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3학년 때 담임 선생님은 역사를 가르치셨다. 내가 졸업한 고등학교는 사립 고등학교여서 각 교과목 선생님들이 그렇게 자주 바뀌지는 않았다. 나는 당시 담임 선생님의 역사 수업을 좋아했는데, 수업시간마다 아이들이 흥미를 느낄만한 소재를 던져주셨기 때문이다. 거의 매 수업마다 당시 텔레비전에서 방영 중이거나 과거에 방영했던 사극 드라마를 언급하시면서 그 시대 사람들의 생활상을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셨다. 한 편의 드라마에는 주인공의 삶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지만, 그 주변 인물들의 상황을 통해 한 시대의 여러 면면들을 살펴볼 수가 있다. 당시 역사 수업에 빠지지 않고 나왔던 예시는 드라마 ‘허준’ 이었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인 허준의 삶을 통해 조선시대의 의술과 의료 환경에 대한 이야기가 극의 중심을 이뤘는데, 이와 더불어 당시 조선의 정치 상황, 신분 제도, 소작농의 힘든 삶, 주변국들과의 외교상황 등, 이 모두가 조선이라는 세상에 영향을 주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또한 고 3 때의 역사 수업이 특히 재밌게 느껴졌던 것은 교과서에 적힌 내용들을 뛰어넘어 선생님만의 견해를 드라마라는 구체적 예시를 통해 풀어서 알려주셨기 때문이었다.
나는 역사라는 학문에 큰 매력을 느낀다. ‘역사적 사실’ 이라고 하면 그저 단순히 과거에 있었던 사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여기에는 기존과는 다른 어떤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영향력을 가진 사건들이 포함되는데, 역사는 어떤 식으로든 변화를 준 사건들에 대한 기록이라고 생각한다. 역사는 과거에 있었던 일들을 연구하는 학문인 동시에 현재를 위한 것이며, 미래를 지향한다고 생각한다. 즉, 과거로부터 교훈을 얻어 그것을 현재에 적용하여 바람직한 미래를 그리는 것이 역사를 연구하는 목적인 것이다. 과거로부터 교훈을 얻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해석이 따르게 되며 사람들은 과거에 겪었던 개인이나 집단의 경험을 토대로 공동체가 함께 지켜나가야 할 교훈들을 현재에 적용시킨다. 이 교훈들이 사회에서 받아들여지면 그것은 그 사회의 관습과 문화가 되고, 그 사회에 속한 구성원들은 하나의 세상을 이루게 된다. [다시 보는 5만년의 역사] 의 저자 타밈 안사리는 이렇게 공동의 교훈을 공유하는 개별 세상을 ‘별자리’ 로 표현하였다. 나는 저자가 지구에 존재하는 여러 세상들을 별자리로 표현한 것에 대단히 만족한다. 세상 어디에서나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비슷한 삶의 모습을 보이며 큰 틀에서는 공통점을 갖고 살아간다. 그러나 각기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은 분명 차이점을 갖고 있으며 그러한 차이가 때로는 서로가 어울릴 수 없는 이질적인 특성이 되기도 한다. 밤하늘에 수많은 별들 중 어떤 별들을 서로 연결하여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새로운 별자리가 탄생하는 것처럼 같은 별이라도 다른 별들과 어떻게 연결되어 어떤 의미가 부여되느냐에 따라 완전히 새로운 별자리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인류의 역사는 환경의 영향을 받아왔다. 인류는 식량을 찾아 수렵 채집생활을 했었고, 보다 안정적인 식량의 확보를 위해 무리를 이루었다. 나는 때때로 인류가 정착할 생각을 하지 않고 그냥 계속 수렵 및 채집을 통한 생존을 계속해 왔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보기도 한다. 아마도 지금과는 비교도 될 수 없을만큼 깨끗하고 아름다운 환경에서 살았을 것이다. 먹을 것 하나에 깊이 감사하면서 생존을 위한 왕성한 활동으로 인해 군살이라고는 없는 몸을 유지하면서 살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많은 불안요소들 때문에 하루하루를 전전긍긍하며 살았을 것 같다. 정착을 통한 농경생활의 시작은 인류의 삶을 완전히 바꿔놓았고, 어떤 사람들은 농경이 아닌 목축을 통한 유목민이 되기도 했다. 인류는 농경과 목축, 그리고 기존의 수렵 채집 생활로 나눠지면서 최초의 별자리들이 탄생하게 되었다. 농경생활을 하게 된 사람들은 큰 강 유역에 정착하여 문명을 이루었는데, 각 대륙의 각 지방으로 사람들은 서서히 퍼져 나갔고, 오랜 기간 서로 왕래가 없었다. 이렇게 퍼져나가 생성된 별자리들은 독자적으로 성장하고 변화되었다. 때로는 가까이 위치한 세상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교훈들을 흡수하기도 하고, 교환하기도 하면서 변화를 이루었지만 큰 틀에서 동양사회와 서양사회, 그리고 중간지대는 단절되어 있었다.
초기의 국가들은 자기네 나라의 부족한 재화를 충족하기 위해 인근 국가를 침략하는 방법을 주로 사용하였다. 이 시기에는 각기 다른 별자리들의 충돌은 주로 전쟁을 통해 이루어졌다. 지배-피지배 관계 안에서 지배국의 문화와 관습이 지배를 당하는 국가에 영향을 끼쳐 침략당한 나라를 변화시키는 경우가 많았는데, 때로는 오히려 침략한 나라가 역으로 변화되는 경우도 있었다. 역사에 기록된 별자리들은 이러한 충돌과정에서 승리한 경우들뿐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별자리들이 더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별자리들은 분명 존재했겠지만 세상에 변화를 주는 데 어떤 영향도 주지 않았기 때문에 역사에서 사라지고 만 것이다. 전 세계가 동서양과 그 중간세계로 나뉘어 독자적으로 미래를 맞이하고 있을 때, 항해술의 발달과 함께 최초의 대륙 간 이동이 발생하며 단절되었던 세상이 실질적으로 연결되었다. 세상은 멀리 떨어진 다른 세상의 영향을 받게 되었으며 독립적으로 일어난 사건처럼 보이는 현상들도 사실은 다른 세상과 연관관계에 있다는 것이 드러나게 되었다. 온 세상이 연결된 이후로는 더 이상 물리적인 전쟁은 선호되지 않았고, 오히려 무역을 통한 경제교류가 더 선호되었다. 경제력이 곧 국력이었으며, 돈을 소유한 국가가 전 세계의 패권을 갖게 되었다.
신대륙의 발견이 없었다면 뉴욕은 지금 어떤 모습이었을까, New York, United States (Photo by CapDfrawy on Unsplash)
별자리들의 충돌과 그 영향으로 인한 변화는 무력에 의한 지배-피지배 관계가 아닌 물질과 재화가 오고가는 경제 관계 아래에서 발생하게 되었다. 가치를 가진 것이라면 그것이 유형의 것이든 무형의 것이든 거래가 가능한 제품이 될 수 있었다. 어떤 제품이든지 공동체에서 받아들여지고 널리 보급되게 되면 기존의 별자리를 바꿀 역사적 사건을 만들 수도 있었다. 역사는 변화를 기준으로 기록되었지만 모든 것이 다 바뀌진 않았다. 별자리를 구성하는 별들 중 일부는 바뀌었지만 여전히 많은 별들은 보존되었다. 나는 역사를 흥미롭게 관찰하면서 인류에 일어난 변화에 집중하면서도 동시에 오랜 기간 변하지 않고 보존되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도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현재 우리가 가진 많은 별들 가운데서 미래에 바뀌게 될 것과 보존해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구분할 수 있는 안목을 갖출 수 있기를 소망한다.
저자는 이전의 인류가 같은 물질세계 아래에 있었다고 한다면 앞으로의 인류에게는 지금의 인간보다 더 기계화된 인간들과의 경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전망한다. 미래의 모습을 섣불리 예측하는 것은 힘들지만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는 올바른 미래를 그리기 위한 것임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다시 보는 5만년의 역사] 는 인류의 역사, 세계사를 서로 다른 세상들(별자리들)의 충돌과 연계로 인한 변화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 누구든지 누구나와 연결될 수 있는 세상이 바로 지금의 세상이다. 하지만 저자는 현 세상이 모두가 모두와 연결될 수 있는 세상은 아니라고 말한다. 지구의 한쪽 편에서 일어난 사건이 다른 쪽에 있는 세상에 심각한 영향을 줄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지만 그렇다고 일률적인 시스템으로 모든 세상을 통제할 수는 없다.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는 세상에서 결국 가장 필요한 건 각 별자리들의 맥락을 이해하고 함께 대화할 수 있는 능력이다. 다른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세상을 만드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함께 미래를 그려가기 위해서는 대화와 존중을 통한 상호작용이 필요하며 이 과정에서 각 별자리들은 새로운 변화를 맞이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현재라는 시점은 시간이 지나면 미래의 역사가 될 것이다. 그런데 모든 사건들이 역사로 기록되지는 않을 것이다. 변화를 이끄는 영향력이 있는 사건들만이 역사로 기록될 것이고, 영향력이 없는 사건들은 역사의 뒷 그늘로 사라질 것이다. [다시 보는 5만년의 역사]에서는 세계사에 영향력을 크게 준 사건들을 몇 가지 언급하는데, 사실 그와 동일한 사건들이 기록된 것처럼 단 한번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가령, 동서양이 연결된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이나 인쇄술의 발달, 전화기의 발명 등과 같은 일들이 그 시기를 전후해서 이미 다른 누군가에 의해 일어났던 일들이었지만 오직 큰 영향을 준 사건만이 역사에 기록되었다. 역사는 모든 사건을 빠짐없이 기록했을 때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은 역사적 가치가 없는 일들도 얼마든지 많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역사를 통해 진정으로 배워야 할 것은 그 사건들이 지니는 의미의 가치들을 파악하는 것이며, 그것들을 현재에 적용하여 미래를 지향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고등학교 3학년 때의 역사 수업은 교과서에 나오지 않은 세세한 이야기들을 드라마라는 확실한 예시와 함께 배울 수 있어서 좋았었다. 교과서가 모든 역사적 사실들을 담지 못했고, 그것에 대한 설명 또한 충분하지 않았던 만큼 수업을 통해 새로운 지식을 배울 있었던 것이 의미있었지만,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때의 역사 수업 역시 과거에 있었던 사건들을 통해 그 당시의 시대상을 알아보는 선에서 그쳤던 것이었다. 물론 우리 민족이 외세의 침략으로 위기를 겪었을 때, 그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의 많은 교훈들이 있었고, 이를 통해 현재 우리가 국력을 키우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를 생각해 볼 수는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지금 다시 역사를 공부한다면, 나는 우리나라, 대한민국이라는 단일 별자리의 고정된 세계관을 뛰어넘어 인접 국가들과의 연계와 충돌의 관점으로 집중해서 바라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아마도 전에는 외면 받았던 사건들이 새롭게 조명 받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거기서 얻은 교훈들을 현재에 적용해서 우리와 다음 세대들이 살아갈 미래에 적용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