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익은 늙은 호박을 보면 그때의 시간이 따라온다
잘 익은 늙은 호박을 보면 묘한 시간이 함께 따라온다. 비바람을 온몸으로 맞고, 가장 낮은 땅에서 묵묵히 견뎌낸 시간의 무게가 손끝에 전해진다. 꽃피던 봄을 품고, 잎이 푸르던 여름을 지나, 화사한 가을마저 통과해 마침내 내 손에 도착한 결실. 늙은 호박은 스스로를 뽐내지 않지만, 그 둔탁한 모양 안에는 계절의 기억과 기다림의 철학이 고스란히 들어 있다.
며칠 전 남편과 함께 강화 전통 시장에 갔다. 서울에서 한 시간 좀 더 가면 닿는 거리다. 강화 시장에만 가면 눈이 먼저 반짝인다. 사야 할 것도, 보고 싶은 것도 유난히 많다. 인삼과 젓갈을 고르고, 늙은 호박 앞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그날따라 늙은 호박이 많이 나와 있었다. 두리뭉실하고 펑퍼짐한 것, 엉덩이를 두드려 보고 표면의 굴곡을 어루만져 보며 한참을 고른다. 그러나 맛의 본질은 모양이 아니라 그 안에 스며든 시간과 영양분임을 알기에, 오래도록 자연을 잘 품었을 법한 것들만 골라 두 덩이를 담았다.
분이 보얗게 올라온 늙은 호박은 단맛이 깊다. 호박범벅을 하려고 황갈색이 진한 배부터 갈랐다. 쩍 벌어지며 드러난 두툼한 속살의 빛깔이 어찌나 이쁘던지. 풋풋함은 이미 물러나고, 단맛이 그윽하게 들어있다. 단단한 살 속에 깊게 스며든 단내가 어느 들녘의 한 귀퉁이를 통째로 옮겨놓은 듯 향기롭다. 들녘에서 온 것은 무엇을 어떻게 품었느냐에 따라 크기와 맛과 향이 달라진다.
땅에서 자라난 것들은 모두가 그윽한 향을 뿜고 있다. 뿌리를 내리는 순간부터 자연의 순리에 초연히 받아들인다. 비와 바람, 햇볕을 그저 오롯이 받아들이고 품는다.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아도, 생존을 위해 스스로의 투쟁을 이어간다. 비바람에 흔들리며 한 생을 버텨낸다는 것. 어쩌면 그것은 살아있음의 본질일지도 모른다.
내 유년의 뜰 안에는 아름다운 풍요가 있었다. 뒤뜰에 호박 덩굴이 길게 이어져 있었고, 여름이면 복숭아와 포도, 자두가 제철을 알렸다. 과일의 고장에서 자라 과일의 단맛을 누구보다도 잘 기억한다. 그 시절의 풍요는 지금의 여유와 다르다. 계절을 따라 살아냈고, 사람들은 그 곁에서 기다릴 줄 알았다. 기다림 끝에 얻은 것은 늘 소박 하지만 충분했다.
그 옛날 시골에서 늙은 호박죽 한 그릇은 주식이고 진심이었다. 먹거리가 넉넉하지 않던 시절, 호박죽은 별미였다. 갖가지 재료를 넣고, 엄마의 손맛이 더해진 호박죽은 배를 채우는 음식이기 전에 마음을 나누는 온기였다. 그 맛이 오늘의 미식처럼 화려하지는 않아도, 종갓집 종부 엄마의 손맛과 정성은 가장 깊게 들어 있었다. 엄마는 늘 호박죽을 넉넉히 끓여 이웃과 나눴다. 나눔은 의식이었고 의무 같은 것이었다.
호박죽을 끓이는 동안 나는 자주 엄마를 떠올린다. 숟가락을 저어가며 불의 세기를 살피던 엄마의 뒷모습, 김이 오르는 가마솥 앞에서의 고요한 집중, 아무 말 없이 많은 이들과 나누고 건네던 한 그릇의 온기. 엄마의 손길에는 정이 있었고 무엇보다 종갓집 종부 엄마 손맛이었다. 요란하지 않고 드러내지 않아도 그 손 맛은 동네 사람들과 일가친척들 가슴에는 오래 남아있을 것이다. 종갓집 종부로서 엄마는 따뜻한 정과 손맛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을 품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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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호박죽에는 그때의 시간이 들어 있다. 땅의 시간과 계절의 시간, 엄마의 시간. 그 시간을 천천히 음미하면 호박죽 맛이 더 맛있다. 늙은 호박은 그때의 시간을 말없이 알려준다. 엄마의 사랑 늙은 호박은 많은 걸 품고 있다. 잔잔하게 밀려오는 그리움과 그 기억을 가지고 또다시 삶을 향해 한 발 내딛는다.