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주요 내용은 글자로 이뤄져있다.
그림과 도표는 보조 수단일 뿐이다.
저자는 책에서 글자라는 수단을 통해서 저자가 갖고 있는 생각을 독자들에게 전달한다. 미래에 신경과학이 더 발달한다면, 독자는 저자의 생각에 직접 접속해서 그의 생각을 조금의 오해없이 바로 알게 되는 시대가 올지도 모른다. 그 때쯤이면 글자가 갖는 역할이 지금보다 더 축소될지도 모르겠다. 생각에 관한 도구들 중 지금까지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해왔던 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글자였다고 생각한다. 글자가 발명되기 전, 생각의 기록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질 수 밖에 없었다. 말을 통한 생각의 전달은 한계가 명확했다. 구전을 통해서는 몇 세대를 거치는 동안 미묘한 변화가 생길 수 밖에 없고, 전해줄 수 있는 양도 상대적으로 작았다. 또한 내용이 같더라도 화자가 누구냐에 따라 내용이 달라질 가능성이 너무 컸다. 글자는 생각을 오류없이 정확하게 전달하는 데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였다.
저자는 최대한 자신의 생각이 오류없이 전해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쓰기 능력이 필요하고, 독자는 그런 저자의 글을 오류없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읽기 능력이 필요하다. 저자는 자기의 생각을 가장 잘 이해한 독자를 만날 때 기쁠 것 같고, 자신의 의도와 다르게 이해한 독자를 발견하면 슬플 것 같다. 쓰기와 읽기 사이에 관여하는 주체가 서로 달라 발생할 수 있는 어긋남은 저자의 쓰기 능력의 향상, 또는 독자의 읽기능력 (때로는 읽기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독자의 왜곡된 해석이 문제일 수 있다) 향상으로 어느 정도 해소할 수가 있을 것이다. 저자는 자기의 생각을 정확하게 전달할 목적으로 중요한 메세지에 대해서는 적절한 그림과 도표를 사용한다. 그림과 도표는 잘 사용하면 저자가 풀어가고자 하는 생각의 논리들이 독자들의 생각이 되도록 도움을 준다. 좋은 글에 좋은 시각자료들이 더해지면 이는 마치 일반 자전거에 부스터를 달아주는 것과 같은 효과를 갖는다.
책에 사용되는 시각자료들이 갖는 효과는 매우 강렬하다. 잘 사용된 그림은 독자들이 내용을 잊어버리더라도 그 그림만큼은 오래도록 기억하게 하기도 한다. 나는 독자로써 그림이나 도표보다 글자에 더욱 집중하려고 노력한다. 좀 더 과하게 표현하자면 책을 읽는 동안에는 그림을 배제하고자 하는 노력을 한다. 최대한 글만 읽음으로써 저자의 생각을 파악해보려 한다. 그래서 글만 읽어도 잘 파악이 되는 내용들은 그림을 대충 보게 된다. 그런 경우는 그림이 없더라도 괜찮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내가 책에서 얻는 즐거움은 글을 읽는 즐거움이 압도적으로 크고, 그림과 표를 보면서 얻는 즐거움은 상대적으로 매우 작다. 이는 내 독서습관에도 영향을 미쳐서 새로운 정보 전달을 주요 목적으로 하는 보고서 형식의 글보다는 저자의 생각과 논리가 주요 내용이 되는 논설 형식의 글을 읽는 것을 더 선호하게 되었다.
이렇게 글자에 대한 애착이 너무 강하다보니 어떤 경우에는 책에 삽입된 그림이 독서의 어려움으로 작용할 때가 있다. 글을 읽는 도중 그림을 봐야 할 때가 그렇다. 글과 그림을 번갈아가면서 봐야 하기 때문에 집중력이 떨어지는 것을 느끼곤 한다. 그래서 최대한 글에서 관련 내용을 다 읽고 난 후에 그림을 보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내가 파악한 내용이 그림에서 확인이 되면 다음 내용으로 넘어간다. 내가 생각할 때 그림과 도표는 저자의 생각을 강화시켜주는 역할을 할 때가 가장 좋은 것 같다. 반대로 저자의 쓰기 능력의 부족함을 그림과 도표로 보완하기 위해 사용될 때가 가장 안 좋은 경우가 아닐까 생각한다. 책에서 핵심 컨텐츠는 특별한 목적이 없는 한 글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좋은 책을 읽을수록 글을 다루는(읽고 쓰는) 능력이 향상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오늘도 생각을 담은 글자의 세상에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