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에 대해서는 누구나 다양하게 상상도 해보고, 나름의 논리를 내세워 앞으로 어떻게 변할 것인지 예측도 해 볼 수가 있다. 인류가 발전할 수 있었던 비결 중 하나도 현실세계에 있지도 않은 것을 생각하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이 세상이 바뀌는 속도로 보자면 지금은 다른 어떤 시대보다도 급변하는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아마도 이천 년 전에 살던 사람들은 그들이 살던 시대가 20년이 지나더라도 크게 변함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고작 바뀌는 것은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의 일부가 변할 뿐, 그들이 그동안 살아왔던 생활방식이나 사회, 국가의 환경은 여전히 그대로일 것이라고 예상할 것이다. 그에 비해 21세기 초를 살고 있는 우리는 향후 20년 동안 이 세상이 어떻게 변할 것인지 예측할 수가 없다. 이 사회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규모의 크기는 전 지구적이며 앞으로 온 우주로까지 그 범위가 넓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호모데우스]를 쓴 유발 하라리 역시 미래가 어떤 모습으로 변할지 예측하는 것은 힘들다고 하는데, 대신에 그는 미래의 인류가 어떤 방향으로 변화될지를 과거에서부터 시작하여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현재까지 인류가 수만 년의 역사는 인류를 위협하는 기아, 역병, 전쟁으로부터 어떻게 생존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이 있었다. 과거에 사람들은 이 세 가지 환난을 극복할 수 없는 것으로 인식하였고, 이런 재앙으로부터 피하기 위해 절대자(신)를 의지해왔다. 지금은 과학기술과 정치/외교 기술의 발달로 인류의 모든 역사에서 늘 사람들을 괴롭혀 왔던 위의 세 가지 재앙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열고 있다. 이제 사람들은 식량 부족 문제의 해결을 위해 신을 찾기보다 구호단체를 통한 지원을 요청하고 있으며 모두가 풍족한 식량을 공급받지는 않지만 적어도 굶어 죽는 일은 급격히 줄어들었다. 과거에 비해 굶어죽는 사람의 비율로 따지자면 엄청난 개선이 이루어졌으며 더 이상 기아가 인류를 파멸로 몰고 갈 위험으로 분류되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역병의 경우에도 여전히 사람의 생명을 위협하는 요인으로 꼽히지만, 과거에 비해 전혀 극복하지 못할 대상으로 여겨지지는 않는다. 그리고 일부에서는 앞으로 과학기술의 발달이 질병의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는 낙관적인 전망을 내놓기도 한다. 사람들끼리 서로 죽이는 전쟁의 경우에도 과거에 비해 발생 빈도가 급격히 줄어들었음을 알 수 있다. 겉으로 보기에 이 지구상에 평화 상태인 나라들이 대부분이며, 과거의 사람들이 느꼈던 불안정한 평화와는 달리 현대를 사는 사람들은 올해의 평화가 내년에도 계속 될 거라는 기대 속에 살고 있다.
인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 속에 이제 사람들이 추구하는 다음 단계는 인간이 갖는 태생적인 한계를 뛰어넘고자 하는 것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가 아니라 죽지 않는 불멸의 존재로 변화하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죽음이라는 뚜렷한 한계를 넘어서 죽지 않는 존재가 되고자 하고 있다. 그것을 이루는 방법은 구체화되지 않았지만 그것이 실현된다면 인간은 호모 사피엔스가 아닌 새로운 종 호모 데우스(신과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저자는 인간이 노화와 죽음을 극복하는 길을 연다고 해서 신과 동일한 수준이 된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인간은 자연적인 죽음을 피할 수 있을지 몰라도 사고와 재난 등으로 죽는 경우까지 극복하지는 못한다. 어떻게 보면 단지 죽음을 계속 뒤로 늦추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진정으로 죽음을 극복했다는 말은 실제로 죽은 사람을 다시 살아나게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직 생명에 대해서도 완전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미래에도 지금까지 인류가 탄생한 방식으로 새로운 생명체가 태어날 것이다. 저자가 생명에 대해서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새롭게 탄생하게 될 인류는 유기물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이 기계와 같은 사이보그 인간이 된다면, 어쩌면 지구의 환경문제도 고려대상이 아닐 수도 있다. 만약 호모 데우스가 되는 것이 성공적으로 이뤄진다면, 그것은 곧 호모 사피엔스의 종말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호모 데우스가 지배하는 세상은 쉽게 상상이 가지 않는다.
인류가 현재 개발하고 있는 연구 과제들이 성공적으로 달성이 되어서 모든 가능성이 열렸다고 가정했을 때, 그런 날이 올 거라고 가정하면서 우리가 해야 할 바람직한 질문은 ‘무엇을 할 것인가?’ 라고 할 수 있다. 기술은 그것을 어떤 목적으로 무엇을 위해 사용하느냐에 따라 이익이 되기도 하고 해가 되기도 한다. 미래를 예측할 때는 항상 낙관적인 시각만 가져서는 안 된다. 기술의 발전은 인류의 삶에 많은 한계를 극복할 수 있게 해주고 다양한 가능성들을 열어줬지만 인문학은 그 기술을 사용함에 있어 제한을 걸어주는 역할을 한다. 과학기술이 인류에게 주는 유익은 급속도로 퍼지게 되어 있어서 일단 그 유익을 경험하게 되면 과거로 돌이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인류가 죽음을 실제로 극복할 수 있을지는 확실치 않지만 만약 그게 가능해진다면 모든 인류가 그렇게 되고자 할 것이고, 먼저는 부유한 사람들이 수혜자가 될 것이다. 그로 인해 발생하는 차이는 그동안 인류가 겪었던 불평등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의 엄청난 차이가 될 것이 분명하다. 호모 데우스가 지배하는 세상은 호모 사피엔스들에게는 비극 그 자체일 것이다. 저자는 그러한 미래에 대해 비관도 낙관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예측할 뿐이다.
나는 이 책이 저자의 전작인 [사피엔스]에 비해 성공하지 못한 이유가 궁금했다. 생각해 보면 미래에 대한 예측이 과거로부터 현재까지의 역사를 살펴보는 것보다 더욱 관심이 가고 중요한 문제일 수 있을테니 말이다. 나는 어쩌면 사람들은 올지 안 올지도 모르는 미래에 대해 생각하는 것보다 뭔가 확실한 통찰을 주는 이야기에 더 끌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보다 실질적인 이야기에 더 관심을 갖기 때문이기도 한 것 같다. 우리가 미래를 걱정한다면, 망가져 가는 환경을 지키는 일에 가장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하지만 실제로 진행되는 환경 정책들은 대부분 다음 세대에 떠넘기는 것처럼 보인다. [호모 데우스]에 나오는 한 구절이 그래서 더 마음에 깊이 다가왔다.
환경을 보호하는 것은 무척 멋진 생각이지만, 집세도 못 내는 사람들에게는 녹아내리는 만년설보다 자신들의 마이너스 통장이 훨씬 큰 걱정거리이다 --유발 하라리, 호모데우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미래에 대한 중요한 화두를 던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불확실한 미래지만 현재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방향이 어떤 미래로 향하고 있는지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