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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규원 Feb 19. 2020

역사를 통해 배운다

과학을 통해 배운다는 것도 같은 말이다

  21년 전, 고등학교 2학년 물리 수업시간이었다. 내가 다녔던 학교의 물리 담당 선생님은 수업시간마다 뭐가 그렇게 신나셨던 것인지 모르지만 수업을 정말 신나게 하셨다. 대학입시를 목적으로 생물 공부시간이 상대적으로 높았기 때문에 물리는 내 관심 밖이었다. 수업을 열심히 듣질 않다보니 물리 선생님이 신나게 설명하시는 내용들이 하나도 이해가 되질 않았지만 그걸 설명하시는 선생님은 정말 아주 재밌는 내용을 알려주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사실 우리 반에서 과학탐구영역 선택과목으로 물리를 선택한 아이들은 10명도 안되었다. 물리, 화학, 생물, 지구과학 중에 가장 적은 수였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물리를 선택한 애들이 가장 공부를 잘했었다. 그 친구들 중 특히 공부를 잘했던 아이들은 물리를 선택한 이유가 가장 공부하기 편하고 깔끔해서라고 말했다. 나는 당시에는 동의가 되지 않았다. 실제로 물리 선생님은 수업을 할 때 가장 많이 말씀하신 것 중에 하나가 어떤 이론에 대해 자기도 왜 그런건지 이유를 잘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가르치는 사람조차 잘 모르는데, 물리가 깔끔하다니 궤변처럼 들렸다. 그런데 과학이라는 게 사람이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훨씬 많다는 것은 기본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가장 지지를 얻고 있는 이론들도 향후에 더욱 확실한 이론이 등장하면 폐기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항상 반응없는 학생들 앞에서 수업을 신나게 하셨던 우리 물리 선생님도 가끔 수업과 상관없는 내용을 말씀하시곤 했는데, 내가 기억나는 것 중 하나는 그 선생님이 역사를 공부하는 것에 대한 자기 생각의 변화를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이전에는 역사라는 것이 자기와는 상관없는 과거에 일어난 사건을 의미한다고 생각해서 중요하지 않게 생각했었다고 하셨다(내 기억이 맞다면 역사를 싫어했다고 하셨다). 그런데 이제는 생각이 바뀌었고,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씀하셨다. 당시에 그렇게 생각의 변화가 생긴 이유에 대해 자세히 말씀하시진 않았는데, 아마도 역사적 사건들을 통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교훈으로 삼을만한 것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셨던 것 같다. 당시에 내가 갖고 있던 고정관념은 과학이라는 학문은 뭔가 세상과는 고립되어 있다는 인식이 있었던 것 같다. 과학을 좋아하는 사람, 특히 과학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은 은둔적일 것 같고, 연구자들은 세상과는 단절된 채 자신의 연구에만 몰입해 있는 사람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당시 우리 학교에서 과학을 제일 잘한다고 생각되었던 사람이 역사도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 뭔가 서로 합쳐질 수 없는 이질적인 학문들이 연결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퓰리처 상을 받았고, 전세계적으로 초대형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인 [, , ]의 제레드 다이아몬드 박사는 어쩌면 역사도 과학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말했다(정확한 워딩은 찾아봐야 하지만 이런 느낌의 말이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주제 자체가 주는 부담감도 있었고, 어떤 부분은 읽는 것이 고역일 정도로 내용이 길어서 지루함을 느끼기도 했다. 책 자체도 750페이지가 넘는 두꺼운 책이어서 쉬운 책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역사에 대한 저자의 인식에 크게 공감하면서 나름 흥미를 갖고 읽을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역사와 과학의 공통점을 꼽자면, 결과에는 원인이 반드시 있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과학과 역사에서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분야가 어느정도 인과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과학이 자연현상의 원리를 탐구하면서 인과관계를 찾는 것이라면, 역사는 인간사회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인과관계를 탐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역사는 과거에 일어난 사건들을 있는 그대로 서술한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역사를 기술한 사람의 주관적인 평가와 해석이 들어가며 그러한 주장에는 반드시 과학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 [총, 균, 쇠]가 좋은 책인 이유는 인류의 여러 문명들이 똑같이 발전하지 않고 각기 발전에 차이를 보이는 이유를 여러 과학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설명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월드컵 축구 경기를 보면 대륙별로 실력차이가 많이 나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은 그래도 그 차이가 예전보다는 좀 줄었지만 여전히 일부 대륙들에서 우승컵을 독식하다시피 하고 있다. 누군가는 스포츠 경기에서 드러나는 실력 차이는 인종의 차이 때문이라고 너무 쉽게 이야기하고 싶을 수도 있겠지만 내 생각에는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이유가 있는 것 같다. 그것은 아마도 축구를 하는 환경의 차이가 더 중요할 것이라는 생각인데, 자국의 축구리그의 수준과 관련 산업의 인프라가 얼마나 좋은지에 큰 영향을 받을 것이며, 국가대표 선수들 가운데 축구 최상위 리그에 소속되어 주전으로 뛰는 선수들이 얼마나 있는지도 큰 영향을 줄 것 같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실력을 갈고 닦은 선수들이 국가대표에서도 좋은 실력을 보여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다 직접적으로 선수들의 컨디션 유지와 감독과 코치진의 능력이 월드컵과 같은 단기평가전에서의 성적을 반영할 것이다. 여러 다양한 요인들이 복잡하게 영향을 주고 있는데, 분명한 것은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순전히 인종의 차이가 주된 원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총, 균, 쇠]의 저자는 대륙별로 문명의 발생시기는 달랐지만 어떤 대륙은 발전을 거듭해서 결국 다른 대륙을 지배하는 위치에 오른 반면 어떤 대륙은 지배를 당하는 입장이 되었는지 이유를 설명한다. 과거에 사람들은 그렇게 대륙별로 지배/피지배 관계가 형성된 이유가 그 지역을 구성하는 사람들의 인종 차이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전혀 그렇지가 않다. 인종의 차이는 사람들의 지적능력과 같은 어떤 본질적인 차이를 나타내지 않는다. 단지 그들이 처해있던 대륙의 환경 요인들이 달랐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환경적 요인들의 차이가 책의 제목에서 유추해볼 수 있는 군사무기(총), 질병에 대한 내성(균), 생산기술의 발달(쇠) 이 갖춰지는 시기의 차이를 가져오게 되었다. 한가지 예로 야생식물의 작물화, 야생동물의 가축화는 농경기술의 발달을 촉진시켰고 그 결과 많은 잉여생산물이 발생할 수 있었으며 이를 통해 인간사회는 그 규모가 점점 더 커질 수 있었다. 야생동물의 가축화는 인간들이 전에는 경험해보지 못한 무서운 질병들이 창궐하게 하는 원인이 되었고, 큰 타격을 입긴 했지만 질병에 대한 내성이 생김으로 인해 나중에 다른 대륙을 정복할 때 결정적인 차이를 만들어주게 되었다. 잉여생산물은 사람들 간에 무역활동이 가능하게 해주었는데 그 과정에서 원시적이긴해도 최초의 문자가 발명되었다. 문자 발명 초기의 기록들을 보면 대부분의 문서는 사람들 간에 거래 기록이나 회계기록이 담겨있는 것이었다. 문자의 발명은 곧 더 많은 정보들을 저장할 수 있게 되었고, 이는 전쟁과 같은 군사작전에 매유 요긴하게 활용되는 정보교환의 수단이 되었다. 사회의 규모가 커질수록 더 많은 사람들을 하나의 집단으로 통제하기 위해 중앙집권적인 정치구조가 발전하게 되었고, 곧 중앙집권적 전제국가의 탄생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발전은 유라시아 대륙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는데, 그 이유는 유라시아 대륙이 다른 대륙과는 달리 횡으로 확장될 수 있는 지형을 갖고 있어서 비슷한 형태의 문명이 빠르게 확산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종으로 퍼진 형태의 다른 대륙들(아프리카, 남/북 아메리카 - 반면, 오세아니아 대륙은 고립되어 있었다)은 작물화할 수 있는 식물들이 확산될 수 없는 환경적인 제약이 있었다. 횡으로는 비슷한 기후를 보이기 때문에 작물의 확산이 가능하지만 종으로는 완전히 다른 기후를 보이므로 작물의 확산이 불가능하다. 



  이 책에서는 각 문명들이 왜 다른 양상을 보이면서 발전할 수 밖에 없었는지 이유를 자세히 설명한다. 그리고 이 책을 다 읽었을 때는 그러한 차이들이 나중에는 극복할 수 없는 큰 차이로 나타나게 되는 것을 보여준다. 나는 저자가 갖고 있는 지식의 깊이와 방대한 자료에 대해 놀라움과 감사함을 동시에 갖게 되었다. 이 책은 세상을 좀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큰 그림을 그려보았을 때, 각 대륙에서 일어난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들이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던 필연적인 이유들을 과학적인 근거와 함께 제시하고 있어서 대단히 흥미로웠다. 



  역사를 통해 배우지 못하면 역사는 반복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를 둘러싼 환경이 자연스레 똑같은 결론으로 우리를 내몰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세계는 환경적 요인의 차이를 극복할 수 있는 기술발전의 시대라고 생각한다. 이제는 과거와 달리 환경 차이를 극복할 수 있는 기술적인 해결책들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역사를 통해 어떤 비극적이고 부정적인 사건이 발생한 과학적 원인을 찾았다면,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방책도 찾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를 통해 배운다는 교훈의 의미는 과학을 통해 배운다는 것으로 바꿔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역사적 사건에서는 그 원인과 결과 사이에 복잡하긴 하지만 역학적 관계가 있어서 그 원인을 제거하거나 바꿀 수 있다면, 다른 결과도 기대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런 역학관계 때문에 나는 역사와 과학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하며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은 모두 과학적인 근거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과거에는 과학적인 분석이 뒤따라주지 못했기 때문에 필요 이상으로 많이 여러 역사적 사건들을 비과학적으로 해석했지만 이제는 과학적인 검증과정을 철저히 거쳐 비극적인 역사적 사건들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을 하고 있다.






  내가 고등학교 물리 선생님이 역사를 싫어하셨다는 말에 놀랐던 것은 나는 과학을 좋아하면서 역사 또한 무척 좋아했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우리 집에는 위인전이 세트로 있었고 나는 한 사람의 역사를 다룬 위인전을 정말 좋아했다. 특히 과학자들의 위인전을 좋아했는데, 그들 덕분에 현재 우리가 누리는 혜택들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었다. 에디슨의 전기를 읽으며 에디슨 덕분에 전구에 불을 켤 수 있고, 밤에도 무서운 화장실에 갈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었다. 지금도 나는 과학도서를 읽을 때, 하나의 기술이 여러 사람들에 의해 개발되고 발전되는 과정을 읽는 것에 흥미를 느낀다. 과학이 인간의 삶에서 불편함(때로는 치명적인 위협)을 제거하고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데에 목적이 있다면, 역사 역시 인간의 삶에서 과거 역사적 사실로부터 원인을 찾아 현재와 미래의 삶을 개선해나가는 데 목적이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이 두 학문은 동일한 목적을 가지며 서로 연결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혹시나 역사에도 관심이 없고, 과학에도 관심이 없는 사람이 있다면 다시 한번 마음을 열고 현재의 삶을 더욱 잘 살 수 있도록 역사와 과학에 관심을 가져보기를 바란다는 마음을 전하고 싶다. 




제레드 다이아몬드, [총, 균, 쇠] (1998), 문학사상





Photo by Louis Hansel @shotsoflouis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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