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규원 Aug 13. 2019

가방은 책을 넣으라고 있는 것이다

웬만해선 책을 빼지 않는다

  내가 일하는 곳에는 40년 가까이 근무하신 연구자 분이 계시는데, 내년이면 정년이 다 해서 은퇴를 앞두고 있는 분이다. 그 분은 직장에서 2시간 이상 떨어진 지역에서 오시는데, 늘 지하철을 이용하여 출퇴근을 하신다. 어느 날 우연치 않게 그 분의 가방을 볼 기회가 있었다. 족히 20년은 넘게 쓰신 것처럼 보이는 낡은 가죽 가방 안에는 하드커버로 된 책 한 권이 들어 있었다. 그 책은 광촉매에 대한 책이었는데, 최근에 광촉매에 대해 공부하신다면서 지하철로 오고 가는 길에 그 책을 읽으신다고 하셨다. 내년이면 은퇴를 하시는 분이 더 이상 연구를 하지 않아도 누구 하나 뭐라고 할 사람이 없는데, 오고 가는 지하철 안에서 공부하기 위해 책을 들고 다니신다. 잘 모르는 것을 공부하기 위해서. 그리고 가방 안에는 다른 물건은 하나도 없었다. 그 분의 가방은 오직 책을 넣고 다니기 위해서만 사용되고 있었다. 그 분은 지하철 안에서는 오직 광촉매 공부만 하시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 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나 역시 출퇴근 길을 잘 활용하여 독서하고 공부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겠다고 생각을 했다.



  독서는 기본적으로 시간을 많이 소모하는 활동이다. 나는 300-400 페이지 정도 되는 책 한 권을 다 읽는 데 1주일 정도 걸리는 편이다. 보통 하루에 50페이지 조금 넘게 읽는 것 같다. 그리고 주말에는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느라 책을 잘 읽지를 못한다. 아직은 어린 자녀들이 아빠랑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때가 거의 주말 밖에 없기 때문에 주말에는 온전히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고 아내와 대화를 나누느라 책을 읽을 시간을 내기가 힘든 면도 있다. 나는 보통 50분 정도 걸리는 출퇴근 길에 책을 읽고, 점심 시간을 이용해서 책을 읽는 편이다. 가끔 퇴근 후에 도서관에 들러서 책을 읽을 수 있을 때도 있지만, 그런 경우는 정말 1년에 한 두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다. 이동 중에 책을 읽을 때가 많기 때문에 내 가방에는 언제나 읽고 있는 책이 들어있다. 500 페이지가 넘는 책들을 제외하면, 직접 책장을 넘겨 가면서 읽는 느낌이 좋아서 종이 책을 가지고 다닌다. 책을 넣고 다니면서 버스에 타고 자리에 앉자 마자 책을 꺼내 읽는다. 가끔 어르신께 자리를 양보해야 할 때면 서서 읽을 때도 있다. 그리고 버스에서 지하철로 환승을 하자마자 다시 책을 읽는다. 지하철에서는 특별히 자리에 앉지 않아도 책을 읽는 것에는 불편함이 없다. 출퇴근 길에는 걸어서 이동하는 시간과 환승하는 시간을 빼고 약 30분 정도씩의 시간을 확보할 수 있다.



  나는 따로 점심 약속이 있지 않는 한 거의 혼자서 점심을 먹는 편이다. 왜냐하면 자유롭게 내가 원하는 메뉴를 먹을 수 있어서 좋고, 점심 후에 다시 책을 읽을 시간을 확보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이다. 그래서 일주일에 3일 정도는 혼자서 밥을 먹는다. 과거에는 이렇게 책을 읽는 것이 쉽지가 않았는데, 책을 항상 갖고 다니면서 좀 익숙해졌다. 전에는 손에 책을 들고 다니면 어딘가 어색한 느낌이 들었지만 이제는 손에 책이 없으면 더 어색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점심 시간에는 가끔 책을 더 집중해서 읽기 위해 사무실에 휴대전화를 두고 책 한권만 손에 들고 식사하러 가기도 한다. 독서를 방해하는 가장 큰 주범 중 하나가 스마트폰을 비롯한 디지털 기기들이기 때문에 보다 철저하게 고립되고자 애쓰는 것이다. 혼자 밥을 먹는 것도, 스마트폰을 두고 나가는 것도, 책을 손에 들고 다니는 것도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이제는 편해졌다. 어떻게든 책을 읽고자 하는 필사적인 마음이 있다면 잠시동안의 시간만이라도 책과 함께 고립되어 보길 권한다. 우리는 가끔 디지털 정보들로부터 좀 떨어져 종이 위에 적힌 글자들을 통해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항상 책을 가방에 넣고 다니는 나도 가방에서 책을 빼놓을 때가 있다. 바로 가족들과 시간을 보낼 때이다. 특히 우리 5살, 3살 자녀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 동안은 책과 잠시 떨어져 지낸다. 온전히 아이들의 요구에 반응하며 성실하게 소통하기 위해서다. 독서를 통해서 얻는 나의 즐거움보다 자녀들과 놀면서 보내는 시간이 더욱 소중하기 때문에 이 시간만큼은 부족하지만 아이들의 아빠로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한다(아이들과 보내는 시간에도 가장 큰 위협이 되는 것은 바로 스마트폰이다). 만약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에도 내 가방에 책이 있다면, 나는 혼자서 책을 볼 기회를 계속 엿볼 것 같다. 웬만해선 책을 빼지 않지만 더 소중한 시간을 위해 가방의 본래 목적을 무시하고 책을 잠시 빼놓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가방 #독서 #혼밥 #버스 #지하철

매거진의 이전글 책을 구매하기 전에 참고하는 것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