.

가끔 책갈피가 끼워져 있는 것을 모르고 책을 펼칠 때가 있다. 좋아하는 부분을 표시해 뒀거나, 여러 번 읽었거나, 읽다가 오랫동안 덮어두었던 책들에서 주로 그렇다.

대부분은 책갈피를 알아채지만, 가끔 눈치채지 못하고 들고 다니다가 바닥에 떨어뜨리는 일이 생긴다. 그때 찾지 못하도록 너무 작거나, 재질이 연해서 바닥의 먼지에 손상을 입을 것 같은 책갈피는 사용용으로 분류할 수가 없다.

소중한 건 상처 입게 하고 싶지 않다.


아마 이 외에도 책갈피를 분류하는 무의식적인 기준이 더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내가 직접 산 책갈피조차 수집용으로 분류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심지어 지금 쓰고 있는 책갈피 중에는 어디선가 찢어온 잡지의 일부분이나, 사람과 가게 이름이 모두 영어로 적힌 예쁜 미용실 명함도 있다.


디자이너의 관점에서 보면 책갈피는 매우 특별한 물건이다.

기능적인 면에서 디자인이 충족해야 할 조건은 그저 책에 끼울 수 있도록 납작하고, 책 보다 작기만 하면 된다.


그 이후부터는 전부 디자이너의 마음대로 하면 된다.

모양, 크기, 색상, 재질, 모서리, 재료 등 어떤 요소든 그 안에서 모두 그의 몫이다.

상업 미술만 해온 디자이너라면 조금 헤맬 수도 있을 만큼 상당한 자유도가 주어진다.


거의 백지에 가까운 작은 공간을 완성도 있게 채우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별

고민 없이 보편적인 디자인 공식에 따라 기존의 이미지를 배치해도 된다.

'누군가 하는 일이 쉬워 보인다면 그 사람이 잘하는 것이다'라는 말처럼, 별 고민 없이도 사실 쉬운 일은 아니다. 또는 특별히 기획한 디자인이나 생각해 둔 특별한 것으로 공간을 채울 수도 있다.

그럴 경우에는 조금 더 집중이 필요할 것이다.



보통 책갈피는 손바닥보다 작다.

그 작은 공간 안에 무한한 가능성의 우주가 담겨 있고, 그 우주를 완벽하고 완결성 있게 채우는 과제를 수행한 결과물이 내 책갈피 지갑 안에 겹겹이 포개져 있다.


그렇게 책장 옆의 책갈피 지갑은 무수한 세계의 합이 된다.

나는 아마 책에 더 이상 관심이 없어질 때까지 책갈피를 모으고 또 선물 받을 것이다.

그리고 책갈피를 보관하는 지갑이 몇 개 더 늘어날 만큼 두둑하게 모으게 될지도 모른다.


책은 하나의 세계를 담은 우주라고도 한다.

그리고 디자이너에게는 책갈피 또한 하나의 세계를 담은 우주다.

하나의 우주와 또 다른 우주가 포개지는 일, 그것이 바로 내가 책갈피를 골라 책에 꽂는 일이다.


그러니 어려운 것이 당연하다.

아무래도 이 책갈피 분류법에 대한 고찰은 앞으로 몇 달간 나를 더 괴롭힐 것 같다.

그리고 그 괴로움이 끝났을 때, 나를 제대로 알게 된 나는 조금 더 성장해 있을 테다.


이 글을 쓰는 동안 나는 책갈피 지갑을 옆에 꺼내 놓았다.

키보드에서 손을 떼는 순간, 나는 무수한 우주에 나를 던질 예정이다.

그 온전하고 완결된 세계로의 여행을 가능하게 해 준 내 지인들에게 다시 한번 감사하다.




저의 에세이가 재미있으셨다면 구독과 라이킷♡ 그리고 응원하기를 부탁드립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브런치 작가 되기, 심사글 잘 쓰는 법 - 자료첨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